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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th C Fox |
경제 용어중에 '포트폴리오(portfolio)'라는 것이 있다. 분산투자를 통해 위험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일컫는데, 이는 주식투자 뿐 아니라 문화산업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댄스 그룹은 흔히 다양한 캐릭터를 지닌 여러 명의 가수들로 채워지며, 텔레비전 시트콤 역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개성을 지닌 여러 주연급 배우들이 등장한다.
비록 다양한 기호와 문화적 배경을 지닌 소비자들이지만, 그렇게 다양한 캐릭터 중에 '한 명이라도 안 좋아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문화생산자들의 산술인 것이다.
소비자가 그룹 중에 한 명이라도 마음에 들면 음반을 살 것이고, 등장인물들 가운데 하나라도 호감을 느끼면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가거나 극장의 매표소에 줄을 설 것이라는 기대에 기초한 일종의 '저인망' 전략인 셈이다.
영화 <젠틀맨 리그> (원제: The League of Extraordinary Gentlemen) 역시 이 '등장인물의 경제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같은 이름의 만화를 기초로 한 이 영화는 모두 일곱 명의 개성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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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의 원작이 된 만화책의 표지 |
| ⓒ A.B.Comics |
드라큘라의 연인 미나 하커(Mina Harker), "해저 이만리"의 니모 선장(Captain Nemo), "투명인간"인 로드니 스키너(Rodney Skinner),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에 등장하는 늙지 않는 주인공 도리안 그레이(Dorian Gray), 마크 트웨인의 모험소년 탐 소여(Tom Sawyer),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제킬 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그리고 이들을 이끄는 탐험가 앨런 쿼터메인(Allan Quatermain).
참으로 야심만만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이론적으로는 이처럼 다양한 개성의 캐릭터 가운데 관객이 한 명도 안 좋아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경제이론이 늘 그렇듯, 이론과 현실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젠틀맨 리그>는 이 불일치를 설명하는 데 더 없이 좋은 사례를 제공해 준다.
영화는 꽤 흥미로운 전제에서 시작한다. 1899년, 영국여왕의 밀사가 케냐의 한 술집에 찾아온다. 전설적인 모험가인 앨런 쿼터메인(숀 코너리 Sean Connery 분)의 도움을 청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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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th C Fox |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들은 탱크를 이용해서 영국의 은행을 털고, 독일에서는 대량파괴를 일으킴으로써 양국의 불화를 조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탈리아의 베니스에서 열릴 유럽 정상회담에서 각국의 지도자를 살해함으로써 세계를 전쟁의 화염 속에 빠뜨릴 음모를 꾀하고 있다.
쿼터메인은 "제국이 나를 필요로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내가 제국을 원하는가다"라고 말하며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나 자객이 등장해 밀사를 포함한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살해하자 마음을 바꾼다.
쿼터메인은 런던으로 돌아가, 영국 정부의 특사인 "앰(M)" – 007에 등장하는 인물까지 가세하는 걸 보면, 일곱 명의 등장인물로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 의 주선하에 "비범한 사람들의 모임(the league of extraordinary gentlemen)"을 구성한다. 물론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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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th C Fox |
그리고는 등장인물이 한 명 한 명 등장하면서 그들에 대한 소개가 시작된다. 밤이면 흡혈귀로 변하는 여자, 옷을 벗으면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투명인간, 자신의 초상화를 보지 않는 한 어떤 공격에도 목숨을 잃지 않는 사내, 그리고 자아를 제어하지 못하면 야수로 변해버리는 제킬 박사. 그리고 그들에게 신예 잠수함과 자동차 등의 탈것을 제공하는 니모 선장.
마땅히 이 영화의 핵심은 이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서로의 능력을 보완하면서 싸우느냐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어떤 '조화'나 '협력'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황급히 뛰어다니고 정신없이 싸울 뿐이다. 때로는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도 모를 정도로 산만하고 공허한 액션이 화면을 채운다.
오스카 와일드에서 마크 트웨인에 이르는 작가들의 주인공을 마음대로 각색하는 것도 좋고 시대와 역사를 무시하는 것도 좋지만, 영화는 기본적으로 '그럴듯함'이라는 기본적인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이는 공상과학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관객은 스파이더맨이 줄을 타고 날아다니는 것은 용인할 수 있지만, 그가 눈에서 레이저를 뿜는 것까지 참아내지는 못한다. 우리는 터미네이터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을 지 모르나, 그가 한 팔을 앞으로 뻗은 채 창공을 날아다니는 것까지 이해해주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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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th C Fox |
물론 방법은 있다. 성룡의 영화나 <미녀삼총사>처럼 진지함을 포기하고 전략적 가벼움을 채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평화를 지키겠다고 무게를 잡던 주인공들의 잠수함 노틸러스호가 베니스의 좁은 운하에 떠오르고, 그들을 태운 차가 존재하지도 않는 베니스의 '차도'를 달려갈 때, 객석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던 헛웃음뿐이다.
<젠틀맨 리그>는 이야기가 결여된 '볼거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숀 코너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빛을 발하지만, 영화 고르는 안목마저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한국에서 이 영화를 수입하면서 "비범한(extraordinary)"이라는 수식어를 떼어낸 것은 잘 한 일로 보인다. 그들은 "젠틀"하기만 할 뿐, 어디에도 "비범"한 부분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