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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화완옹주 사랑'이 불러온 후폭풍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2>

23.02.05 12:59최종업데이트23.02.05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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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2>의 한 장면. ⓒ tvN

 
tvN 사극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2>에 나오는 옹주 이서이(우다비 분)는 신분을 앞세워 거만하게 행동하면서도 혈통 콤플렉스를 드러낼 때가 있다. 공주가 아닌 옹주라는 사실이 그를 그렇게 만든다.
 
이 옹주는 어머니가 천출이었다는 사실에 열등감을 갖고 있다. 사대부 가문 여성이 아닌 무희 출신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무용수 상당수는 관청에 얽매인 공노비였다. 이 때문에 이서이는 주변 사람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민감하다. 남들 간의 대화에서 신분 문제가 거론되면,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1월 25일 방영된 제5회에 묘사된 것처럼, 한때 옹주가 정혼자와의 관계를 파탄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영의정 아들 윤지호(김기민 분)가 무심코 내뱉은 옹주의 신분 문제에 분노해서였다.
 
왕후가 아닌 후궁의 피를 물려받은 일로 인해 콤플렉스를 느낀 인물들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주로 서얼 출신 임금들과 관련해 이런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서얼 출신 임금들의 콤플렉스

선조는 중종의 서얼인 덕흥군(덕흥대원군)의 아들이었다. '임금의 서얼'도 아니고 '임금의 서얼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의 콤플렉스는 여느 서얼 임금보다 심각했다. 이로 인한 피해자 중 하나는 아들 광해군이었다. 선조는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광해군을 항상 못마땅해 했고,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도 서른이 넘은 세자 광해군과 갓 태어난 적장자 영창대군을 저울질해 광해군을 긴장시켰다.
 
영조 역시 그런 콤플렉스를 가졌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최숙빈(숙빈 최씨)과 숙종의 아들이었다. 최숙빈이 무수리 출신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근거가 희박하다. 무수리들은 주로 기혼자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왕의 첩이 되는 것은 비상식에 가까웠다.
 
왕실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것은 최숙빈이 공노비 출신의 궁녀였다는 점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신분이 중시되던 시절에 궁녀 출신 후궁에게서 태어나 임금이 됐으니 영조의 신분 콤플렉스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신분이 어떠하든 아버지는 임금이었다. 거기다가 그 자신들도 임금이 됐다. 그런데도 서얼 임금들은 서출이라는 이유로 신분 콤플렉스를 느꼈다. 어머니의 혈통이 사회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가를 알 수 있다.
 
서얼 출신 왕자들에 비해 기록은 훨씬 적지만, 옹주들 역시 동일한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옹주들의 공적 활동이 활발했다면 그들의 콤플렉스도 훨씬 크게 부각됐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을 뿐이다.
 
그런데 옹주들의 경우에는, 부녀관계 여하에 따라 출신 콤플렉스보다는 문제적 행동이 더 뚜렷이 부각될 때도 있었다. 콤플렉스로 인해 조심하거나 위축되기보다는, 아버지의 과도한 사랑으로 인해 안하무인에 가까운 성격을 갖는 경우도 있었다.
 
임금은 왕후보다 후궁을 더 편하게 대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왕후의 딸보다 후궁의 딸이 아버지를 더 자주 만날 수도 있었다. 옹주도 공주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아버지의 관심을 받을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적 성격을 갖게 된 옹주들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2>의 한 장면. ⓒ tvN

 
고종은 환갑에 얻은 덕혜옹주를 애지중지했다. 지금의 서울시청 건너편인 덕수궁 즉조당에 유치원을 개설한 것도 덕혜를 위해서였다. 그는 옹주의 유모인 변복동에게도 예의를 다했다. 고종이 덕혜 방을 불쑥 열었을 때에 변복동이 깜짝 놀라 일어나려 하자 "아이가 깨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라며 그대로 앉아 있게 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이런 애정 표시로 인해 문제적 성격을 갖는 옹주들이 있었다. <경국대전>이 편찬된 시기의 군주인 성종 임금의 염려에도 그런 분위기가 묻어 있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별집 제1권에 따르면, 성종은 혜숙옹주를 시집보낼 때 사돈인 신종호(신숙주의 손자)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성종은 사돈집 어른들을 거론하면서 "옹주가 금중(禁中)에서 나고 자라 존귀함만 믿고 교만하게 구는 폐해가 있을지 모른다"며 염려를 표시했다.
 
성종은 대궐에서 성장한 옹주가 왕족 신분을 내세워 시댁 어른들에게 무례를 범할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래서 신종호에게 "경은 존귀함을 이유로 예법을 폐해서는 안 된다"라고 당부했다. 며느리의 신분을 개의치 말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문제적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낸 인물 중 하나로 화완옹주를 들 수 있다. 영조의 딸이자 사도세자의 동복동생인 화완옹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딸이었다. 그가 열 명이 넘는 영조의 딸들 중에서 가장 큰 애정을 받았다는 점은 시아버지 정우량에 관한 기록에도 언급돼 있다.
 
음력으로 영조 30년 1월 7일자(양력 1754년 1월 29일자) <영조실록>에 정우량의 사망에 관한 <정우량 졸기>가 담겨 있다. 이 졸기는 그의 며느리인 화완옹주를 두고 "주상이 여러 왕희(王姬)들 중에서 가장 많이 사랑을 주어 성격도 요망하고 교활했다"고 평한다. 임금이 여러 공주들 중에서 화완옹주를 편애한 결과로 문제적 성격의 소유자가 됐다고 말한 것이다.
 
영조는 사위 정치달이 죽은 뒤에는 화완옹주를 자기 옆에 꼭 붙여 두었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일성위가 죽은 뒤 영묘께서는 정처를 궐 밖에 내보내지 않으시고 오래도록 곁에 두어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셨으니 만사가 다 그 사람의 권세인 듯하였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과도한 애정표시는 화완옹주와 사도세자의 남매관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화완옹주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도록 만드는 데도 가담했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즉위를 방해하는 활동에도 힘을 보탰다.
 
<유세풍 2>의 옹주는 마음까지 치료하는 심의인 유세풍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정을 되찾지만, 화완옹주는 그런 명의를 만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결국 정조 즉위 뒤에 왕족에서 서인으로 강등되고 쓸쓸한 인생을 살게 됐다. 양자인 정후겸은 어머니와 합세해 정조의 즉위를 훼방했다가 그 일로 인해 사약을 받게 됐다.
 
서자 출신 왕자들과 더불어 옹주들 역시 서출이라는 한계를 의식하며 살아야 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일부 옹주들은 문제적 성격을 표출하며 '만사가 다 자신의 권세인 듯' 행동했다. 일부 임금들의 과도한 딸 사랑이 낳은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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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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