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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화순탄광 사건'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내년 폐광을 앞둔 화순탄광에 역사관을 세워야 하는 이유

등록 2022.11.22 08:06수정 2022.11.22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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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수업이든, 외부 강의 때든, 도중에 질문을 여럿 받을 때가 강사로서 가장 행복하다. 수강자들이 강의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인 데다 내용을 충실히 이해하고 있다는 방증이어서다. 기존의 자신이 알고 있었던 지식과 강의 내용을 대조해 정리할 수 있어야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모든 질문이 다 반가운 건 아니다. 잘 모르는 내용이 나올라치면 순간 머리가 하얘지거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답변은 한결같다. 정확한 답변을 드릴 수 없으니 메일이나 연락처를 건네주시면 며칠 내로 정리해 보내드리겠다고 말한다. 명색이 24년 경력의 한국사 교사로서, 차마 모른다고 답하기가 민망해서다.

"혹시 '화순탄광 사건'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얼마 전 시민단체 활동가를 대상으로 한 강의 도중 받았던 질문이다. 사건의 이름이 하도 생소해 다시 한번 말씀해주십사 부탁하기도 했다. 화순탄광이 전남 지역의 5.18 민주화운동 사적지여서, 5.18과의 관련성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걸로 여겨 침 튀겨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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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탄광 입구에 세워진 5.18 사적지 표지석. 5.18 당시 이곳에서 시민군은 폭약과 뇌관 등을 실어 갔다. ⓒ 서부원

 
참고로, 화순탄광은 5.18 당시 계엄군이 금남로에서 광주시민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자 시민군들이 전남도청 사수를 위해 폭약과 뇌관 등을 가져온 곳이다. 계엄군에 맞설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할 목적이었다. 그로 인해 계엄군이 쉽사리 도청으로 진입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 화순탄광 정문에는 5.18 사적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1980년 5.18 말고, 해방 직후에 화순탄광의 광부들과 주민들이 집단 학살당했다는 사건 말입니다."

질문하신 분이 도중에 말을 끊었다. 5.18 답사를 인솔하면서 화순탄광을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해방 직후에 그곳에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미군정의 연이은 실정과 친일파 중용 등으로 민심의 이반이 심각했고 전국에서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화순탄광 사건'이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엔 일언반구 언급이 없고, 부러 꺼내 본 빛바랜 대학의 전공 도서를 샅샅이 뒤졌으나 찾을 수 없었다. 미군정 시기의 극심한 혼란을 보여주는 사건으로는 '대구 10월 항쟁'과 '제주 4.3'이 사실상 전부다. 그 두 사건의 원인과 영향에 대한 설명도 수박 겉핥기식이어서 해방 후 3년간의 미군정의 역사는 비어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만시지탄이지만, 질문하신 분의 연락처를 건네받는 것으로 '화순탄광 사건'에 관한 공부가 시작됐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1946년 미군 및 경찰과 화순탄광의 노동자들이 충돌하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라고 짤막하게 소개해 놓았다. 이 설명만으로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검색할 수 있다는 인터넷 포털에서도 A4 한 장 남짓의 분량으로 정리돼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곳에는 사건의 이름이 '화순탄광 파업'이라고 돼 있다. 일자도 천차만별이어서 45년 11월, 46년 8월, 46년 10월 등 당최 종잡을 수조차 없다. 해방 직후부터 수년간 계속 이어진 사건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성싶다.

요약하자면, 해방 후 적산이던 화순탄광을 광부들이 자체적으로 관리해왔는데, 이를 불허하고 미군정에 귀속시켰다. 식량 거래를 자유시장에 맡긴다는 정책을 발표하자 가격이 폭등했고 생활고에 시달린 광부들이 식량 배급제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를 좌익계 노동조합의 정치 투쟁으로 간주한 미군정의 무력 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적산 일체를 미군정의 소유로 규정하자 탄광의 광부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해 대응했다. 특히 적산의 운영에 친일 부역자들을 중용하자 미군정에 대한 반발이 극심해졌고, 노동자와 농민, 학생들까지 시위에 합세했다. 미군정을 등에 업은 경찰은 강경 진압으로 일관했고, 인근 전남 각지에서 좌익계가 주도하는 크고 작은 봉기가 이어졌다.

어디 화순탄광뿐이었으랴. 해방된 식민지의 현실에 대해 무지했던 미군정과 극심한 좌우 대립을 생존의 기회로 삼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와중에 한몫 챙기려는 모리배들에 의한 비극의 역사는 계속됐고, 급기야 남북 분단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터진 것이다. 미군정에 맞섰던 이라면 누구든 '빨갱이'라는 누명을 쓴 채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는 어렵게 됐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해 보인다. 시기로 판단하건대, '화순탄광 사건'은 해방 이후 미군이 우리 국민을 학살한 첫 번째 사건이라는 점. 화순탄광에서 시작된 저항의 불길은 한 달 반 뒤 '대구 10월 항쟁'으로 옮겨붙고, 결국 2년 뒤 바다 건너 제주에서 수만 명이 학살당한 참극의 전조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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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을 사이에 두고 오른편에는 탄광이 왼편에는 마을이 늘어서있다. 두 곳 다 사람이 빠져나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 서부원

 
꼼꼼한 답변을 준비해야 하는 교사로서, 사료가 부족하다고 탓할 수만은 없다. 기록은 없다 해도 공간은 그대로일 테다. 지난 주말, 5.18이 아닌 '화순탄광 사건'을 공부하기 위해 화순탄광을 찾았다. 내년 폐광을 앞둔 탄광 주변은 바람마저 잿빛으로 느껴질 만큼 을씨년스러웠다.

5.18 사적지 표지석이 세워질 당시만 해도 사람 사는 마을 같았는데, 이젠 정문 앞 도로에 오가는 자동차도 보기 힘들다. 건물도 하나같이 낡았고, 간판조차 도색이 벗겨진 채 방치돼 있다. 광부들이 떠난 거뭇한 탈의장과 장화 세척실에는 생뚱맞은 코로나 방역지침만 화사한 컬러 스크린을 통해 방송되고 있었다.

정문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주민도, 경비실의 직원도, '화순탄광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했다. 탄광의 내력을 소개한 자료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탄광의 안과 밖 건물들은 거울을 마주 보는 듯 서로 닮았다.

사람들은 떠났고 텅 빈 건물엔 바람 소리만 사납게 부딪힌다. 탄광에는 '화순탄광 사건'을 떠올릴 수 있는 흔적은 아예 사라지고 없다. 새삼 깨닫지만, 사람이 떠난 공간은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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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종사자 추모비. '노동자'라는 말을 멸칭으로 여긴 탓일까. 종사자라는 말이 어색하게 다가온다. 뒤편에 탄광 사고나 진폐증으로 숨진 이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비가 병풍처럼 세워져 있다. ⓒ 서부원

 
탄광 건너에는 '광산 종사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뒤에 병풍처럼 늘어선 추모비를 지구와 곡괭이를 들고 선 광부의 동상이 수문장처럼 지키고 섰다. 2006년과 2012년에 화순군수가 세우고 개축한 기념물로, 탄광 매몰 사고 등으로 순직한 이들과 진폐증으로 숨진 이들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이곳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 중에 '화순탄광 사건' 관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긴 '노동자'라는 표현을 꺼려 '종사자'라고 적은 추모비에 미군의 총칼에 죽임을 당한 광부들의 이름을 적었을 리 만무하다. 그들은 아직도 '빨갱이'로 낙인찍힌 채 구천을 떠돌고 있을 테다.

추모비를 나와 돌아오는 길, 도로변 키 작은 나무숲 뒤 나란히 세워진 검은 빗돌을 발견했다. 숲에 가려져 있어 하마터면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왕복 2차선 길가에 잠시 주차해놓고 웃자란 잡풀 위를 걸어 들어갔다.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로 지정된 위령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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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된 위령비. 소개글을 적은 비석과 여섯 개의 '순의비'가 키 작은 나무 숲 뒤에 숨어있어 못 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시기적으로 화순탄광 사건과 관련됐을 법한 유일한 흔적이다. ⓒ 서부원

 
위령비에는 '1949년 여순반란사건 이후 빨치산 잔당들에 의해 전사한 군인 2명과 마을 경비 중 학살당한 주민 4명을 추모하기 위한 현충 시설'이라고 적혀있다. 아직도 '여순반란사건'과 '빨치산'으로 적시된 위령비가 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여섯 개의 새뜻한 빗돌마다 '순의(殉義)'라는 두 글자가 유독 도드라진다. 정의를 위해 목숨 바쳤다는 뜻이다.

시기적으로 '화순탄광 사건'과 관련됐을 법한 유일한 흔적이다. 유족들의 증언과 일부 사료에 의하면, 미군에 의해 학살된 이들의 자녀가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꺼이 '산 사람'이 되었고, 이들이 '빨치산'의 원조라고 한다. 이들을 일컬어 '화탄(화순탄광) 유격대'라고 부른다.

이들은 당시 북한의 지령을 받았거나 노동조합의 강령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저 부모를 죽인 미군에 대한 원한에 기인한 자생적 무장 조직이었던 셈이다. 여섯 위령비 속 인물들은 6.25 전쟁으로 몰살당하기 전 '화탄 유격대'의 공격을 받은 군인과 주민이 아니었을까. 저들을 '정의'와 '불의'로 양단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황당한 내용일지언정 이 위령비라도 만났으니 망정이지 빈손으로 돌아갈 뻔했다. 이 외지고 쇠락한 화순탄광에 참혹했던 우리 현대사의 자취가 서려 있다는 게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다. 내년에 폐광되고 나면 아예 일말의 흔적조차 사라지지 않을지 걱정된다. 증언해줄 사람은 세상을 떠나고 애써 기억하려는 사람도 없다.

질문을 던진 그분께 보낼 답변을 정리하면서 스스로 다짐하게 된다. 폐광 후 화순탄광의 활용 방안을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다는데, 부디 5.18과 더불어 '화순탄광 사건'을 기억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도록 힘을 보태야겠다. 아울러, 미군정 시기의 감춰진 역사를 공부하는 데에 더 발품을 팔 요량이다. 한국사 교사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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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8월 15일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해 광주로 넘어가던 고갯길인 너릿재 옛길 풍경. 이곳에서 미군과 경찰이 쏜 총에 수십 명의 노동자가 학살됐다고 한다. 5.18 당시에도 광주를 오가던 화순군민들이 집단 학살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5.18 사적지 표지석과 함께, 바르게 살자 비석, 효도권장비, 백세청풍비에 이르기까지 온갖 기념비가 어지러이 세워져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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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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