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연약한 생명 그리고 남은 자들의 슬픔

[리뷰] 연극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다>

23.04.02 10:32최종업데이트23.04.02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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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다> TODAY's CAST ⓒ 안정인

 
극장에 들어서면 빗소리가 들린다. 무대는 구멍 뚫린 철조망으로 둘러 싸인 집의 뒤뜰이다. 낡고 허름한 창고 앞에 긴 의자와 값싼 야외 테이블, 자전거와 농구 골대가 보인다. 관객은 각자의 사정을 잠시 내려놓고 빗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 주목할 준비를 해야 한다.

불이 켜지면 긴 의자에 앉아 립스틱을 바르는 남자가 보인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창고에서 나온다. 두 사람은 친구 사이다. 하지만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듯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의 이름은 요시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는 토루. 10년 만에 얼굴을 마주한 지금 토루는 요시오의 아버지 장례를 맡아 주관하고 있다. 요시오가 묻는다.

"영국인들은 이렇게 말해. 왓 디드 유 두 투다이?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
"글쎄, 죽기 위해 뭘 했냐는 건가?"
"아니야. 투데이를 투다이라고 발음한다고. 이건 What did you do today? 그냥 인사야. 처음엔 나도 무슨 말인가 깜짝 놀랐다니까."


이 연극에는 죽음들이 등장한다. '넌 오늘 뭐 했어?' 라는 질문이 '넌 죽기 위해 뭘 했어?'로 변주되는 것처럼 살아가며, 혹은 살기 위해 한 행동들이 의외의 결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음 뒤에는 그 혹은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남겨진다. 죽음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끝일 지 모르지만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그 혹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은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상실감을 끌어안은 채 남은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지? 정답은 없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어떨까. "나의 쇄골에 사랑하는 그 혹은 그녀가 잠들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래서 내가 원하는 때마다 그들을 불러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연극 소개에 적힌 내용을 보자면, 2019년 일본에서 발표된 이 작품의 작가는 '핑크 지저인 3호'다. 일본 작품이라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일개 연극 관객인 내 눈에 '핑크 지저인 3호'라는 이름은 낯설다. 인터넷에서도 정보를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이 2015년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고토 겐지와 유카와 하루나'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을 것이란 추측은 쉽게 할 수 있다.

당시 신문 보도 등을 종합해 보면 고토 겐지는 북아프리카나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지역 취재를 주로 하는 프리랜서 언론인이었다. 험한 지역을 취재하다 보니 위험한 상황에 말려들기도 했지만 기자로서의 노하우나 감각 등으로 극단적인 상황에 빠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비해 유카와 하루나는 학창 시절 학교 폭력을 경험한 적 있는 민간 군사업체 대표였다. 본명은 유카와 마사유키였는데 스스로 '하루나'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성 정체성이 반영된 이름이다.

유카와 하루나는 고토 겐지에게 위험 지역 취재나 분쟁 지역에서 활동하는 방법 등을 배운 후 2014년 7월 튀르키에를 경유해 시리아로 입국한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취재라기보다는 '위험한 지역을 여행하며 나를 찾는 일'에 가까운 것이었다. 같은 해 8월, IS에 의해 납치된 사실이 유튜브 영상을 통해 알려진다.

유카와 하루나의 납치 소식을 들은 고토 겐지는 아내와 막 태어난 아기를 뒤로 하고 시리아로 향한다. 가족에게는 "유카와를 구출하러 간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고토 겐지가 무사히 유카와 하루나를 구출했다면 해피엔딩이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고토 겐지마저 IS에 붙잡힌다.

IS는 거액의 몸값을 요구한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2015년 1월 IS는 유카와 하루나를 참수한다.

하루나의 참수 영상이 공개된 직후, 당시 70을 훌쩍 넘긴 그의 아버지는 언론에 나와 "폐 끼쳐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카메라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상황은 난감하고 안타깝다. 얼마 후 고토 겐지까지 참수당하며 이 사건은 종료된다. 세상 사람의 비난 속에서 두 사람은 잊혀진다.

이 사건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다. 유카와 하루나가 인터넷 상에 알려진 대로 형편없는 인물이었는지 모르겠다. 고토 겐지가 어떤 삶의 과정을 거쳐 분쟁 지역 전문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도 나는 모른다. 극 중 사카모토 토루는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모른 채로 사랑한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이자 희망이다.

이 연극은 28살의 장례지도사 토루와 그의 친구인 요시오의 이야기가 뼈대를 이룬다. 둘 사이의 이야기는 10년 전 과거로 거슬러 가야 알 수 있다. 현재와 회상 장면은 조명의 차이로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 그것 만으로는 걱정이 됐는지 배우들은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대사를 반복한다. 장면마다 끼워 놓은 포스트잇 같다.

일본 작품 특유의 쓸데없는 발랄함이 초반부에 불쑥불쑥 튀어나와 관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아이들의 폭발하는 감정 때문에 자칫 붕 뜰 수 있는 분위기를 단단히 잡아주는 것은 어머니 키리노 교코 역의 문정희 배우와 아버지 켄토 역의 이정용 배우였다. 무너진 가정에서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 기를 쓰는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눈물이 핑 돌았다. 아들의 외침에 망연자실 집을 나서는 아버지의 멍한 눈빛은 아직도 떠오른다.

이 작품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사뭇 흥미롭다. 던져진 떡밥들을 빠짐없이 엮어야 결말에 도달할 수 있다. 단서를 모아 퍼즐을 풀다 보면 무겁고 슬픈 주제에 도착한다. 문제는 현실의 누구도 이 주제를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 역시 마찬가지다. 이 연극은 4월 16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지안의 브런치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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