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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래 설화에 우렁이 각시 이야기가 있다. 한 남자가 우렁이를 주워서 집에 갖고온 이후 들에서 귀가하면 어김없이 자신을 위한 저녁 식사가 정성스레 차려져 있음에 그는 무척 놀라게 된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자신에게 누가 이런 선행을 베푸는지 궁금하던 총각은 어느 날 일하러 가는 척 하다가 몰래 숨어 우렁이 각시의 존재를 발견한다. 결말은 우렁이 각시로 인해 남자는 사랑도 얻고 행복도 얻는다는 해피엔딩.
그런데 만약 우렁이 각시에게 빨래, 청소 또는 농삿일을 시키면서 노예처럼 부리고 남자의 성적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로 짓밟아 버린다면 이와 같은 해피엔딩이 가능할까?
선행을 오만과 이기심으로 짓누르는 인간의 만행을 규탄하는 영화가 최근에 개봉했으니, 바로 우렁이 각시의 새로운 버전으로 인지될 만한 <도그빌>이다.
 |  | | | ▲ 도그빌의 우렁이 각시가 되어버린 니콜키드먼, 그녀의 보은은 마을사람들을 자극한다. | | | ⓒ 코리아픽쳐스 | 영화 <도그빌>에는 니콜 키드만이라는 우렁이 각시가 출연한다. 너무나 아름답고 착하디 착한 우렁이 각시의 존재로 인해 수직적인 인간관계, 약자와 강자라는 권력의 부등호가 설정된다.
영화는 이런 권력에 취해 점점 검은속을 드러내는 마을 사람들과 그에 대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응징이 담겨 있다. 후반부 응징의 결말이 주는 임펙트는 178분이라는 기나긴 상영시간에 대한 보답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정도이니 강력한 화제작으로 <도그빌>을 손꼽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다.
미국의 한 마을에 우연히 한 이방인이 찾아 온다. 그레이스(니콜 키드먼)라는 이름의 그녀는 갱들의 추적을 피해 록키 산맥에 위치한 오지마을까지 들어온 위태로운 처지이다. 그 마을 이름이 바로 영화제목과도 같은 '도그빌'이다.
마을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의 존재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지만, 선하고 진실된 그레이스의 됨됨이에 감동을 받아 그녀를 피신시켜 준다.
여기에서부터 '그레이스의 보은'이 시작된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 모두의 우렁이 각시가 되어, 세상과 담 쌓아 은둔하는 삶을 사는 자를 위한 말동무가 되고, 화단을 정돈해주고, 수확의 기쁨을 예찬하며 과수원일을 도와주는 등 정신적 신체적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러한 그레이스의 보은은 폐쇄적인 마을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8가구가 사는 이 동네 사람들은 마치 하나의 음계처럼 각각의 음을 울리면서 그레이스 앞에서 자신만의 고유음을 내면서 그녀의 보은에 화답한다. 수년 동안 소리를 내지 못했던 교회 오르간의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이 이런 마을사람들의 열린 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레이스의 치명적인 약점인 도망자라는 사실과 "기껏 숨겨주는데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은 그레이스가 다 들어줘야 한다"는 계산법에 의해, 더 이상 그레이스는 신의 은총이 아니라 일 잘하는 '시다바리'로 전락하고 만다.
마을 사람들은 점차 단세포적인 욕구의 실체을 드러낸다. 아름다운 그레이스의 육체를 탐하고, 그레이스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며, 코너에 몰린 쥐를 갖고 노는 것처럼 아이들도 그레이스를 기만한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처럼 오만하고 이기적인 인간사의 모습을 충격적인 결말의 반전으로 응징한 후 관객들에게 묻고 있다. "당신이 그레이스라면 도그빌 같은 마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도그빌 사람들과 그레이스의 만남과 유대관계 그리고 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다양한 공식을 대입할 수 있다. 미국과 이라크, 남한과 북한, 백인과 흑인, 그리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와의 관계 등 국가, 인종, 종교와 같은 경계선을 통해 권력을 지닌 자와 그렇지 못한 자와의 그림이 한눈에 그려진다.
'도그빌' 항에 대입되는 집단은 겉으로는 서로를 사랑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가족이기주의와 결벽증, 욕구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응고된 암조직을 메스로 떼어내듯이 오만과 기만으로 똘똘 뭉친 도그빌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감독은 그레이스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사진과 데이빗 보위의 <영 어메리카>라는 배경음악을 두고 도그빌은 바로 미국의 초상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반미 성향이 짙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고 이 작품이 미국(USA) 3부작 중 첫 번째(U)에 속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이런 추리는 가능하다.
물론 이런 시각도 충분히 설득적이지만, 영화 <도그빌>을 단순히 미국이라는 곳에 설정한다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의 일부분만 흡수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굳이 미국이라는 키워드에만 국한시켜 영화를 좁은 시야로 보지 않고 <도그빌>을 통해 인간에게 내재한 이중성과 오만함 그리고 자비로움에 대한 고찰을 한다면 이 영화는 멋진 심리분석 텍스트가 되지 않을까?
이 영화는 다층적인 인간심리의 치밀한 표현을 위해서 독특한 양식을 활용한다. 연극적인 토양 위에 영화적인 씨앗을 뿌린 것이다. 아이들의 땅따먹기 놀이처럼 도그빌이라는 마을은 1차원적인 선에 의해 구분이 되고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한 책상이나 침대 그리고 벤치로 3차원의 공간을 창조한다.
그리고 아주 연극적인 조명과 영화적인 사운드는 심리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데 한몫을 담당한다. 가령 아무 것도 없는 개집에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는 마치 입에 거품을 문 개가 튀어 나올 듯한 긴장감을 조성하고, 하루동안 태양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계절의 변화까지도 시각화한 조명은 도그빌이라는 마을의 존재감을 현실화시킨다.
이러한 시각디자인뿐만 아니라 영화 <도그빌>은 영화적인 문법을 완전히 배제한 채 관객과의 거리두기로써 감정의 이입을 차단한다. 가령 카메라의 시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서 화면과 관객 사이의 거리감을 부각시키는 것이 그런 예이다.
"당신은 지금 카메라를 통해 보여지는 가짜를 보고 있는 것이다"는 것을 계속 주지시켜준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장면들은 모두 가짜지만 지구촌 그 어딘가에서 현재 진행중인 현실이라는 것을 말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런 거리두기 장치 속에 한 가지 요소만은 영화적인 접근법을 사용한다. 바로 배우들의 연기이다. 니콜 키드먼, 폴 베타니, 필립 베이커 홀, 제임스 칸, 그리고 로렌 바콜까지 <도그빌>에 나오는 연기자들은 이미 스크린에서 선굵은 연기를 통해 영화적 연기의 달인으로 인정을 받은 배우들이다.
보잘 것 없는 세트와 비영화적인 환경 속에서, 정작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열고 집중할 것은 배우들의 연기라는 것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말하고 싶어한 것이다.
배우들의 살아 있는 호흡에서 나오는 발성과 표정, 그리고 몸으로 연결되는 움직임만으로도 충분히 영화제작은 가능하다는 것을 <도그빌>은 증명한다. 굳이 미국의 한 오지마을로 로케이션을 가지 않더라도, 그럴싸한 탄광촌 세트가 지어지지 않더라도 영화는 할 말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그빌>을 보면서 이런 외적인 설정에 아쉬움을 내비치는 관객은 없는 것 같다.
결국 도그빌엔 아무도 살지 않게 된다. 다만 개만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도그빌엔 정말 마을이름처럼 사람이 전혀 살지 않고 오직 개만 살게 된 개마을이 되어버린 셈인데, 감독은 이렇게 인간 사회를 비꼬며 타이른다. 정작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어쩌면 <도그빌>처럼 아무도 구원받지 못해 개만 남는 곳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스틸사진들은 미국 공황기 때 찍힌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의 초상이다. 178분의 길고 긴 영화와는 전혀 다른 질감의 엔딩 크레딧을 라스 폰 트리에가 설정한 것은 그만큼 감독이 화룡점정의 심정으로 고심하면서 마련한 장치가 아닐까 싶다.
정말 미국을 비난하고 자본주의의 실체를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도 엿보이지만, 이 사진 속에 우리의 무관심과 오만으로 버려진 그레이스가 숨겨져 있지 않나 관객들에게 묻고자 하는 감독의 '히든 카드'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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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8-11 10:48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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