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지 못할 꽃이 될까 두려웠다"

희귀병 걸린 박승일 전 모비스 코치의 무너진 꿈, 그리고 희망

"미안하다 선화야...
왜 날 만나가지고...
미안하다...
미안해...
죽는다는 거. 살아 있다는 거.
아…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시련의 아픔을 주신걸까?
하필 내가...
왜 나냔 말야...

아니 왜 이런 병이 세상에 있나
아니 병이 있으면 치료방법도 있을 거야. 그렇지?
바보같다.
모르겠다.
시팔….
아, 내가 나약해지면 안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자꾸 눈물이 흐른다..."

-박승일 코치가 루게릭 병 진단 뒤 쓴 일기 중에서

프로농구 울산 모비스 박승일(31) 전 코치는 3개월 전 루게릭 병이라는 희귀 불치병 진단을 받았다. 자신의 꿈을 막 펴보려고 할 때 갑작스레 다가온 병마는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난 평생 농구만 하고 싶었다"

 연세대 시절의 박승일 코치. 박 코치 주위로 문경은(위), 우지원(왼쪽 밑), 이상민(오른쪽) 선수가 보인다
ⓒ sp21 이혜준
박승일 코치는 유명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센터(키 2m)로 연세대와 기아자동차(현 울산 모비스)를 거치면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다.

연세대 시절 동기인 문경은 선수와 이상민, 우지원 등 스타 선수의 그늘에 가렸고 기아에서도 한기범, 김유택, 허재, 강동희 등 쟁쟁한 선수들의 경기장면을 지켜볼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그는 은퇴 뒤 최고 지도자의 꿈을 꾸며 미국으로 농구 유학을 떠났다.

한창 유학생활에 재미를 붙이던 올 초, 울산 모비스에서 코치직 제의가 왔다. 꿈이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난 최 감독님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기쁨 그 자체였다." -박승일 코치의 일기 중에서

모비스는 박 코치의 연세대 은사였던 최희암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팀을 정비중이었다. 박 코치는 귀국하기 전인 지난 4월 용병 `트라이아웃`과 관련 본격적으로 코치 활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4월 21일, 2년 4개월간의 유학생활을 뒤로 한 채 그가 그토록 바라던 꿈을 이루고자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그는 부푼 희망을 안고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준비했다.

어이없게 무너진 꿈

한국에 돌아온 박 코치는 유학중 가끔 통증을 느꼈던 왼팔과 관련 건강진단을 받았다. 미국에 있을 때 학생 신분으로는 비용이 많이 들어 정밀 검사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또 여러 지인들에게 증상을 말했지만 `피곤하면 그럴 수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던 터라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5월 초 현대 아산 중앙병원에서 희귀 불치병인 루게릭 병 진단을 받았다.

"믿어지지 않아 서울대병원에 갔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어요. 큰 충격이었죠."

이제 막 새로운 출발을 하려던 그에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코치직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이 사실을 구단 측에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나타나는 루게릭 병 증상들을 보며 그는 더 이상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이를 구단 측에 알리자 그들은 박승일 코치에게 그만 둘 것을 요구했다.

하루가 다르게 나타나는 증세들

ⓒ sp21 이혜준
루게릭 병은 척수의 운동신경 세포가 죽어가면서 사지의 마비가 오고 죽음에까지 이르는 병이다. 박 코치가 루게릭 병의 증상을 구체적으로 느꼈던 건 모비스 코치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지내던 박 코치는 부인 전선화(27)씨의 운전으로 백화점에 갔다. 좁은 공간에 주차를 해야하는 상황, 박 코치는 직접 운전을 하기 위해 선화씨와 자리를 바꿨다.

"뒤에 기다리던 차도 있고 해서 빨리 운전대를 잡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오른손은 올라갔는데 왼손은 무릎 위에 그대로 있었어요."

왼손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전까지 지내는데 큰 문제가 없었던 박 코치는 처음으로 자신의 몸에 불편함을 느끼게 됐다. 이는 박 코치가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운동을 가르치는 코치가 운동을 할 수 없게 된 상황이 된 것이다.

최근 박승일 코치는 약간 마른 얼굴이긴 했지만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그 스스로도 가끔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전에는 쉽게 했던 일상생활들이 지금의 그에겐 너무 힘겹기만 하다.

현재 그는 왼손을 옆으로 45°정도 올리기도 힘든 상황이다. 왼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대부분 오른손만을 이용해야 한다. 목욕을 할 때 비누칠 하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또 옷 단추를 끼우는 것도 이젠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힐 만큼 그에겐 버겁다.

박 코치는 조금이라도 마비 증세를 늦추기 위해 매일 아침 온 몸 스트레칭을 한다.

"무리해서 운동을 해서는 안되지만 이렇게 스트레칭을 하면서 근육 마비 속도를 늦출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왼팔은 무용지물이에요. 오른손을 집중적으로 운동하고 있지만 이마저 많이 약해졌죠."

그리고 이미 같은 루게릭 병으로 투병중인 사람들로부터 마사지가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곧 이것도 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가장 힘든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

ⓒ sp21 이혜준
루게릭 병에 걸린 뒤 가장 힘든 점은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도와주지 못하고 기쁘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전엔 언제나 설거지도 해주고 집안 일도 함께 하곤 했어요" 라는 박승일 코치. 이런 박 코치를 보며 선화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이는 지나치게 긍정적이에요. 너무 긍정적으로 꿰어 맞추려고까지 하죠. 자신보다는 남을 도와주는 걸 즐긴다고 할까요. 오히려 이런 점이 스트레스가 돼 병이 생긴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죠."

그리고 이젠 지금까지 늘 도움을 주기만 했던 그를 위해 자신이 도와 줄 때인 것 같다고 밝혔다.

"그전엔 모든 부탁은 들어주고 선화가 기분 나쁜 일 있으면 다 챙겨주려고 노력했는데 요즘은 내 몸이 힘드니까 다 받아주지 못해요. 이 점이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어요. 아마 앞으로 (병세가) 더 악화될지도 모르는데 이 점이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나에겐 소중한 가족들이 있다"

기자는 박승일 코치를 세 번 만났다. 그 때마다 늘 부인 전선화씨가 옆에 있었다. 선화씨는 요즘 박승일 코치와 늘 함께 있으면서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주고 있다. 조금씩 현실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요즘 들어 가끔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자신이 아프면서도 언제나 남을 생각해요. 루게릭 병이라는 희귀병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걸 보면 존경하는 마음이 들어요."

선화씨는 그 전에는 가끔 짜증도 내고 이른바 '어리광`도 많이 부렸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의 남다른 투병생활을 함께 하며 그들은 서로에게 더욱 소중하고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 갔다.

박 코치에게 힘을 주는 또 다른 사람들은 역시 가족. 지난 7월 오랜만에 가족 모두 강릉으로 여행을 갔다고 한다. 다함께 해돋이를 보며 박승일 코치를 위해 기도하려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새벽녘에 일어났는데 몸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좀 더 쉬고 있었는데 가족들이 모두 나갔어요. 어린 조카들까지 말이죠. 안되겠다 싶어 나갔더니 일출을 보며 모두들 두 손 모으고 기도하고 있던 것이었어요. 그 때 가슴이 찡 했죠."

혼자 감당하기엔 현실이 버겁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에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한다.

"기쁠 시간도 모자란 데 슬퍼할 시간 없어요"

ⓒ sp21 이혜준

"매일 매일 울어요. 어제도 울었고, 그제도 울었어요. 울고 싶지 않지만 감정이 북받쳐 올라요. 이 병의 안좋은 점은 표정관리가 안된다는 것이죠. 감정을 숨기기 어렵다네요."

병원으로부터 루게릭 병이라는 진단통보를 받은 날부터 그와 선화 씨는 울보가 됐다. 아직 너무 젊은 그들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큰 시련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일 매일 울면서도 다시 일어서고 그 고통을 이겨나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물러나지 않고 보람있는 삶을 찾기 위해서다.

요즘 그는 자신처럼 희귀한 병에 걸린 사람들을 돕기 위해 열심이다. 아직은 발병원인과 치료방법조차 모르는 희귀병이지만, 언젠가는 꼭 치료약이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

주어진 시간이 짧을 수도 있기에 하루하루를 더욱 열심히 살아간다는 박승일 코치. 그는 농구 지도자로서의 삶은 접어야 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 원인도 모르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한 코치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연히 두렵죠. 하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뛰어다닐 겁니다. 언젠가 `기쁘게만 지내도 인생이 짧은데 우리한테는 슬프게 지내거나 힘들게 지낼 시간이 없다`는 말을 TV에서 들었어요. 즐겁게 제가 할 일을 하다보면 분명히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루게릭 병 진단을 받은 며칠 뒤 박승일 코치가 쓴 일기 전문

ⓒ sp21 이혜준
"무엇인가...
나에게...
무너져 버린다.
아냐, 사실이 아닐 거야...
선화...
부모님...
처갓댁...
아...

미안하다 선화야...
왜 날 만나가지고...
미안하다...
미안해...
죽는다는 거. 살아 있다는 거,
아…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시련의 아픔을 주신걸까?
하필 내가..
왜 나냔 말야...
아니 왜 이런 병이 세상에 있나
아니 병이 있으면 치료방법도 있을 거야. 그렇지?
바보같다.
모르겠다.
시팔…
아 내가 나약해지면 안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자꾸 눈물이 흐른다...
내가 이렇게 많은 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요즘 알았다.
어떻게 하지? 최 감독에게 알려야 하나? 아님 숨길까?
회사에선 도와줄까? 아님 냉정히
아 괴롭다.
아………………………………..
어떻게 하지? 뭘 내가 어떻게 하지?
두렵다...
고통스럽다.
이제 시작이라 생각했는데..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나 금방 시작했는데 복잡하다.
밝은 미래만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두운 그림자가 제 곁에 있어요.
살고 싶어요. 정상인처럼.
다시 피지 못하는 꽃이 될까봐 두렵다.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가 떠나서 조용히 사라지고 싶지만….
불쌍한 엄마, 아빠, 선화 어떻게 두고 떠날까요. 내가 무슨 죄를 이렇게 많이 지어서 이 끔찍한 일이 나에게 벌어지는 걸까. 아이도 못 가지고, 근육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 가야 하다니,

루게릭…
며칠 전 서울대 병원에서 최종 진단이 나왔다. 루게릭이라고….
진찰실에 나는 선화와 함께 루게릭이라는 진단을 받고 병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병문 한구석 우리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울음…
복받히는 설움이 섞인 울음은 끝날 줄 몰랐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부모님도 큰누나도 함께 왔기 때문에 애써 참아 보려 했지만 캄캄한 내 앞에 나는 어찌 할 줄 모르고 우리는 부둥켜 앉아 흐느낌에, 아니 소리 내지 못하고 그냥 흐느껴 울고 있었다.

잠시 후 우린 아무 일 없다는 듯 부모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또다시 울음이 나왔다. 조카아이 어리둥절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 보기만하고 부모님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믿기지 않는 현실에 아무 말씀하지 않으셨다. 아니 못하셨던 것 같다.

`아냐! 이건 뭔가 오차가 있을 거야`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
얼마 전 아버지가 `계약했냐?` 라고 물으셨다. `네, 2년 계약에 연봉 3천6백이에요`라고 말씀 드리는 난 돈보다 해냈다는 자신에 차 있었다. (중략) 난 최 감독님에게 인정은 받았다는 것만으로 기쁨 그 자체였다.

그러나 오늘 아버지의 모습은 더 이상 희망에 찬 표정도 아니었고, 우리 아들 이제 성공했구나 하며 대견스러워 하는 그런 모습은 간데 없고,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 말씀 없으셨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라는 말만 목구멍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우리는 그래도 혹시 하는 기분이다. 설마… 내가…
아닐 거야…
아냐 아닐 거야...
그래 어딘가 잘 못된 거야...
내가 왜? 난 아닐 거야 그 진단 잘못된 걸 꺼야...
내가 어떻게 노력하며 이 날을 기다려 왔는데...
선화의 그 환한 모습.. `오빠 우리 이제 행복한 날만 있을 거야`라고 하는 모습이 자꾸 내 기억속에 되새겨 진다..
미안하기만 하다.
…………."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스포츠피플21(www.sportspeople21.com)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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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동안 한국과 미국서 기자생활을 한 뒤 지금은 제주에서 새 삶을 펼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아닌 밝음이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실천하고 나누기 위해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