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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과 함께 만든 청년의 이름

청년 운동의 성과와 의미, 그리고 남은 숙제들

등록 2023.01.06 11:09수정 2023.01.0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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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겨울이었다.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나는 집 앞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사소하고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물품을 발주하고 진열할 때는 사회에서 1인분의 몫을 담당하고 사는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루는 편의점 사장이 다짜고짜 나에게 "돈을 훔쳤냐"며 전화를 해왔다. 자신이 편의점 포스기에서 내가 천 원짜리 다발과 만 원짜리 다발을 바꿔치기하는 것을 보았다며 윽박질러댔다. 돈이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억울했지만 어른이 내게 잘못했다고 질러대는 고함 앞에서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한참의 통화 끝에 나는 "그럼 월급을 받지 않으면 절 믿어주실 건가요?" 같은 한심한 말을 내뱉었다. 그제야 사장은 들어야 할 말을 들은 사람처럼 목소리가 달라지며 용서해주겠다고 했다. 그때 받지 못한 돈 15만 4천 원, 처음으로 사회에 치른 1인분의 값이었다. 사장은 봄이 오고 얼마 후 편의점을 폐업하고 사라졌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억울하고 분했다. 돈이 아니라, 죄지은 것 없지만 사과했던 그때의 내가 계속 떠올랐다. 노무사를 무작정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는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해결하기가 참 어렵다. 그냥 교훈으로 삼으면 어떻겠냐"고 정중하게 제안했다. 나름대로 솔직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문제는 어디서 해결해주나 생각할 때 아르바이트를 위한 노동상담 포스터를 만나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청년운동을 만나게 된 계기였다.
 
청년운동의 여러 성과 중 하나는 새로운 이름과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알바생과 취준생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을 "청년 구직자", "불안정 청년 노동자"로 바꾸어 부르고, 온전히 개인이 책임져야만 했던 청년의 이행기를 정책의 영역으로 초대했다. 청년 정책을 임시적·일시적인 청년실업 해소를 위한 고용대책에서 불평등과 격차, 다양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자리·주거·사회안전망 등 종합적인 사회 정책으로 변화시켰다.
 
"청년의 문제는 청년이 직접 이야기하자", "청년이 겪는 사회적 문제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청년 당사자들의 요구는 지자체를 경유하며 정책과 제도로 탄생하였다. 청년기본조례, 청년활동 지원사업, 청년 당사자 참여형 정책 모델과 같이 청년들이 만든 정책과 제도, 방식은 다른 지자체로 확산하고 연결되며 함께 성장하였다. 청년수당, 청년월세지원, 청년마음건강 등 이행기 청년을 위한 종합적 사회 정책을 지역에서 청년들이 직접 일구고 함께 만들어왔다.
 
이러한 성과들은 추후 중앙정부 차원의 청년 정책과 제도로 안착하게 된다. 청년들은 1만 명 서명운동 등을 통해 청년기본법 제정에 힘써왔고, 중앙정부 차원의 청년 정책 기본계획 수립, 청년정책조정위원회 등 당사자 참여형 구조 역시 만들어졌다. 정책과 제도의 공간은 더 커지고 넓어졌으며 참여의 공간 역시 함께 확장했다. 이제는 정부와 지자체를 가리지 않고, 일상의 공간에서 많은 청년이 보다 안정적인 정책과 제도를 누릴 수 있게 된 셈이다. 

청년 정책 변화의 '주체'였던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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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3기 ‘오지랖 캠프’에 모인 150여 명의 청년 ⓒ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

 
이처럼 지난 몇 년 청년을 둘러싼 정책 환경은 크게 변했다. 청년기본법과 청년기본조례 등 청년 문제 해결을 위한 독자적인 제도 기반이 마련되었다. '청년'이라는 별도의 대상을 정책 개입의 영역으로 호명하였으며, 당사자 참여형 과정 설계를 통해 청년 정책의 패러다임 변화를 견인해왔다. 늘 청년 정책 변화의 과정에서, 정책과 제도와 청년의 삶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힘쓴 사람은 청년 당사자, 그 스스로였다는 뜻이다.
 
만들어온 성과만큼이나 마주한 질문도 달라졌다. 청년에 대한 사회적 지지도는 낮아지고, 갈등은 커졌다. 이젠 "청년을 위한 정책과 지원은 충분하지 않냐", "청년뿐만 아니라 보편적 시민을 위한 안전망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냐"와 같은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청년을 위한 정책과 시도는 단순히 청년만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지자체별 청년수당은 한국형 실업부조인 국민취업지원제도 태동에 기여하였다. 청년월세지원사업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중앙정부 사업으로 추진되었으며, 이는 추후 주거 급여 분리 지급의 논의로 연결되고 있다. 청년마음건강지원사업은 시민 대상 정신질환의 개입 영역을 예방적 의미로 폭넓게 확장해 나가고 있다.

지난 몇 차례의 선거를 거치며 청년에 대한 정치적 의미와 해석도 크게 달라졌다. 불평등의 당사자이자, 한국 사회 미래를 만들어갈 주체라는 호명 사이에서 "차별과 갈등, 공정을 말하는 이질적 시민"의 이름도 추가되었다. 한국 사회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반대와 같은 공정담론, 이대남과 같은 성차별적 담론 앞에서 소위 '청년의 목소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숙제로 남아있기도 하다.
 
지난 몇 년 청년 당사자들은 함께 청년의 이름을 만들고, 정책과 제도의 영역으로 그것을 적극적으로 호명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그 결과 종합적인 청년 사회 정책의 태동, 당사자 정책 패러다임 구축, 정부와 지자체 청년 참여 확대 등 많은 성과도 만들었지만, 청년 정책과 운동에 대한 사회적 지지와 협력의 축소, 청년 담론의 분화 등 마주한 질문 역시 달라졌다.

이제 첫발을 뗀 것뿐이다. 청년에서 시작한 우리 사회의 불리지 않던 많은 이들의 이름과 자리를 새롭게 쓰고, 불평등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 청년을 적극적으로 호명하고 시도하는 것. 청년에서 시도된 많은 성과와 의미를 세대와 지역을 넘어, 보편적 시민을 위한 것으로 확장하는 일.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라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주형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가 쓴 글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1,2월호 '사이를 잇다' 꼭지에도 실렸다
#청년 #청년정책 #불안정노동 #청년기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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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비정규 노동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 노동시민사회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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