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기만 할 뿐, 내용이 없다고요?

뭔가 있는 영화, 배틀로얄

아주 어렸던 시절, 나이 차이가 있는 사촌 오빠와 언니 사이에 끼어서 보았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파리대왕>이죠. 그 나이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일지도 몰랐지만, 그 당시엔 별 생각 없이 봤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느 누군가가 <파리대왕>에 대해서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이야길했던가요.

만약, 그 누군가의 말이 맞는다면, <배틀로얄>은 기본적으로 그러한 <파리대왕>의 구조와 근접해 있습니다. 이유는 어떤 것이든 간에, 어린 아이들이 무인도에 갇히게 되고, '생존본능'을 위해서 어제까지 함께 하던 친구들끼리 싸우고 또 싸우는 이야기. 기본적인 설정과 배경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두 내용이 풀어내는 것은 또 다른 방식입니다. <파리대왕>이 '이성적'인 팀과 '본능적'인 팀이 나뉘어져 싸웠다면, <배틀로얄>은 지극히 개인적입니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거기엔 <파리대왕>처럼 관객이 생각하는 선한 존재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 슈야와 노리코, 카와다는 어떤 의미에서 선한 존재일지도 모르지요(그들도 결국 피를 손에 묻힌다는 점에서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작품을 비교한다면, 아마도 그러한 설정과 내용의 근접함 때문일 것입니다. 많은 언론들이 그런 것을 주목했기도 했지요.

<배틀로얄>에 대한 내용은 익히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잔인하다는 것도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런 잔인함에 제대로 눈도 못 뜨고 본 장면도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배틀로얄>은 지나칠 정도로 잔인합니다. 그리고 잔혹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떤 분은 "남 죽이고 싶은 사람이 대리만족할 수 있는 영화"라며 '최악의 영화'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을 잔인하기만 할 뿐, 볼 만한 내용 없는 영화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요? 저는 그 질문에 대해서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끝까지 무차별하게 사람을 죽여 나갑니다.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이 하나, 하나... 그들의 죽음 뒷면에는 항상 그들의 과거를 연결합니다. 짤막한 에피소드지만, 갑작스러운 그들의 죽음을 그저 지나치지 않게 만드는, 그래서 그 에피소드는 영화가 건조하게 남지 않을 수 있는 훌륭한 장치가 되는 듯합니다.

주연급의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그런 에피소드는 잠시라도 언급이 됩니다. 그것이 흐름을 끊는다고 평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개개인에게 나름대로의 소중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그 말도 안 되는 '배틀로얄'이라는 법이 짓밟아버린 평화로운 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때로는 그런 에피소드가 도끼나 칼, 낫보다도 훨씬 이 영화를 잔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아마도, 영화 뒷 편에 끼어들어간 세 곡의 Requiem은 그렇게 무자비하게 죽어간 - 비록 영화 속 가상의 이야기일지 몰라도 - 41명의 아이들을 위한 감독의 자상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흐르면서 영화의 재미가 반감될 것을 우려한 듯하지만 - 이런저런 이유로 무음 처리된 대화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거기엔 분명히 감독의 희망적인 생각들이 담겨 있고, 감독이 단순히 죽고 죽이는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에겐 희망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앞에서 그렇게 죽여버린 다음에서야 "희망이 남아 있다!"라는 식의 교과서적인 결말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결말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슈야의 마지막 대사는, 많은 절망을 안고 사는 제 또래의 사람들에게 단지 운명으로부터 도망하기보다는, 절망을 앞질러서 뛰어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배틀로얄>은 엄청나게 사람이 죽는 잔인한 영화지만, 영화의 장르가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드라마로 생각되는 것이고, 단순히 죽이는 것에만 치중하지 않고 삶의 소중함이나, 희망에 대해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볼 만한 내용이 '있는' 영화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어떤 영화가 되고, 또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우리 관객들의 몫이겠지요. 그렇지만, "살인을 조장한다", "폭력을 조장한다", "죽이기만 할 뿐 내용은 없다"는 식의 비난은 어쩐지 이 <배틀로얄>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칼과 도끼나 낫이 난무해 섬뜩하기는 하더라도, 최신 무기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여나가는, 그야말로 '내용 무(無)'의 할리우드식 액션 영화에 비하면, <배틀로얄>은 그래도 좀 나은 선상에 서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서 말이지요.
2002-04-17 00:44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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