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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세미나는 밤 12시까지 진행합니다. 세미나에 참여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퇴장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세미나를 밤 12시까지? 21일 오후 2시 30분 국기원 본관(경기장)의 분위기는 확실히 이상했다. 경기장에 앉아 있는 백여명의 태권도 관장들과 관중석에 있는 사백명 정도 되는 사람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미나 진행자로 보이는 사람의 단호한 목소리가 다시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만약 세미나를 방해하면 즉시 공권력이 투입될 것입니다."
공권력까지? 관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공권력도 두렵지 않은 모양이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태권도 관장, 교수가 주축이 된 '범태권도 바로 세우기 운동 연합(이하 '범태협')'소속 회원들과 태권도 바로 세우기 운동연합 소속 대학생들이다.
범태협이 주최하는 '태권도계의 문제점에 대한 보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보고대회는 3시부터 시작될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2시까지 그리고 공권력"을 감안하면, 두 행사가 우연하게 겹친 것은 아닌 듯.
세미나 진행자 강아무개 씨는 범태협측에서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자 설득을 포기한 듯했다. 아까부터 경기장 한쪽에서 '(주)태권사랑'이라고 쓰여진 도복을 입고 몸을 풀던 젊은이들에게 "시범을 시작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냉랭한 긴장감만이 가득한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시범은 왠지 어색했다. 발차기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서로 마주보고 '이게 뭔 일이래'라는 듯, 웃음을 교환하기도 했다.
시범이 진행되는 동안, 관중석에는 양복 차림의 건장한 젊은이 몇 명이 나타났다. 가슴에 '서울시 회원'이라고 적힌 노란 리본을 달고 있던 그들은 들고 있던 캠코더로 관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일부에서 "무엇을 찍는 거냐, 왜 찍는 거냐"라는 질문이 나왔지만, 그들은 굳은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중에 이들은 경기장 바깥에 주차돼 있던 차량들의 번호판까지도 촬영했다.
'검찰은 태권도 비리의 원흉 임윤택, 송봉섭을 즉각 구속하라'
'태권도를 망친 김운용, 엄윤규, 임윤택, 송봉섭을 처단하라'
3시 20분. 캠코더 일행이 왜 그렇게 증거 수집에 바빴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학생들이 경기장 곳곳에 현수막을 걸기 시작했다. 때를 맞춰 범태협 소속 회원들도 경기장으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동시에 "이거 뭐하는 거야!"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세미나 참석자중 한 명이 더 이상은 못 봐주겠다는 듯이 윗도리를 벗고 와이셔츠 바람으로 달려 나왔다. 범태협 소속 회원 한 명이 막아섰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일촉즉발(?)의 상황. 곳곳에서 삿대질이 오갔고, 경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그 사이 대학생들이 내려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인솔자로 보이는 학생은 "신발 벗어! 모자 벗어!"라고 외쳤고, 경기장 한 쪽은 범태협과 학생들이 벗어 놓은 신발로 가득 찼다. 경희대생 한 명은 "도장에서는 원래 신발을 벗어야 한다. 모두 저쪽에 앉아 있는 선배들이 가르쳐 준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나, 세미나에 참석하러 온 사람들은 모두 신발을 신고 있었다.
어느 정도 장내가 정리되자, 경기장은 정확히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들. 신발을 신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양쪽은 '세미나는 5시까지, 보고대회는 그 다음에'하기로 합의했다. 왜 아까는 밤 12시까지 세미나를 한다고 그랬을까.
정작 세미나가 시작되자, 사회자는 범태협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힘없는 선량한 학생들을 출석 부른다고 위협해서 나오게 한 사람이 문제입니다."
"일요일에 무슨 출석을 불러?", 학생들 중 누군가가 응수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어 "일요일에 무슨 세미나냐?", "말도 안 되는 세미나 집어쳐라", "김운용은 물러가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쯤 되면 '세미나를 위해 모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범태협 관계자는 '(가칭) 일선 관장 언론 보도 및 장외집회로 인한 피해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명의로 작성된 공문을 보여줬다. 공문의 제목은 '결의대회 개최 통보'. 공문에는 "교수와 학생들을 부추겨 태권도를 파행으로 몰고 가는 몇몇 특정인들의 퇴진과 태권도의 발전을 위해, 2001년 10월 21일 결의대회를 개최할 것을 알려드린다"고 밝히고 있다. 공문의 수신인은 국기원장.
국기원장은 다름아닌 김운용 대한체육회 회장이다. 김 회장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 세계태권도연맹 총재직도 겸하고 있다. 현재 범태협이 협회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당사자. 결국 문제의 공문은 '범태협과 대책위, 각각 김운용 회장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틀린지'를 입증해준 셈이다.
잠시 후 양측은 서로의 입장을 듣기로 했다. 물리적인 충돌 직전까지 갔던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많이 진정된 상태. 대책위는 "태권도계의 분열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태권도를 배우려는 아이들이 줄고 있다. 일선도장이 흔들리면 끝"이라면서, "김운용 회장이 태권도 발전에 끼친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현 태권도계의 문제는 특정인을 올리고 내리고의 문제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범태협은 "일선 도장에 피해가 가고 있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면서 "그러나 태권도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 때문에 피해가 가는 것인지, 시위 때문에 그런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경기장 곳곳에는 또 다른 성격의 현수막이 붙고 있었다.
'불순세력은 서울시 협회 및 관장들을 혼란하게 하지 말라'
'학생들과 교수는 누구를 위한 시위인가? 진정한 태권도를 위한다면 비호세력을 추방하라'
범태협측에서 내건 열 개, 그리고 대책위가 내건 여덟 개. 현수막들은 태권도계에 깊게 파여 있는 '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1시간 30분 정도 토론이 끝난 후 대책위 소속 관장들이 퇴장하기 시작했다.
"김운용 회장이 30년 동안 태권도계에 남긴 업적은 분명히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태권도를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었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이젠 물러나셔야 합니다. 범태협이 먼저 양보를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굳은 의지를 밝히는 범태협 신성환 관장 뒤편으로 어지러운 국기원 경기장이 보였다. 열여덟개의 현수막이 도배되다시피 붙어 있었고, 바닥은 흙자국으로 지저분했다. 어쩌면, "신발 벗어!"라고 외쳤던 학생들은 바닥에 앉아 마음속으로 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 선배들은 태권도의 심장, 국기원 경기장에서 신발을 신고 있어야 했냐고.
범태협 소속 회원들과 학생들은 이곳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철야농성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범태협은 "김 회장의 30년 장기 집권으로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으며, 불공정한 인사와 불투명한 재정 운영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불공정한 인사의 예로 드는 인물이 세계태권도연맹 임윤택 사무차장과 대한태권도협회 송봉섭 부회장.
범태협은 "이들 모두 자격이 없다"고 못박고 있다. "지난 4월 국가대표 최종선발대회에서 편파 판정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협회 이사직에서 물러난 사람이 임윤택 씨며, 송봉섭 씨는 서울시 태권도협회 회장 재직시 업무상 공금 횡령의 죄목으로 벌금형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
또한, 범태협은 "창립(1972) 이후 전세계의 태권도 심사비를 받아온 국기원에 적립된 재단 기금이 거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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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10-23 13: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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