불어라 흥행바람, <불어라 봄바람>

03.08.29 20:49최종업데이트03.08.30 08:31
ⓒ 시네마서비스
영화를 보면서 각본은 누가 썼을까 궁금했다. 한 때 창작활동을 했고 신춘문예 등단을 꿈꿨던 내게 있어 <불어라 봄바람>의 시나리오는 참 질투 나는 것이었다. 무겁지 않으면서 경박하지도 않은, 이야기 맛이 갓 뜯은 상추처럼 고소히 살아있는 이 이야기를 쓴 이는 다름 아닌 장항준이다. 데뷔작인 <라이터를 켜라>에서 소시민의 삶을 정겹고 가슴 따뜻하게 연출했던 그가 이번엔 자신의 자신 있는 각본으로 신작을 내놓은 것이다.

<불어라 봄바람>도 장항준의 장기인 소시민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겨있다. 그래서 한바탕 웃다가, 어느 순간 눈물을 흘려야한다.

<불어라 봄바람>은 글쓰는 작가(특히 남성)들이 한번쯤은 다루고자 하는 세계를 담아낸다. 작가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팔아먹듯, 각본을 쓴 장항준 역시 아버지를 소재 삼는다. 또 창작적 고민을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작품을 만드는 형태를 취하고도 있다. 영화는 이렇듯 작가들이 더 큰 세계를 담기 전 거쳐가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욕심껏 재주를 부리고 있다.

첫째, 다방종업원의 스토리를 훔쳐 로맨스 소설을 쓰는 작가에 비친 창작적 고민에 대한 얘기. 자칫 잘못하면 삼류 얘기로 전락될 상투성을 가득 안은 이 착상을 장항준은 자신의 재능으로 유쾌하게 그려낸다.

영화에서 보이는 작가적 양심을 거스르는 행동이나 위선적 행동은 감독 자신의 체험이 반영될 것일 수도 있는데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도 볼 수 있는 이 비슷한 흔적(쉬운 예로 서점서 자기 책 좋은 위치에 꼽아두기 같은 장면)은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해본 이들에게는 특히 더 큰 반가움을 안겨다 주었을 것이다.

둘째, 자신의 아버지 팔아먹기. 대개 작가가 아버지를 자신의 작품에 팔아먹을 땐 애증의 대상으로서의 아버지로 그린다. <불어라 봄바람>도 예외는 아니다. 같은 날 개봉할 <오! 브라더스>도 다뤘듯이 계집질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은 아버지는 그러나 결국 미워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불어라 봄바람>은 이 애증의 아버지를 끌어안음으로써 부권이 상실되어 가는 현실 속의 아버지에 기운을 넣어준다.

영화는 이렇듯 두 작가적 고민을 적절히 안배해가며 캐릭터에 입체감을 불어넣고, 현실에선 이뤄지긴 힘든 로맨스를 향해 신나게 달려간다.

무엇보다 장항준의 재능이 영화를 즐겁게 한다. 그 중에서도 즉흥적으로 시를 지어 선물하는 장면이라든가 뚜렷한 기능이 없던 TV의 <동물의 왕국>이 자연스레 내러티브로 들어서는 장면은 이야기의 맛을 아는 작가의 천재성을 보는 듯 해 반갑다.

또 입막음을 위해 만화적으로 현장으로 달려가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형태의 기이한 긴박감, 나중에 커서 수술비 갚으라는 집요한 주장과 코딱지를 7년이나 모은 아이 이야기가 주는 상상력 주무르기는, 영화에 제대로 쓴 감독의 빛나는 재능이다. 여기에 산골부부의 부부싸움에서 보는 소시민 관찰은 영화를 가볍게 웃고 마는 코미디로 전락시키지 않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외에 만화적 연출기법은 무엇보다 영화가 신나게 달려나갈 수 있게 한다. 컷의 효율적인 분할과 합이라든가, 화면 빨리 돌리기, 시동 걸며 뛰어가며 점프하는 등의 익살스러운 만화적 상황 연출에 대해 장항준 감독은 자신 있었다는 듯이 선보인다. 또 적재적소에 음악을 잘 가져다 써 해당 장면을 더욱 살찌운 윤종신의 공도 지나칠 수 없다.

한편, 공신 김승우는 이제 장항준의 페르소나가 되어도 좋겠다. 넉넉하지 못한 마음을 가진 소시민 캐릭터를 그는 잘 소화해내고 있다. 또한 김정은은 광고에서 빛을 보는 그녀의 짧은 컷 내의 효과적인 연기와 <가문의 영광>에서도 보여준 리모컨 연기의 정점을 이번 영화에서 보여주었다. 김정은 아닌 다른 배우를 상상해볼 수 없는 순박하고 멍한 캐릭터 화정은 영화 속에서 '졸라', '짱' 그럴듯하게 살아있다.

그러나 이번 <불어라 봄바람>에서는 전작에서 부족함으로 보였던 연출상의 이음새 공사가 많이 나아지고 이야기가 풍성하지만 감독이 풀어 보이고자한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 보따리가 깔끔하게 풀어헤쳐 있지는 않다. 전체를 조감해보는 독수리의 눈이 감독에게 요구되어진다.

또 마지막에 일본관광객이 등장하여 사랑을 축복하고 맺어주는 부분은 이미 다른 영화들이 심하게 두들겨 맞은 어색한 상황연출이다. 클라이맥스를 만들고 제대로 하강곡선을 타고 내려와 세련되게 감정정리를 해주는 것에 대해서도 감독은 앞으로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사랑이 맺어지고 난 후 이어지는 노부부의 유채밭 춤추는 씬은 연결이 부자연스럽다. 앞서의 결정적 장면과 뒤에 이어지는 결정적 장면에 어색한 감이 있다.

그렇긴 해도 그 자체의 엔딩적 의미는 효과적이다. 그 장면은 <불어라 봄바람>이 인간적인 애정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한편 감독이 사적으로 부모에게 바치고 있는 선물임을 표하고 있다. 그 때문에 <불어라 봄바람>은 봄바람의 그 야릇한 기분 좋음처럼 더욱 입가가 벌어진다.
2003-08-30 08:31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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