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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사람들이 나고 자란 의로운 마을

'인내천' 외친 양한묵과 '실사구시' 주창한 양득중 나고 자란 해남 영신마을

등록 2022.12.19 10:40수정 2022.12.19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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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묵생가 안내판. 생가와 전시관, 순국비, 무궁화동산으로 꾸며져 있다. ⓒ 이돈삼

 
13번 국도를 타고 '땅끝' 해남으로 가는 길,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대형 무궁화 조형물도 보인다. 지난 여름부터 가을까지 무궁화로 꽃천지를 이뤘던 곳이다. 도로변에 '덕촌 양득중의 실사구시 마을'과 함께 '지강 양한묵 생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지난 10일 해남 영신마을을 찾았다. 양득중과 양한묵은 의로운 길을 걸었다. 200여 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양득중은 실사구시를, 양한묵은 인내천을 주창했다.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사회에 반기를 든 인물이었다. 


옥중서 생을 마감한 유일한 민족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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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촌사. 양득중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하는 공간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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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된 양한묵. 양한묵 생가의 본채에 전시돼 있다. ⓒ 이돈삼

 
덕촌 양득중(1665∼1742)은 조선 중후기에 실학을 불러들이고, 정치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였다. 양득중은 실학의 뿌리가 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부르짖었다. 국가개혁을 담은 유형원의 책 <반계수록>을 영조에게 소개하고, 나라에서 펴내도록 했다. 실학이 나라의 정책으로 자리를 잡았다. 영조는 '실사구시'를 써서 벽에 걸어두고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지강 양한묵(1862∼1919)은 인내천(人乃天)을 외쳤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의 인내천은 양한묵이 쓴 <대종정의>에 언급돼 있다.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가 내세운 인내천의 이론적 근거를 양한묵이 풀어낸 것이다. 양한묵은 신분 차별이 용인됐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의 평등을 꿈꿨다.

양한묵이 동학에 참여한 이유다. 장흥과 보성에서 붙잡힌 동학농민군을 구출하는 데도 앞장섰다. 애국계몽 운동을 하며 운동단체 창립도 이끌었다. 동학의 개혁과 민족자주 사상은 우리나라의 근대 민족의식과 민주주의 형성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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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식 그림. 양한묵 전시관에서 만났다. ⓒ 이돈삼

 
양한묵은 실천적 사상가였다. 교육자이면서 독립운동가였다. 천도교와 전라도를 대표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19년 서울에서 열린 3․1독립선언식에 참여했다.

양한묵은 일제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한국인의 의무이고, 앞으로도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옥중에서 생을 마감한 유일한 민족대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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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재. 제주 양씨들의 강학공간이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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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마을 주민. 김정민 이장(오른쪽)이 마을주민과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 이돈삼

 
영신마을은 양득중과 양한묵이 나고 자란 고장이다. 양득중과 양한묵은 소심재(小心齋)에서 공부했다. 소심재는 마음 씀씀이를 세심하게 하고, 자신을 스스로 지켜 삼가고 조심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양득중의 큰아버지인 소심재 양우회가 1669년에 세웠다. 제주 양씨 문중의 강학공간이다. 소심재에서 공부한 문장가로 양처중과 덕중, 득중, 영중, 수중, 극중, 치중 등 7명을 손가락에 꼽는다. 이른바 '칠중(七中)'이다.


"우리 어렸을 때는 '문간' '문각'이라 불렀습니다. 그때는 그냥 불렀는데, 강학공간이라는 의미였어요. 예나 지금이나 마을의 자랑이고, 소중한 유물입니다." 김정민 영신마을 이장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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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민 영신마을 이장. 마을주민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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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마을 골목. 완도호랑가시나무가 빨간 열매를 매달고 있다. ⓒ 이돈삼

 
양한묵은 이 마을에서 19살 때까지 살았다. 풍산홍씨와 혼인하면서 지금의 나주시 산포면으로 옮겨갔다.

마을에 양한묵 생가가 복원돼 있다. 본채와 별채, 장독대와 우물 등이 배치돼 있다. 양한묵이 갇힌 서대문형무소를 본떠 만든 전시관도 있다. 전시관에서는 양한묵의 흉상, 일대기를 기록한 안내판, 건국훈장 추서문, 민족대표 33인이 모여있는 그림, 독립선언서 사본 등을 보여준다. 양한묵 순국비도 세워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의로운 영신마을 

영신(永信)마을은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에 속한다. 동쪽으로 강진 도암면, 남북으로는 해남 삼산면과 마산면, 서쪽으로 해남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해남의 14개 읍면 가운데 유일하게 바다 없이, 산과 들로만 이뤄진 옥천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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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묵전시관. 양한묵이 순국한 서대문형무소를 본떠 만들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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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묵 순국비. 양한묵 생가 앞마당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영신마을은 조선시대에 '영계'(穎溪, 永溪)로 불렸다. 지금의 마을 이름은 일제강점 때인 1913년에 붙여졌다. 한때 '영신원(永信院)'으로 통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고, 머물고, 묵었다는 반증이다. 그때엔 옥천면의 소재지였다. 1920년대에 면사무소가 영춘리로 옮겨졌다.

영신마을은 만대산(493m)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산이 감싸고, 앞으로는 옥천천과 월평천이 흘렀다. 그 일대가 넓은 들판이다. '한눈에반한쌀'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해남쌀이 나는 땅이다. '한눈에반한쌀'을 가공하는 옥천농협미곡종합처리장이 영신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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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묵생가. 본채와 우물, 장독대가 보인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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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대산이 품고 있는 영신마을 풍경. 돌담이 예쁘게 단장돼 있다. ⓒ 이돈삼

 
영신마을은 오래된 제주 양씨의 집성촌이다. 마을에 양씨 문중의 강학공간인 소심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양득중을 모신 사당 덕촌사도 있다. 덕촌사는 1864년에 지어졌다. 양재진 옛집도 있다.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 남자들이 머물던 소심재가 있다. 안채와 소심재를 나누는 중문간채가 있는 것도 별나다.

"학포 양팽손의 후손들입니다. 양득중의 6대조, 양한묵의 12대조인 학포는 정암 조광조와 함께 도학적 이상사회를 꿈꾼 실천적인 학자였죠. 기묘사화 때 낙향했고, 조광조의 주검을 직접 수습한 분입니다." 양창열 영신역사마을축제 추진위원장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해남군은 양한묵 생가와 전시관, 양득중 사당 등을 연계한 영신역사 체험마을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주민들도 팔을 걷었다. 마을의 환경을 정비하고 빈터에 꽃밭을 만들었다. 지난 12월 8일 전남도청에서 열린 2022청정전남 으뜸마을 성과나눔 대회에서 우수마을로 선정된 것도 마을주민들이 한데 힘을 모은 결과다. 예나 지금이나 의로운 영신마을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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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마을 풍경. 꽃밭이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덕촌양득중 #지강양한묵 #양한묵생가 #해남영신리 #해남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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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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