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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까지 감동시킨 '인생 첫 경록절', 이 정도일 줄이야

홍대 명절, 인디 음악의 축제 '2023 경록절'... 누구나 와서 즐길 수 있는 수평적 공간

23.02.10 11:48최종업데이트23.02.10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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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대면 공연으로 돌아온 2023 경록절. 한경록의 밴드 크라잉넛이 오프닝을 장식했다. ⓒ 이현파

 
"부어라 마셔라 춤을 춰라 우리의 인생이 여기까지인 듯
채워라 마지막 한 잔까지 이 밤을 위해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 '내 인생 마지막 토요일(크라잉넛)'


대한민국에서 가장 요란하고 성대한 생일잔치, 3년 만에 대면으로 돌아온 경록절의 개막식은 크라잉넛의 노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3년 만의 대면 경록절'이라며 돌아온 경록절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한경록이 준비한 이 잔치에서, 수많은 뮤지션과 팬들이 모여 삶을 자축하고 팬데믹 동안 크게 위축되었던 인디 신에 대한 응원을 보냈다.

펑크록 밴드 크라잉넛의 베이시스트 한경록의 생일잔치에서 시작된 '경록절'은 이제 대한민국에서 가장 요란하고 성대한 생일잔치, 동시에 한 해의 문을 여는 첫 뮤직 페스티벌이 되었다. 호프집에 모여 아티스트들끼리 합주를 하던 잔치가 홍대에서 가장 큰 클럽 공연장까지 이어졌다. 코로나 이후 2년은 비대면 형태로 진행되면서, 무대를 잃은 인디 뮤지션과 관객들을 연결하고, 위로하고자 했다.

200만 cc의 맥주와 함께 뛴 '젊은 그대'들
 

2023 경록절을 위해 200만 cc의 수제 맥주가 준비되었다. ⓒ 이현파

 
8일 개막식 당일, 공연장 무신사 개러지(구 왓챠홀)에 입장하는 관객들을 가장 앞에서 맞이한 이도 한경록이었다. 그는 만나는 모든 관객에게 웃으며 '로큰롤'을 외쳤고, 사진 촬영에 흔쾌히 응했다. 관객들에게 "와 주셔서 감사하다. 안전하게 놀고 가시라"며 허리를 숙였다. 

울산의 화수 브루어리, 경북 안동의 안동맥주, 강원도 속초의 크래프트 루트 등 다양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수제 맥주 양조장들이 200만 cc의 맥주를 지원했다. 끊임없이 맥주가 쏟아졌고, 누구든 원하는 만큼의 수제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한경록이 쏜' 이 방대한 맥주는 이날 밤 거의 모두 소진되었다고 한다.)

개막식에는 장르와 세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뮤지션이 출연했다. 가장 인상적인 공연은 단연 대중음악의 거장 김수철이었다. 그는 1980년대의 최정상 가수였던 동시에, 록과 국악의 접합을 끊임없이 시도해온 음악 연구가다. 경록절에서도 그의 솜씨는 빛을 발했다. '일곱 빛깔 무지개', '모두 다 사랑하리'에서 들려주는 기타 솔로는 전율 그 자체였다. 김수철을 생소하게 느끼는 젊은 관객들도 예순여섯 명인의 포효하는 기타에 함성을 보냈다. 무대에 난입한 크라잉넛의 멤버들과 함께 춤을 추며 부른 '젊은 그대'는 모든 관객을 하나로 묶은 명장면이다.

록밴드 썬바이저스는 하드록의 전설 AC/DC의 커버 무대를 준비했다. 브라이언 존슨의 헌팅캡과 쇳소리, 앵거스 영의 반바지 패션과 독특한 스텝까지 모두 재현한 정성이 놀라웠다. 공연을 함께 보던 지인과 함께 '우리가 지금 AC/DC의 내한 공연을 무료로 보고 있는 것 아니냐'며 웃음을 터뜨렸다.

한경록에게 큰 위로를 선사했다는 싱어송라이터 정우, 배치기의 래퍼 탁, 미국의 인디 싱어송라이터인 소피아 밀스의 공연도 인상적이었다. 멜로망스는 경록절을 위해 기존의 발라드 히트곡을 록 스타일로 편곡하는 센스를 보여주었다. 다른 공연장에서는 좀처럼 외칠 일이 없는 '로큰롤'을 외치기도 했다. 자정을 넘어 공연을 마친 갤럭시 익스프레스까지,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번갈아 가며 무대에 올랐다. 한경록은 공연마다 옆에서 환한 표정으로 동료 인디 뮤지션들의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축제의 주최자이자 아티스트이며, 가장 충성도 높은 한국 인디의 팬이었다.

MZ 대신 'A부터 Z' 합시다
 

김수철과 크라잉넛이 함께 '젊은 그대'를 부르고 있다. ⓒ 이현파

 
홍대 라이브 클럽 '드럭'으로부터 28년. 인생의 절반 이상 홍대 인디 신을 지켜온 그는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마포 르네상스'를 외치고 있다. 이번 경록절의 부제 역시 마포 르네상스다. 흑사병의 유행이 끝난 이후 르네상스가 도래했듯이, 팬데믹이 끝나가는 지금 마포에서 새로운 르네상스가 펼쳐지기를 소망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는 예술이 사람의 삶에 미치는 긍정적인 힘을 믿는다. 사비를 털어 공연을 준비하고, 경록절을 공연 뿐 아니라 예술가의 전시회, 북 콘서트, 강연 등 그 영역을 넓게 확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여기에 있다.

한경록은 8일 공연 도중 'MZ 세대로 짧게 나누지 말자. A부터 Z까지 우리는 하나'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곳에는 위계나 세대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5일 동안 진행되는 경록절의 일정 중 여러 라이브 클럽에서 진행되는 '로큰롤 시티 투어'를 제외하면 모든 공연과 전시가 선착순 자유 입장이며 무료다. 누구든 놀러 와서 맥주를 마시고 공연을 즐길 수 있다. 아티스트들도 맥주를 들고 공연장을 서성거린다. 취한 채 넘어지는 사람은 일으켜 주고,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인에게 찾아주기도 한다. 경록절이 관객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것은, 이 공간이 가지고 있는 수평적이며 무해한 성격에도 기인했다.

이번 경록절은 내 인생 첫 경록절이었다. 2020년 초, 경록절에 다녀온 친구의 후기를 읽고 '내년엔 꼭 가봐야지' 결심했지만, 이윽고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의 설명은 생략하고 싶다. 우리는 꽤 긴 시간 마스크를 쓰고, 춤도 추지 못 하면서 살았다. 어떤 이는 이 슬픈 시대의 대안이 메타버스라고 말했다. '대면 공연은 온라인 공연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단언하는 미래학자를 보면서 씁쓸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모두 틀렸음을, 돌아온 경록절이 입증했다.

한편 공연을 보면서 맥주를 마시던 도중, 예상치 못한 얼굴을 만났다. 고등학교 시절 친하게 지냈던 원어민 영어 선생님이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건넨 것이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던 나를 두고 '뮤직 맨'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에게 오아시스의 노래를, 그는 건즈 앤 로지스 등의 노래를 추천해주곤 했다. 그의 연락처를 수소문해보기도 했지만, 평생 그와 연락이 닿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열일곱이었던 내가 서른이 되어 그와 함께 맥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경록절은 정말 홍대 명절이 맞구나'라고 생각했다. 한 인디 뮤지션의 생일 잔치가 이런 순간마저 만들어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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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음악과 공연,영화, 책을 좋아하는 사람, 스물 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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