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에 대하여

영화<8월의 크리스마스>

▲ 영화 포스터
ⓒ 우노필름
내무반에 비디오를 들여놓게 되었다. 병장 말년에 호강을 하게 된 셈이었다. 군인들의 취향은 단순했다. 여배우의 의상비가 적게 드는 영화일수록 환영받았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은 항상 허무했다. 순간적인 욕구를 대리 만족할 수 있지만 그것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감동적인 영화를 보자는 내무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여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를 구해왔다. 빨간 테가 붙어있지 않은 비디오였다. 내무반에 비디오를 설치한 후 처음이었다.

그렇게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았다. 그 날 밤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함께 본 내무반원 모두 그랬다. 그 흔한 키스 신 한번 나오지 않았지만 누구도 이 영화를 지루하거나 재미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비 오는 날 스쿠터를 고치던 정원이 다림의 우산을 쓰고 걸어가던 장면에서 정원의 앞으로 살짝 몸을 기대는 다림의 모습이나 정원의 무서운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던 다림의 모습은 보는 우리들이 마치 정원이 된 양 설레게 만들었다. 한동안 심은하의 사진이 내무반에서 유행했다.

8월의 첫날 <8월의 크리스마스>를 인터넷으로 다시 보았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것을 포함해서 세 번째였다. 영화를 보면서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인물들의 움직임이나 기억 속에 지워졌던 장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다림과 정원
ⓒ 우노필름
예컨대 정원과 다림은 서로의 손을 한번도 잡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정원과 다림은 손을 잡았다. 다림이 친구를 핑계로 놀이동산에 정원을 데리고 갔을 때, 청룡열차를 타는 장면에서 다림은 정원의 손을 꼭 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두 번째 볼 때까지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다시 보면서 새롭게 다가왔던 부분은 바로 주인공 정원 아버지(신구 분)의 마음이었다. 정원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잠자리에서 숨죽여 울 때 정원을 바라보던 시선은 바로 아버지의 시선이었음을 이번에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신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창 밖을 보며 한숨을 쉰다.

또한 정원이 아버지에게 비디오 작동법을 가르치는 장면이 있었다. 그동안의 기억에는 작동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나서 문을 박차고 나가는 정원만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작성법을 적어놓는 아들의 마음만 기억하고 있었다.

▲ 정원은 아버지에게 비디오 작동법을 설명해준다.
ⓒ 우노필름
그러나 이번에 볼 때, 정원이 문을 박차고 나간 이후 계속 리모콘을 움직이는 아버지의 모습이 더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죽기 전의 아들이 가르쳐주는 간단한 작동법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망연한 마음이 그 몇 초의 순간 찡하게 다가왔다.

정원이 응급차에 실려나가는 장면에서, 대문 밖 담벼락에 손을 짚고 기대어 있는 아버지의 몸은 떨고 있었다. 예전에 볼 때는 그러한 미세한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슬픔보다는 주인공 정원과 다림에게 집중한 탓이었다.

그전까지는 다림의 마음만 아플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아했던 사람이 죽은 줄도 모르고 자신의 사진이 걸려 있는 사진관을 보며 웃음 짓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밀려왔었다. 다림이 정원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심정적 아픔이 미리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감독은 자식을 먼저 보내야하는 아버지의 그 깊은 슬픔에 대해서도 적잖은 비중을 두었던 것이었다. 사실 영화 속에서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다림이 아니라 정원의 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는 젊었을 때 부인을 여의고 늙어서는 장가도 못 보낸 젊은 아들을 잃는다.

다림의 정원에 대한 기억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어도 아버지의 마음은 고통으로 지속될 것이다. 사랑은 또다시 찾을 수 있지만 죽은 자식은 결코 되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림의 아픔은 관객들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겠지만 아버지의 자식 잃은 슬픔은 다림의 그림자에 가려져 볼 수가 없었다. 세 번째로 보는 지금에서야 아버지의 슬픔이 다림의 아픔보다 더욱 묵중하게 다가왔다. 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 정원과 그의 아버지
ⓒ 우노필름
젊은 연인들은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이 있다고 쉽게 말하기도 한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포기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영화나 소설 속의 이야기. 현실에서 그런 경우는 말만큼 많지 않다. 현실에서 체험할 수 있는 말은 부모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자식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어두고 평생을 아파한다고 하지 않던가

초원 사진관에 걸려있는 다림의 사진은 어떻게 보면 정원이 내다 건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걸어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전에는 해보지 못했던 생각이었다. 감독은 이런 다른 여지를 위해 사진이 걸린 구체적인 경위를 보여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여백이 살아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8월의 크리스마스> 그 여백의 공간이 그저 정원과 다림과의 사랑과 아픔을 위한 것 인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본 이 영화에서 여백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그 말없는 슬픔이었다. 전에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새삼 내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어느덧 정원이 말한 이십대 후반이 되어 있었다.
2003-08-02 14:23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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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서울에서 태어나 아직 내가 누구인지 명확히 설명할 만한 언어를 찾지 못하고 계속 고민중이다. 무엇을 이루기 보다 무엇은 안하고 살면 안되나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종종 아프다. 돈보다는 명예를 명예보다는 행복을 찾고 싶다. 그 행복은 사람들과의 교감을 나눌 수 있을 때 가능 그 교감은 또한 문화적 감수성이 맞을때. 그 문화적 감수성을 위한 글들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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