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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 참사' 뒤 나온 서울시 대책, 실효성 있으려면

[주장] 지하방 등 지·옥·고에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중장기 대책이 필요하다

등록 2022.08.11 10:29수정 2022.08.1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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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한 빌라 반지하방이 침수되면서 일가족 3명이 사망했다. 9일 오전까지 물이 빠지지 읺아 반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물이 가득 차 있다. ⓒ 권우성

 
20대 때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한 명은 본가가 지방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직장을 잡으면서 서울로 이사하게 됐다. 당시 가진 게 별로 없던 친구가 구한 방은 서울 방배동에 위치한 한 다세대주택 반지하였다. 

반지하라고는 하지만 햇볕이 좀체 들지 않는 방이었다. 친구는 불을 끄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라 너무 무섭다며 늘 불을 켜놓고 잠을 청하곤 했다. 반지하의 구조상, 화장실이 방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다. 나이 서른이 넘을 때까지 그 친구는 자력으로 그 방을 나가지 못했다. 

나는 2000년대 대학을 다녔다. 그 시절 본가가 지방인 친구들이 내심 부러웠다. 학교를 핑계로 자연스레 독립할 수 있었으니까. 나는 부모로부터 늘 독립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학교도 직장도 집도 모두 수도권이었기에 통학이 가능했고, 독립의 명분이 없었다. 그 시절은 그래도 지금과는 다르게 하숙이든 자취든 한 가정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안에 있었다. 

요즘은 사정이 다른 것 같다. 아마 내가 지금 20대였다면 아무리 독립을 갈망한다 해도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을 부러워하진 않을 것 같다. 요즘 지방에서 온 아이들이 소위 인서울 대학에 붙어 이주를 하면 대부분 가는 곳은 지하방, 옥탑방, 고시원이라고 한다. 
  
서울의 집값은 이제 평범한 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 수도권이 본가라 대학도 직장도 오갈 수 있는 이들과, 지방이 본가라 20대 초반 시작부터 빚으로 보증금을 내고 월급을 쪼개 월세를 내는 이들의 미래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서울, 안정적으로 거주하기 힘든 땅

결혼한 뒤 섬으로 이주해 살고 있는 나는 이따금 내 자녀들이 훌쩍 자란 먼 훗날을 그려보곤 한다. 미래엔 학교나 직장 문제로 아이들이 서울로 이주해 살아갈 수도 있다. 그때 아이들은 어디에서 살아야 할까. 아이들의 생활비는 우리 가족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일까.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아찔해진다.

언제부터인가 서울은 누군가에게는 안정적 거주를 꿈꿀 수조차 없는 땅이 됐다. 그럼에도 서울에 살아야만 하는 이들은 어디로 갈까. 역시 지하방이나 옥탑방 그리고 고시원이다. 사람들은 이 셋을 합쳐 '지·옥·고'라고 부른다. 


반지하는 취약한 치안과 사생활 노출 등의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이곳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보금자리가 돼주고 있다. 옥탑방은 전망은 좋을지 모르나 역시 단열, 치안 등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고시원은 그 이름과는 달리 고시를 준비하던 이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도시 하층민의 거주지로 의미가 바뀐 지 오래다.

최근 쏟아진 폭우로 반지하에 살던 이들이 사망했다. 안타까운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처럼 마음 아파했다. 시간당 100mm가 넘는 집중호우와 순식간에 불어난 물은, 이들의 반지하방 탈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주변 이웃들이 도우려곤 했지만, 결과적으로 반지하 공간에서 속수무책으로 갇힌 이들을 도울 수는 없었다.

매번 비슷한 지역서 물난리 되풀이... 중장기 대책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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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한 빌라 반지하방이 침수되면서 일가족 3명이 사망했다. 9일 오전 참사가 발생한 빌라의 침수된 주차장 입구쪽 모습. ⓒ 권우성

 
서울시는 폭우 대책으로 지하, 반지하의 '주거 목적의 용도'를 전면 불허하도록 하는 건축법 개정을 정부에 건의한다고 밝혔다. 건축법 11조에는 상습적으로 침수되거나 침수가 우려되는 지역에 건축하려는 건축물의 지하층 등 일부 공간을 주거용으로 사용하거나 거실을 설치하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인정되면 시 건축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허가를 내주지 않을 수 있다는 근거 규정이 있다. 

이는 지난 2010년 집중호우가 발생해 저지대 주택가의 인명, 재산 피해가 잇따르자 서울시가 법 개정을 건의한 결과다. 2012년부터 이러한 조항이 시행됐지만 그 이후에도 지하, 반지하 주택은 4만 호 이상 건설된 것으로 파악된다. 

서울시는 이번에 아예 사람이 살 수 없도록 규제를 강화하겠다는 방침이다. 기존에 허가된 지하, 반지하 건축물에 10~20년의 유예 기간을 주고 순차적으로 없앤다고 밝혔다. 이곳에 거주하던 세입자들에게는 '주거상향 사업'을 통해 공공임대 주택 입주를 지원하거나 주거바우처 등을 제공한다고 한다.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시에만 2020년 기준 지하·반지하 주택은 전체 가구의 5% 수준인 약 20만 호 정도에 이른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지하나 반지하가 좋아서 거주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들이 가진 돈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그곳이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게 아닐까.

지·옥·고에 살아도 교통비, 식비, 월세 등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이들이 많다. 조금 더 번듯한 보금자리를 위해 '억소리' 나는 보증금을 마련하고 싶어도, 그걸 마련하는 데 몇 년이 걸릴 지 알 수가 없다. 

서울시는 법 개정을 통해 유예 기간을 두고 지원책을 마련한다고는 하나, 과연 이들이 실질적으로 성공적인 이주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일단 대상 인원이  많아 실효성이 떨어진다. 서울은 넓다. 위치 등 조건면에서 각자가 원하는 기준에 맞는 곳을 배정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일 것이다.

나아가 이번 폭우로 인해 발생한 인명피해는 단순히 저지대, 지하라는 고도 문제에서만 비롯되지 않았다. 기록적인 폭우가 예고돼 있는데도 침수피해 예상 동네에 대피 방송 한 번 없었던 점, 상습적인 침수구역인 데다 언제든 집중호우가 내릴 수 있는 계절인데도 선제적으로 종합적인 하수처리 시설 보완이나 점검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 등 다양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이번에 물난리를 겪은 지역은 이전에도 침수 피해가 있었던 곳이다. 기후 위기로 인해 언제든 이번과 같은 혹은 더 심한 자연재해가 닥칠 수 있다. 이를 대비한 장단기 종합 대책이 필요한 이유다. 그 대책 안에는, 서울에 살아야 하지만 선택지가 지옥고 밖에 없을 이들을 끌어안는 현실적인 정책도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단순히 지하방에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게 대안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런 정책들이 완비돼야 서울이라는 도시를 여전히 기회의 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 나라의 수도인 서울이 소위 가진 자만이 안전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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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밤 폭우로 인해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빌라 반지하에 살던 모녀(47, 13)와 발달장애인(48) 세 식구가 숨졌다. 9일 반지하 집 앞에 널브러져있던 토끼 인형. ⓒ 김성욱

#폭우 #지하방 #옥탑방 #고시원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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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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