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감독의 신작 소식을 기다리며

영화 <봄날은 간다>

말복이 얼마 남지 않는 여름날 오후 <봄날은 간다>를 인터넷으로 다시 보았다.

알려졌다시피 영화 <봄날은 간다>는 주인공 상우(유지태 분)와 은수(이영애 분)의 연애 이야기이다. 허진호 감독은 주인공들의 사랑과 그들 주변인에게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삶의 풍경들을 전작 <8월의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그려내었다.

▲ 영화 포스터
ⓒ 싸이더스
영화가 한창 상영되고 있을 무렵 은수에 대한 논쟁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혼녀인 그녀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연하의 상우를 이용한 것이다' 혹은 '은수가 상우와 헤어지자고 했던 것은 현실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 등등.

상우와 은수의 연애에 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번번이 은수에 대한 찬반으로 집중되었었다. 그녀가 소위 “나쁜 년”이냐, 아니냐는 것이었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가 있지만 <봄날은 간다>에서는 반대의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여자는 떠나고 남자는 기다린다고 한다. 잘해줄께, 다짐까지 한다. 그러나 여자는 매몰차게 헤어지자는 말을 되풀이할 뿐. 결국 떠나는 사람은 여자고 다시 돌아오려는 사람도 여자이다. 그런 측면에서 상우는 관객들의 연민을 자아냈었다.

유지태라는 배우의 특징인지는 몰라도 상우는 모성애를 자극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극중에서도 그는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것으로 나온다. 다시 영화를 보면서 은수와 상우는 연인관계보다는 모자관계의 분위기가 더 가깝지 않았나 싶었다.

물론 그 둘은 연인들이 쓰는 언어와 연인들이 하는 애정표현들을 한다. 겉보기엔 엄연히 연인관계이다. 그러나 남편이 아닌 자식에 의존하고 살아가는 어머니들처럼 은수의 시선에는 사랑하는 남자를 보는 시선이 아닌 사랑하는 자식을 보는 어머니의 눈길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은수가 왜 이혼을 했는지 결혼생활이 어떠했는지 영화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따라서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았는데. 이미 결혼을 해보았기 때문에 은수 자신에게 있어 사랑에 대한 환타지는 많이 약해졌다고 보였다. 그것은 경험해 본 일이었다. 그러나 결혼을 통해 여성들이 가지는 임신과 양육의 기대는 이혼으로 인해 충족되지 않았다. 그것에 대한 대리만족을 상우를 통해 느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 상우 역의 유지태
ⓒ 싸이더스
상우의 나이는 자신보다 아래였다. 그의 인상은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본 어른 같지 않았다. 키만 멀쑥하게 큰 천진난만한 소년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한 소년의 이미지 그것이 은수가 상우를 태연하게 한낱 라면으로 유혹하고 집에서 자고 가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심리적 경계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었을까?

아침에 눈을 뜬 그녀는 비로소 상우가 자신이 생각하는 소년이 아닌 남자임을 절감한 것이다. 그녀는 그의 키스에 잠시 고민하며 "좀 더 친해지면 해요"라고 상우의 접근을 막는다.

유심히 보면 상우가 은수의 집에서 처음 잔 그 날 상우는 침대에서 은수는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아들을 침대에서 재우고 자신은 바닥에서 자는 것은 어머니들 아니던가? 대개의 경우 여자가 침대에서 자고 남자가 바닥에서 자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이 친해지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상우의 직업이 소리를 녹음하는 녹음기사라는 것은 허진호 영화의 중요한 코드로 작용한다. 전작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사진을 찍더니 이번에는 소리를 녹음하였다. 사진을 찍거나 소리를 녹음한다는 행위자체가 잊혀지거나 사라진다는 것을 아쉬워함을 전제로 한다.

상우는 직업상 현재를 과거로 만들어 듣는 사람이다. 그리고 은수는 아나운서다. 그녀는 직업상 과거를 현재로 말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 둘의 직업은 둘의 사랑이 상징적으로 이뤄지기 힘들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은수가 “나쁜 년”이라던가 상우가 “한심한 놈”이라는 식의 해석은 표면적인 해석일 수 있다.

▲ 파도소리를 녹음하러 간 주인공들
ⓒ 싸이더스
즉 상우와 은수의 직업 이면에 놓여있는 상징성은 두 사람이 쉽게 화합하거나 봉합되기 힘든 성질을 내재하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보다 주인공 사이의 스킨십 장면이 많고 비극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연애에 대한 따뜻함보다는 연애에 대한 서늘함이 더 부각된 영화였다.

영화 중반에 정선 아라리를 부르는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가 나온다. 그 노랫말 중에 "서산의 해가 지고 싶어지나"라는 구절이 있었다. 사랑의 감정도 마찬가지. 은수의 차를 긁고 서울로 돌아오는 상우는 창 밖의 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영화에 나오는 단 한 장면의 노을이었다.

"우리 헤어져" 은수는 서울에서 강릉까지 한걸음에 내달려 온 상우를 보며 냉정하게 말한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들리는 뱃고동소리. 그 절묘함에 감탄했다. 항구를 출항하는 배의 고동소리처럼 은수가 상우를 떠나려는 마음이 현실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최고의 효과음이었다.

“버스와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란다”라고 말하는 상우 할머니의 말은 뜬금없기는 하지만 상우가 실연을 극복하는 가장 결정적인 말이 되었을 것이다. 지나간 사랑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치매에 걸린 상우 할머니의 마지막 뒷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추억을 가지고 그 안에서 죽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가족들의 마음이야 쓰디쓰겠지만.

▲ 아버지 역의 박인환씨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 싸이더스
전작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시민 가정을 중심으로 그 일상과 디테일을 세심하게 잡아내는 허진호 감독의 과장되지 않은 시선은 분명 한국영화가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영화들은 현실의 나를 소외시키지 않고 현실의 나와 영화의 인물들과 거리감 없는 소통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그와 같은 영화들은 관람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종종 위로의 손길을 건네 주기도 한다.

‘나의 남루한 일상의 풍경도 스크린 속에 저리 비치면 아름답거나 정겹거나 로맨틱하거나 서정적일 수 있구나’ 하는 일종의 동질감. 그것은 우리의 무의미하고 건조한 것 같은 일상에 따뜻한 숨결을 불어 넣어주고 의미를 부여해준다.

몇 번의 8월과 몇 번의 봄날이 지나야만 그의 새로운 영화를 볼 수 있을까? 영화를 보고 난 뒤 허진호 감독의 신작 소식이 더욱 간절해졌다.
2003-08-11 19:58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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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서울에서 태어나 아직 내가 누구인지 명확히 설명할 만한 언어를 찾지 못하고 계속 고민중이다. 무엇을 이루기 보다 무엇은 안하고 살면 안되나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종종 아프다. 돈보다는 명예를 명예보다는 행복을 찾고 싶다. 그 행복은 사람들과의 교감을 나눌 수 있을 때 가능 그 교감은 또한 문화적 감수성이 맞을때. 그 문화적 감수성을 위한 글들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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