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본문듣기

고통을 못느끼는 남자, 그가 선택한 마지막 희생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강풀 원작-곽경택 감독의 가슴 시린 멜로 <통증>

23.02.13 11:40최종업데이트23.02.13 11:40
원고료로 응원
2000년대 초반부터 활동했던 1세대 웹툰작가 강풀은 순정, 호러, 액션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를 통해 독자들로부터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강풀 작가는 지난 2018년 1월 히어로 액션 만화 <브릿지>의 연재를 끝낸 후 무려 5년이 넘도록 신작소식을 들려주지 않고 있다. 강풀 작가의 신작이 미뤄지고 있는 이유는 올해 방송 예정인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드라마 <무빙>의 각본을 직접 쓰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대 들어 신작의 공개 주기가 늦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강풀 작가는 2000년대까지만 해도 누구보다 부지런한 작가였다. 실제로 강풀 작가는 장편 데뷔작 <순정만화>를 시작으로 <아파트> <바보> <타이밍> < 26년 > <그대를 사랑합니다> <이웃사람>까지 7년 동안 매년 쉬지 않고 신작을 발표한 바 있다. 그렇게 부지런하던 강풀 작가의 창작활동에 제동이 걸린 것은 2009년이었다.

강풀 작가는 2008년 <이웃사람> 이후 5번째 순정만화가 나와야 할 2009년에 신작을 내지 않고 휴식기를 가졌다. 하지만 강풀 작가가 다섯 번째 순정만화로 예고하며 포스터와 간단한 시놉시스까지 공개했던 작품은 2011년 <친구>로 유명한 곽경택 감독에 의해 영화로 탄생했다. 강풀 작가가 웹툰의 원작자가 아닌 순수 원안으로 참여했던 최초의 영화였던 권상우와 정려원 주연의 <통증>이었다.
 

<통증>은 강풀 작가가 순정만화 웹툰으로 구상했던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걸그룹 출신 배우의 대표적인 성공사례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호주로 이민을 떠난 교포 1.5세대 정려원은 연습생 시절을 거의 보내지 않고 2000년 4인조 걸그룹 샤크라의 서브보컬로 데뷔했다. 샤크라는 데뷔 65일 만에 지상파 음악 방송 1위를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지만 앨범을 거듭할수록 데뷔 초의 인기를 유지하지 못했다. 결국 정려원은 2004년까지만 활동하고 연기자 변신을 위해 샤크라에서 탈퇴했다.

2000년대 중반은 유진과 성유리 등 1세대 걸그룹 출신 멤버들이 대거 연기자 변신을 선언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방송가에서 연기자들의 경쟁률(?)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정려원은 드라마가 아닌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 출연하며 연기 경험을 쌓았고 같은 해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현빈이 연기한 진헌의 첫사랑 유희진 역을 맡았다. 정려원은 기대 이상의 연기와 함께 뛰어난 패션감각을 선보이며 주인공 김선아 못지않게 주목을 받았다.

2005년 영화 < B형 남자친구 >에 출연했던 정려원은 2007년 <두 얼굴의 여친>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받아 다중인격을 가진 여성을 연기하며 청룡영화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2009년에는 이해준 감독의 <김씨표류기>에서 은둔형 외톨이 여자 김씨 역을 실감 나게 표현했고 2011년에는 고 김주혁, 유해진과 함께 <적과의 동침>에 출연했다. 비록 흥행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정려원은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꾸준히 의미 있는 경력을 만들어 나갔다.

정려원은 2011년 강풀이 원안을 쓰고 곽경택 감독이 연출한 멜로영화 <통증>에서 혈우병을 앓고 있지만 밝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동현을 연기했다. <통증>은 전국 70만 관객에 그치며 흥행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하지만 정려원은 <통증>으로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 후보에 오르며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같은 해 출연한 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가 많은 사랑을 받으며 영화 흥행실패의 아쉬움을 달랬다.

2012년 <네버엔딩 스토리>를 끝으로 영화보다는 드라마 활동에 전념한 정려원은 2017년 드라마 <마녀의 법정>에서 서울지검의 에이스검사 마이듬을 연기하며 KBS 연기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정려원은 같은 해 개봉한 영화 <게이트>가 또 한 번 흥행에 실패했지만 2019년 <검사내전>에 이어 작년에는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에 출연하며 '법정물 전문 배우'로 맹활약하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곽경택 감독의 정통멜로
 

감각이 없는 남자 남순과 통증에 예민한 여자 동현은 서로 사랑하면서 각자의 상처를 치유 받는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사실 곽경택 감독은 작가로서 그리 높은 평가를 받는 감독은 아니지만 장편 데뷔작 <억수탕>부터 2019년 개봉작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까지 자신이 연출한 대부분의 영화에서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하지만 <통증>의 각본에서는 곽경택 감독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강풀 작가의 원안에 <미인도>의 각본을 썼던 한수련 작가가 각본을 쓴 <통증>에서 곽경택 감독은 각본 참여 없이 오직 연출에만 힘을 쏟았다.

<통증>은 어린 시절 자신의 실수로 가족을 잃은 죄책감 때문에 온몸의 감각을 잃어버린 남자 남순(권상우 분)과 한 번 피가 나면 멈추지 않는 혈우병을 앓고 있어 매일 자신의 몸에 혈액 응고제를 투여하는 여자 동현(정려원 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곽경택 감독은 그동안 <친구> <챔피언> <태풍> 등 주로 남성적인 색깔이 강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지만 <통증>을 통해 능숙하진 않지만 조심스럽게 정통 멜로 장르에 접근했다.

남순은 세 들어 살던 집에서 쫓겨나면서 오갈 곳이 없어진 동현을 집으로 데려오고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하지만 투여하던 혈액응고제에 항체가 생긴 동현에게는 고가의 좋은 약이 필요했고 남순은 이 돈을 구하기 위해 많은 돈을 준다는 위험한 일에 뛰어든다. 그리고 그 어떤 물리적인 충격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던 남순은 옥상에서 추락한 자신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동현의 품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극심한 고통을 느끼다가 숨을 거둔다.

권상우는 그동안 영화에서 <일단 뛰어> <동갑내기 과외하기> <탐정> <히트맨> 같은 코미디부터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학원 액션, <포화 속으로> 같은 전쟁 드라마까지 비교적 여러 장르에 출연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지금은 연애중>과 <천국의 계단> <슬픈 연가> 등 주로 멜로 장르에 많이 출연했다. 하지만 권상우를 '멜로 배우'라고 생각하는 대중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통증>에서 보여준 권상우의 연기는 멜로 영화의 남자주인공으로서 조금도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애절했다. 특히 "아무리 맞아도, 아무리 피가 나도 안 아파. 근데 네가 울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라는 남순의 대사는 권상우의 애절한 연기와 만나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심지어 권상우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지적되는 부정확한 발음조차도 <통증>에서는 동현이 남순에게서 느끼는 매력포인트 중 하나였다.

관객들의 웃음 자아낸 김민준의 카메오 출연
 

곽경택 감독과 인연이 있는 김민준은 8,90년대 홍콩영화 속 캐릭터를 연상케 하는 터프가이 캐릭터로 카메오 출연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통증>은 2011년 6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충무로를 대표하는 다작 배우로 활동하던 마동석이 출연했던 작품 중 하나였다. 마동석은 <통증>에서 남순과 교도소에서 만나 함께 일을 하는 사채업자 범노 역으로 출연했다. 직업은 사채업자지만 <비스티 보이즈>의 창우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받아내는 악랄한 사채업자라기보다는 남순과 함께 주로 악덕 채무를 받아내는 일을 하고 성격도 그리 난폭하지 않다.

실제로 <부산행>과 <범죄도시>에 출연하던 시기에 비해 다소 슬림(?)했던 마동석은 본인이 직접 나서 돈을 받아내기보다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남순을 시켜 돈을 받아낸다. 영화 후반에는 목돈을 받을 수 있는 일을 따내고 급하게 돈이 필요한 남순에게 선금을 먼저 주는 의리를 발휘한다. 하지만 나머지 돈을 주기로 한 영배(금동현 분) 일당이 범노의 아내를 납치하면서 자신의 몫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통증>에는 드라마 <다모>와 <프라하의 연인>, 영화 <강력 3반> 등에 출연했던 배우 김민준이 영화 속 드라마의 주인공 역으로 카메오 출연했다(김민준은 곽경택 감독이 연출했던 영화 <사랑>과 <친구> 드라마 버전에 출연했던 인연이 있다). 김민준이 연기한 드라마 주인공은 1990년대 액션영화 속 인물처럼 무턱대고 폼을 잡는 캐릭터였는데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실감 나는 액션을 보여주는 스턴트맨 남순의 연기에 무척 만족스러워한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통증 곽경택 감독 정려원 권상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