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사과도 필요 없다" 삼성 해고자 8개월째 장례 못치른 이유

[인터뷰] 삼성전자서비스 고 정우형 배우자 이인숙씨

등록 2023.01.11 15:35수정 2023.01.11 15:35
12
원고료로 응원
a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에서 노조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7년 간 복직투쟁을 벌여오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정우형씨의 부인 이인숙씨가 4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전자 본관 앞 분향소에서 남편의 영정 사진을 만지고 있다. ⓒ 유성호

 
서울 강남역 8번 출구에서 불과 100미터 떨어진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 강남 번화가 한복판에 '둥둥' 장송곡이 울렸다. 인파의 외면 속에 검은 상복을 입은 이인숙(58)씨가 한 손에는 피켓을 한 손에는 묵주를 들고 홀로 서 있었다. 이씨가 든 검은 피켓에는 '삼성 이재용은 정우형 열사 영정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써 있었다. 거리에서 싸우다 섬유근육통증후군이라는 희귀병까지 얻은 그는 영하의 추위에 30분도 채 서 있지 못했다.

금세 뻗뻗해져버린 다리를 절어가며 이씨가 돌아온 곳은 바로 옆 텐트에 설치된 분향소. 향 냄새 자욱한 그곳에서 이씨가 차가워진 남편의 영정을 만졌다. 손가락 끝이 유리에 닿자마자 이씨 두 눈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고개를 떨군 이씨 앞에 놓인 영정 속 무표정한 얼굴은 삼성전자서비스 해고자인 고 정우형(56)씨다.

7년째 복직투쟁을 하던 고인은 지난해 5월 12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원직 복직'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은 채였다. 이씨는 남편의 명예회복과 다른 해고자들의 복직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현재 240일 넘도록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다. 고인의 시신은 8개월째 병원 안치실 냉동고에 누워 있다. 

삼성전자서비스 충남 천안센터에서 에어컨 설치·수리 노동자로 일했던 정씨는 지난 2016년 1월 해고됐다. 2013년 노조 설립 때부터 참여한 그는 2015년 5월 28일 사측이 세 번 이상 고객 클레임을 받은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도록 취업규칙을 바꾸려 들자 이에 저항, 회사에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정씨는 건물 청소 노동자가 발견해 극적으로 살아났지만 이후 사측으로부터 노조 주요 문제인력으로 분류됐고, 갖은 압박에 못 이겨 결국 강제 퇴사했다. 

이후 정씨는 복직을 요구하며 7년간 거리를 헤맸다. 회사에선 '돈을 받으려 저런다'는 말이 퍼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구속 등 노조파괴 공작이 사회적 논란이 되자 삼성은 지난 2019년 1월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소속 설치·수리 기사 80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지만, 이마저 정씨 등 해고자들에겐 적용되지 않았다.

정씨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지난해 4월 말 이재용 회장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다. "나는 노조파괴 공작의 피해자"라는 제목의 편지에는 "일감 줄이기로 직장을 떠나게 만들고, 위장 폐업으로 거리로 내몰았다. 그 범죄를 만천하에 제대로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5월 2일, 이 편지는 수취인 거부로 정씨에게 반송됐다. 열흘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240일째 못 치른 남편 장례... 삼성, 해고자들 복직시켜라"
 

"사과도 필요 없다" 삼성 해고자가 8개월째 장례 못치른 이유 ⓒ 유성호

 
a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에서 노조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7년 간 복직투쟁을 벌여오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정우형씨의 부인 이인숙씨가 4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고인에 대한 명예회복, 해고자 복직 등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 유성호

 
삼성전자서비스에서 노조활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건 정씨뿐만이 아니다. 앞서 천안센터에서 설치·수리기사로 일했던 고 최종범(당시 33세)씨는 2013년 10월 31일 표적 감사를 당하는 등 삼성의 노조 탄압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삼성전자서비스 유니폼을 입은 채였다. 그는 유서에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 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2014년 5월 17일엔 삼성전자서비스 양산센터에서 노조활동을 하던 고 염호석(당시 34세)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삼성은 노조가 생긴 협력업체엔 일감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옥좼고 염씨가 죽기 직전 2014년 4월 받은 월급은 41만 원에 불과했다. 염씨는 유서에서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지 못 하겠고,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도 보지 못하겠기에 저를 바칩니다"라고 썼다. 젊은 노동자들의 연이은 사망에 여론 악화를 우려한 삼성은 돈으로 경찰을 움직여 염씨의 시신을 탈취하고, 장례를 노동조합장으로 치르지 못하게 하는 일까지 벌였다.

정우형씨의 배우자 이인숙씨는 "천안센터에서 함께 일했던 종범이가 죽었을 때 남편이 너무 괴로워했다. 염호석 열사 시신 탈취 땐 노조의 지침을 어기면서까지 장례식장으로 맨 먼저 달려가 경찰들에 대항해 끝까지 몸으로 시신을 지키려 했던 게 바로 남편이었다"고 했다. 이씨는 "인간 같지도 않은 삼성에게 사과를 받아서 뭐하겠나"라며 "그런다고 죽은 남편이 돌아오냐"고 했다.

이씨는 대신 삼성 노조파괴 공작의 피해자인데도 아직 복직되지 못한 거리의 해고자들을 복직시키라고 했다. 그래야 장례를 치를 수 있고, 그게 남편 뜻이라고 했다. 정씨는 유서에 "나 죽거든 화장해 동지들에게 한 줌씩 나눠줘 삼성에 뿌릴 수 있게 부탁한다"고 써 놨다. 정씨와 함께 복직투쟁을 했던 안양근·박병준씨를 포함해 해고 노동자 3명은 삼성전자서비스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2심까지 승소한 상태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해 1월 삼성전자서비스가 이들을 불법 파견했으며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복직되지 않고 있다.

지난 4일, 배우자 이인숙씨를 삼성전자 사옥 앞 분향소에서 만났다.

"노조 탄압 해고자 복직 없는 사과는 필요 없다"
 
a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에서 노조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7년 간 복직투쟁을 벌여오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정우형씨의 부인 이인숙씨가 4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전자 본관 앞 분향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8개월째 장례를 못치른 이유를 설명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유성호


- 8개월째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

"아무것도 바뀐 게 없지 않나. 최종범 열사, 염호석 열사, 그리고 남편까지 죽었는데도 삼성은 바뀌는 게 없다. 삼성은 너무 차가운 곳이다. 남편의 명예가 회복되고, 남아있는 해고자들이 복직돼야 장례를 치를 수 있다. 그게 남편이 원하는 것이다."

- 지난해 5월 12일 남편이 사망하기 전 낌새가 있었나.

"없었다. 전날 밤 통화했을 때도 아주 일상적인 대화만 했다. 밥 먹었는지 묻고, 주말에 보자고 하고... 남편은 평일엔 남원에서 에어컨 설치·수리 일을 하고 있었다. 전혀 상상도 못했다.

후회되는 게 있다. 나는 남편이 2015년 5월 28일 극단적 선택을 하고 난 뒤, 더 이상 노조활동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남편이 죽을 뻔했는데 어느 부인이 그냥 내버려둘 수 있겠나. 그때 남편은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는데도 노조탄압의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했다.

남편을 막기 위해 뭐든 해야 했다. 내가 대신 거리로 나섰다. 난생 처음 피켓을 들어봤다. 2015년 여름, 처음으로 저기 강남역 8번 출구 위로 올라오기 전 계단에 서서 얼마나 망설였는지… 가슴이 막 콩닥콩닥 뛰고. 그때까진 나도 평범한 엄마고, 아내고, 직장인이었으니까.

그래도 올라가야 했다. 용기를 내고 삼성전자 본관 앞에 딱 서보니까 남편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금방 이해가 됐다. 거기엔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삼성SDI 공장에서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부모님들, 삼성물산의 재개발 사업으로 20년 가까이 싸우고 있는 과천 철거민들, 삼성생명으로부터 보험금 지급을 부당하게 거부당한 암 환자들이 나앉아 있었다. 말이 20년이지, 50대에 싸우기 시작한 철거민들은 지금 70대가 됐다. 너무 잔인하지 않나.

그땐 당장 남편 목숨을 지키기 위해 퇴사 조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남편에게 '몸 괜찮아지면 당신 싸우고 싶은 만큼 마음껏 싸워라'고 했다. 남편은 고맙다고 했다. 그 말을 했던 걸 너무 후회한다. '마음대로 하라'는 내 말을 혹시 남편은 죽음까지 포함해서 받아들였던 건 아닐까 싶어서."

- 정씨가 사망하기 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노조파괴 공작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편지를 썼다.

"이재용 회장이 2020년 5월 노조파괴 공작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그게 진정한 사과였다면 노조파괴 공작의 피해자들이 모두 복직됐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부회장에서 회장이 됐지 않나. 남편이 이재용 기자회견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지금 여기에 아직도 안양근씨, 박병준씨 등 해고자들이 버젓이 남아있다. 실질적으로 해결한 게 없는데 사과는 무슨 사과인가."

-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해를 넘겼다. 그간 삼성 쪽 반응은.

"전혀 없다가 최근에야 대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삼성은 해고자들의 복직 문제를 거부하고 있다. 얼마 전엔 '도의적' 해결이라는 표현을 쓰길래 정말 화가 났다. 사람이 죽었다. 말 뿐인 사과, '도의'는 필요 없다. 문제 일으킨 걸 해결하라는 건데, 지금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다."

"운영하던 여행사에까지 회유 시도"
 
a

정우형씨의 부인 이인숙씨는?“삼성에 의해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 유족이 안 생겼으면 좋겠다. 남편의 죽음이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유성호

 
- 정씨가 노조활동을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

"2013년 노조(민주노총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세울 때부터였다. 남편은 자리를 맡거나 얼굴을 내놓고 앞장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늘 뒤에서 묵묵히 궂은일 자처하고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시위를 가거나 연대투쟁을 가도 항상 맨 뒤에서 대오를 챙겼다. 남편 트레이드마크인 빨간 가방을 메고. 그러다 앞쪽에서 상황이 발생하거나 경찰과 대치하는 일이 생기면 맨 앞으로 달려갔다. 남편 응원하러 온 나와 딸 아이를 감싸 안은 채로 등을 지고 한발짝 한발짝씩 뒷걸음으로 전진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노조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2013년 10월, 최종범 열사가 사망했을 때 남편은 특히 힘들어했다. 남편에게 종범이는 매일 얼굴 보고 함께 일하던 동생이었다. 남편은 종범이의 죽음을 감당 못했다. 그때부터 남편의 노숙이 시작됐다.

최종범 열사가 간 뒤에도 노조탄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불과 7개월 뒤인 2014년 5월, 염호석 열사가 죽었다. 이후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고 직감한 남편은 장례식장을 사수해야 한다고 노조에 주장했다. 웬일인지 노조는 대기하라고만 했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동료 몇만 데리고 염호석 열사 시신이 있는 서울의료원 강남분원으로 올라갔다. 경찰이 시신을 빼가는 걸 온몸으로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노조가 사측과 합의를 하려 하자 남편은 크게 반대했다. 나는 보지 못했는데, 동료들은 남편이 무슨 미친 사람처럼 날뛰면서 '이렇게 합의해선 안 된다'고 뛰어다녔다더라. 노조탄압을 중단시킬 실질적인 책임자 처벌 내용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조탄압을 멈추라고 절규하며 죽은 최종범·염호석 열사의 뜻을 헛되이 하는 거라고 본 거다.

실제 그랬다. 두 열사의 죽음 이후에도 기사들은 차량에 GPS가 달린 채로 노예처럼 일해야 했다. 심지어 당시 노조 지회장이었던 나두식씨는 삼성이 관리하던 정보경찰과 '핫라인'으로 연결돼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까지 벌어졌다. 삼성이 이런 곳이다."

- 정씨가 겪은 노조탄압 사례는.

"남편은 집에서 그런 얘길 잘 안 했다. 가끔가다 소주 한잔 먹으면서 '고객 응대' 평가를 빌미로 회사에서 못살게 군다고 털어놓는 정도였다. 일감을 받는데 있어서도 불이익이 많았던 것 같다. 수입 차이가 확 났으니까. 회사는 조합원들을 분리시키려고 일감을 줄 때도 경쟁을 붙였다. 2015년 극단적 선택 이후에는 남편이 '그린화 작업'(노조와해 공작)에 의해 철저히 관리 대상이 됐고, 수도 없이 퇴직을 종용 받았다.

남편이 강제 퇴사 당한 뒤 복직투쟁을 하면서는 갖은 회유와 협박을 다 겪었다. 내가 조그맣게 여행사를 운영했었는데 단체 항공권과 단체 계약을 매개로 회유가 들어오기도 했다. 나중에 이상하다는 걸 알고 돈을 물어준 적도 있다. 남편 동료들 가운데 '협박 때문에 나서서 못 돕는다'고 털어놓은 경우도 있었다. 2015년 남편이 입원해 있던 병실에서 남편의 유서와 다이어리가 사라지는 일까지 있었다. 회사의 책임을 묻는 내용의 유서였다. 이러니 제가 누굴 믿을 수 있겠나."

"삼성이란 두 글자, 인생에서 지우고 싶다"
 
a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4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전자 본관 앞 고 정우형 열사 분향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고인에 대한 명예회복, 해고자 복직 등을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 몸이 안 좋다고 들었다.

"2015년 이후 삼성과 싸우면서 섬유근육통증후군이라는 희귀병에 걸렸다.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온몸이 굳고 퉁퉁 붓고 찌릿찌릿 통증이 왔다. 병원을 돌아 다녀도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다고 했다.

하던 일도 다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은 아예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남편이 아침에 출근할 때 내가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저녁에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똑같이 침대에 누워있었던 날도 있었다. 남편이 차려놓은 아침상을 만지지도 못하고. 외부 활동을 전혀 할 수 없고 사람 만나는 것도 기피하게 되니 우울증이 왔다.

남편은 자기 때문에 내가 병에 걸린 것 같다고 자책했더라. 생전에 나한텐 그런 말을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주변 사람들에겐 늘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는 걸 남편이 죽은 뒤에야 알았다. 그나마 3년 정도 치료를 하고 나니 어느 정도 일상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작년에 남편이 죽고 병이 다시 도졌다. 병원에선 외상 후 스트레스라고 하더라. 평생 갖고 살아야 한다고."

- 그래도 1인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다 느껴진다. 지나치는 삼성 직원들의 차가운 눈빛들.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외면. 그게 온몸을 차갑게 찌르는 것 같다. 삼성은 울분과 분노로 가득 찬 곳이다. 그래도 나는 단 한 명에게라도 더 알려야 한다. 여기 삼성 해고자가 있다고. 그게 남편이 죽으면서까지 알리고자 했던 거니까.

한번은 영하에 바람이 정말 추웠던 날 아침이었다. 삼성에 출근하는 어떤 남자분이 따뜻한 커피 세 잔을 사 들고 오셔서 저와 동료들에게 나눠주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묵주를 들고 계셔서 오늘은 제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따뜻한 커피라도 한 잔 하시라고 사왔다'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어서 죄송하다'고 하고 가시는데... 그날 선전전 하는 내내 혼자 펑펑 울었다. 초면의 낯선 분이었지만, 외롭게 시위할 때 그런 따뜻함을 느낀 건 처음이었어서."

- 남편이 가족들에게 따로 남긴 유서가 있었나.

"나와 딸에게 아주 짧은 유서를 남겼다. '미안하다고 말하진 않겠다. 오랜 시간 함께 해줘서 고맙다.' 이게 전부다. 남편은 평소 핸드폰에도 나를 '항상 고마운 사랑'이라고 저장해뒀다. 유서는 가방에 늘 간직하고 다닌다. 딸이 대학생인데 아직 유서를 보여주지 못했다. 딸 아이는 빈소에도 다녀가지 못했다. 아직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아빠에 대한 얘기도 꺼내지 않고, 울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지난번 추석 때 아이가 아침에 내 방으로 건너와서 갑자기 나를 끌어안고 엉엉 울더라. 놀라서 물어봤더니 아빠 꿈을 꿨다고. 아빠 얘기를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문득 걱정이 돼서 혹시 아빠가 안 좋은 모습이었는지 물었다. 딸 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자기가 친구들과 부산에 놀러 갔다가 기차편이 끊겨서 못 올라오고 있었는데, 아빠가 자기를 데리러 왔더라고. 부산역 앞에서 자기를 기다리면서 환하게 웃더라고. 그러면서 한참을 울었다. 내가 말했다. 아빠가 웃고 있었으니 지금 아빠는 괜찮은 거라고, 아빠 미워하지 말라고..."

- 삼성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하고 싶은 게 없다. 왜냐면 저들에게 어떤 말을 해도 안 통한다는 걸 아니까. 소용 없으니까. 그냥 내 인생에서 '삼성'이란 두 글자를 지우고 싶다. 그게 제 솔직한 마음이다. 내 인생에 삼성만 없었다면 내 남편 이렇게 안 됐을 거고, 나와 아이가 평생을 아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 테니까. 절대 변하지 않는 삼성에게 기대도 안 한다. 인간 같지도 않은 그들에게 사과를 받으면 뭐하겠나. 죽은 남편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저 더 이상 저처럼 이렇게 삼성에 의해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 유족이 안 생겼으면 좋겠다. 남편의 죽음이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삼성에 아직 해고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복직됐으면 좋겠다. 남편이 '돈 때문에 그랬다'는 말도 안 되는 오명을 벗었으면 좋겠다. 남편의 명예가 회복됐으면 좋겠다. 그냥 모든 게 제 자리로 돌아가길 바라는 것뿐이다. 근데 그게 참 어렵다. 진짜 어렵다.

해 넘어가기 전에 그래도 얼굴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아서, 지난주 12월 30일에 남편이 있는 안치실에 다녀왔다. 남편에게 그랬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나 지금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 미안하다는 얘기는 못했다. 지금 미안하다고 하면 남편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고, 저도 무너져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조금만 더 기다려줘. 꼭 해결하고 올게'라고만 했다."
 
a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에서 노조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7년 간 복직투쟁을 벌여오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정우형씨의 부인 이인숙씨가 4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전자 본관 앞 남편의 분향소에서 향을 피우고 있다. ⓒ 유성호

 
a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에서 노조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7년 간 복직투쟁을 벌여오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정우형씨의 부인 이인숙씨가 4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전자 본관 앞 분향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고인에 대한 명예회복, 해고자 복직 등을 요구했다. ⓒ 유성호

 
[관련 기사]
"삼성 너무 잔인", 삼성전자서비스 해고노동자 아내의 '절규' http://omn.kr/1yyat
삼성 이재용 '수취거부' 편지 남기고 세상 떠난 50대 노동자 http://omn.kr/1yxuv
#삼성 #정우형 #노조탄압 #해고 #이재용
댓글1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3. 3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