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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철이 가슴에 적힌 '순15', 무슨 뜻인지...억울함 풀고 싶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이야기] 스물여덟 조경철씨의 이루지 못한 바람 "엄마 호강시켜줄게"

등록 2023.01.17 05:11수정 2023.01.17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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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참사 희생자 조경철씨 어머니 박미화씨는 아들이 쓰던 방을 그대로 보존해두고 있다. 방에는 고인의 영정사진과 생전 사진, 유품 등이 놓여 있다. ⓒ 권우성

 
"저는 어릴 때부터 웃는 상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지내왔습니다. 너무 웃어서 주변에서 '너무 웃으면 안 된다'고 혼을 낼 정도로 웃는 상입니다. (그래서) 처음엔 제가 너무 웃는 게 싫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다보니 힘들어도 웃는 제가 좋습니다."

두 해 전 조경철(28)씨가 작성한 이력서의 첫 대목이다. '웃는 상'이라고 표현한, 경철씨의 방에는 그의 말마따나 환하게 웃는 얼굴 사진들이 붙어있다. 그 아래에는 경철씨가 이제껏 사용한 안경들, 군대 군번줄이 나란히 진열돼 있다. 경철씨가 중학교 때부터 쳤다는 기타도 한 편을 차지하고 있다.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경철씨가 사놓고 아직 한 번을 못 써 본 녹음용 마이크도 서랍에 기대어져 있다. 

사진 중에는 이태원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경철씨는 2020년에도, 2021년에도, 2022년에도 핼러윈 데이를 맞아 이태원을 방문했다고 한다. 2022년에 찍은 사진 속, 분장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는 경철씨는 분홍색 후드티를 입고 있다. 그 옷이 사진 아래 고이 개어져 있다. 그 위에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문구가 적힌 손팻말이 붙었다. 3년 내내 방문했던 이태원, 그러나 이번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엄마 나이 스물셋에 낳은 둘째 아들. "돈 많이 벌어서 엄마 호강시켜준다던" 애교 많은 아들. "3층 건물을 사서 1층은 가게 하고 2층은 우리가 살고 3층은 작업실을 삼는다"던, 미래 속에 언제나 엄마의 자리를 그려두며 "평생 엄마랑 함께 살 거"라던 경철씨가 이제 없다. 밤에 출근하는 엄마를 가게까지 바래다주고 집에 돌아와 '나 집에 왔어 걱정말고 일해'라며 살뜰히 챙기던 경철씨는 엄마를 "미화씨"라고 부르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7남매를 키우는 엄마에게 경철씨는 '버팀목'이었다.

"경철이는 제 남편이자, 아들이자, 영원한 껌딱지였죠...'미화씨'라고 제 이름 불러주고, 제가 누워있으면 옆에 와서 파고들고 팔베개해주고 그랬어요. 아휴... 날이 갈수록 더 그리워져요."

지난 13일 서울 성북구 장위동 자택에서 만난 경철씨 어머니 박미화(52)씨는, 아들의 빈 방 앞에서 망연히 말했다.

'치이익' 주인 잃은 커피 머신이 오랜만에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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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철씨의 '카페 사장' 꿈이 담긴 커피 머신. ⓒ 권우성

 
자택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커피 머신 앞에부터 섰다. 달그락 달그락, 그러나 부품 하나를 찾지 못해 이내 다섯째 딸 단비(16)를 불렀다. 단비씨는 능숙하게 커피를 내려 내왔다. 식탁의 1/3을 차지하는 대형 커피 머신은 그렇게 가끔 제 소리를 냈다.


"미화, 커피 마실 거야? 안 마신다고? 미화 커피 맛 모르지? 한 번 마셔봐."

경철씨가 있을 때는 수시로 커피향이 집안에 퍼졌다. "경철이가 커피를 추출할 때 풍겨 나오는 원두향이 너무 좋았다"고 엄마는 나지막이 말했다.

"저 커피머신이 경철이가 가장 아끼던 물건이었어요. 이제 주인을 잃었네요."

3년 전 커피머신을 들여 독학으로 커피 공부를 했다는 경철씨는 카페 사장님이 되는 게 꿈이었다.

"경철이가 10월 31일, 돌아오는 월요일부터 운전면허 학원에 다니려던 참이었어요. 면허 따고 푸드트럭을 하려고 했거든요. 손재주가 좋아서 음식도 잘 만들었어요. 떡볶이랑 퓨전식 음식을 푸드트럭에서 팔려고 했어요. 그렇게 돈 모아서 3년 뒤에 카페 차리는 게 꿈이었고요. 낮에는 카페하고 밤에는 와인바를 하겠다고 했어요."

경철씨는 차곡차곡 꿈을 실현시켜 돈을 모아 가족끼리 여행을 가자고 했다. 가족사진을 찍자고 했고, 노래방에 가서 녹음 테이프를 만들자고 했다. 엄마는 "그래 하자, 가자" 했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당연히 '다음'이 있을 줄로만 알았다.

"제가 생계를 책임지다 보니 시간이 없어서 하나도 못해봤어요. 그게 제일 아쉽고 안타까워요. 나중에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죠."
 
"무명이라는 이름
누군지 몰라도 상관없어 
힘들고 비참하겠지
보잘것없이 사라질지도 몰라 
마지막까지 너의 빛이 될 수 없으지라도 
날 무명의 이름으로 불러줘." 
(음악에 관심이 많던 경철씨가 습작 노트에 적은 가사)
 
경철씨가 보고싶은 엄마는 매일 이태원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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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철아. 엄마가 왔다. 너무나 보고 싶어. 그리운 경철이. 너무너무나 보고싶어 눈물이 난다’ 녹사평역 부근 합동분향소 조경철씨 영정사진앞에는 가족들의 그리움이 담은 글이 적힌 핫팩이 놓여 있다. ⓒ 권우성

 
경철씨는 철이 일찍 든 아이였다.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을 가야 하는데 경철씨는 엄마에게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수학여행비를 내야 한다는 걸 선생님 전화가 와서 알았어요. '왜 말 안 했어' 하니까 '엄마 밤새 일하는데 너무 힘들잖아' 그러는 거예요. 돈 없는 걸 아니까 얘기를 아예 안 했던가 봐요. 용돈 줘도 주면 주는 대로 받고, 투정 한 번 없었어요. 저희가 식구가 많잖아요. 그래서 내색 않고 형편에 맞게 한 거 같아요." 


경철씨는 군대에 가서도 첫 월급을 안 쓰고 모아 엄마에게 건네기도 했다. 그런 경철씨를 보기 위해 엄마는 새벽에 일을 마치고 곧장 경철씨가 있는 부대에 면회를 가기도 했다. 돌아오면 바로 저녁 출근을 해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안 힘드셨냐 물으니, 엄마는 "(경철이가) 보고 싶어서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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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샘 식당일을 마치고 매일 같이 녹사평역 합동분향소를 찾는 박미화씨가 시민들에게 나눠 줄 국화꽃을 들고 서 있다. ⓒ 권우성

 
엄마는 요즘도 경철씨를 보러간다. 매일같이 녹사평역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는다. 밤 10시부터 시작하는 식당 주방일을 다음 날 오전 10시에 마치고 오후 12시쯤 녹사평으로 향한다. 오후 5시 쯤 집으로 돌아와 2~3시간 쪽잠을 자고 다시 식당으로 출근한다. 엄마의 일과다.

"녹사평을 안 가면 잠이 잘 안와서요. 새벽에 식당에 손님이 적으면 꾸벅꾸벅 졸고, 손님이 많으면 못자고, 그렇게 살죠 뭐."

엄마는 경철씨 장례식을 치르고 일주일 후부터 다시 출근했다. "몸이 힘든 줄은 모르겠다"고 했다.

"그냥, 경철이 빈자리가 너무 커서 답답하고 그래요. 경철이가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밀어주지 못한 거 해주지 못한 거 그런 생각만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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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화씨가 이태원참사 합동분향소 옆 유가족 대기실에서 잠시 쉬고 있다. ⓒ 권우성

 
경철씨는 배우고 싶은 것들을 독학으로 익혔지만, 동생 단비씨에게만큼은 "주저하지 말고 당당하게 도전해, 하고 싶은 걸 해"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동생이 '주저하지' 않길 바라기에 자신이 하루 빨리 성공하길 바랐다는 경철씨. 그 꿈을 이제는 단비씨가 잇겠다고 나섰다. 유일한 오빠인 경철씨와 여러모로 닮았다는 단비씨는 "오빠 대신 카페를 창업해 오빠 소원을 이뤄주겠다"고 했다.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해 잃을 것도 하나 없다네,
청춘이네,
어제보다 오늘 더 높이 뛰어."
(경철씨가 습작 노트에 적은 가사)

엄마는 여전히, 너무나,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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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참사 희생자 조경철씨 어머니 박미화씨가 아들 방앞에서 인터뷰를 하는 가운데, TV에서는 이태원참사 특별수사본부 수사결과 발표 장면이 보도되고 있다. ⓒ 권우성


2022년 10월 29일 오후 7시, 집을 나서기 전에도 경철씨는 단비씨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가족들과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단비씨가 갈 수 있는 고등학교를 경철씨도 함께 둘러보고 단비씨에게 꼭 맞는 학교를 결정하려고 했다. 그날 경철씨는 "오늘 아니면 못 갈 수도 있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경철씨는 아끼는 동생이 어느 고등학교를 가게 됐는지, 어떤 미래를 꿈꾸게 됐는지 알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날 밤 11시 24분 경철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건 것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고가 났다"고, "아들이 쓰러졌다"고 했다. 엄마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밤, 식당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이 없었다. 엄마는 새까맣게 속을 태우며 "우리 경철이는 괜찮을 거야" 기도하듯 읊조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일하고 나서야 식당 문밖을 나설 수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일했는지 아예 기억이 안 나요. 그냥 하늘이 무너지는 거 같았거든요. 저 대신 딸들이 경철이 있는 곳을 수소문하고 있었는데 성남 중앙병원에 있다는 거예요. 그때 집에 경찰이 와 있었거든요. 딸이 경찰한테 '엄마 좀 데려다주실 수 있냐'고 했는데, 안 된대요. 같이 일하는 언니 차 얻어 타고 갔어요. 처음에 중앙대 병원으로 잘못 간 거예요. 성남 중앙병원은 진짜 먼 데 있더라고요. (성남 중앙병원은 경철씨 집에서 33km 떨어진 곳에 있다 - 기자 말) 우리 경철이가 왜 거기까지 갔을까요."
 

엄마는 꼭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경철씨 휴대폰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건 남자다. "그날 밤 11시 24분에 경철이가 CPR은 받았는지 그때 숨은 붙어있었는지 살 가망이 조금이라도 있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우리 아들의 마지막을 아는 유일한 분이기에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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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화씨가 고인의 유품이 담긴 '순 15'가 적힌 경찰의 현장 채증물 봉투을 보여주고 있다. ⓒ 권우성

 
엄마는 경철씨의 맨 가슴팍에 적힌 '순 15'가 무슨 뜻인지도 너무 궁금하다고 했다. "경철이 가슴이랑 경철이 유품 담긴 봉투에 '순 15'라고 적혀있는데 이거에 대해 아무도 말을 안 해준다"고 했다. 그래서, 사고 이후 단 한 번도 꿈에 나타나지 않는 경철씨를 꿈에서 만난다면 묻고 싶다고 했다.

"그날, 그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사고가 났는지 묻고 싶어요. 경철이가 얘기해 줬으면 좋겠어요. 경철이 억울함은 풀어야죠. 거기에 왜 갔냐 따질 게 아니라 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나를 물어야죠. 처음 112 신고했을 때 골든타임만 안 놓쳤으면 159명 아이들 살았을 거예요. 그게 너무 한이 돼요. 정부에서는 다들 자기 탓이 아니라고 하는데, 잘못했으면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죠. 그 사람들이 앉아 있는 그 자리가 우리 아이들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보다도 소중한가요."

숱한 질문들을 가슴에 품은 채, 엄마는 이 날도 이태원을 찾아 빨간 목도리를 둘렀다.
 
울다 지우다 추억을 지워 
기억해줘 내 냄새 
사라져도 슬퍼하지마, 울지마
미안해요 사랑해서 
늦게 알아버려서 
(경철씨가 습작 노트에 적은 가사)
#이태원 참사 희생자자 #조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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