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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냈지만, 사람이 좋아졌습니다

[리뷰] 김남희 지음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록 2022.07.21 14:20수정 2022.07.2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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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꼭 십오 년 만에 운전대를 잡았다. 예전에도 면허증만 땄을 뿐 운전을 한 적은 없으니 그야말로 '찐' 초보다. 사설 연수도 받았지만 영 자신감이 붙지 않았다. 운전을 하기 전엔 화장실을 수시로 들락거리는 건 기본. 티셔츠까지 뒤집어 입고 나가며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 날, 차 사고가 났다

드디어 '감'이라는 게 생긴 것 같다며 의기양양해진 어느 날, 사고를 내고 말았다. 공사로 인해 도로가 없어진 상황에서 무리하게 차선 변경을 시도하다 앞차를 들이받은 것이다. 영락없는 내 잘못이었다. 교통사고 중 백 퍼센트 일방 과실인 경우는 드물다는데 그 어렵다는 일을 내가 해냈다.

순식간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운전 경력이 짧고 사고를 수습해 본 경험도 없는 나는 벌벌 떨며 차에서 내렸다. 

놀랍게도, 상대 차주는 무척 친절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화내거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우선  내 걱정을 먼저 해주신 것만은 분명하다. 덕분에 차분히 보험사에 전화하는 등 정신을 차리고 수습을 할 수 있었다. 필요한 조치들을 취한 뒤, 곧 나 혼자 남게 되었다. 

문제는 끝이 아니었다. 도로 상황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한쪽으로 차를 옮기려는데, 내 차의 범퍼가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도 아니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질질 끌고 차를 몰면 위험할 것 같고, 그렇다고 힘으로 뚝 떼는 것도 일을 키우는 게 아닐까 싶어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나타난 행인 한 분이 내게 차에 타라고 손짓했다.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닌데도 나는 그 말을 냉큼 알아듣고 얼른 운전석에 앉았다. 곧이어 그는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범퍼를 번쩍 들었고 손으로 '오라이, 오라이' 표시를 하며 내게 신호를 주었다. 덕분에 나는 차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내리자마자 '감사합니다!' 큰 소리로 외쳤지만 그는 이미 갈 길을 유유히 가고 있었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몇 번이고 더 고맙습니다, 말했을 뿐. 딱히 보답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척 아쉬웠다. 그날의 사고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생각보다 다정한 세상

김남희 작가의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를 보며 내가 타인의 호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호의를 주고받는 일은 동화 속 이야기만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생각보다 무척 다정한 곳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돌이켜보면 이토록 오래 여행을 해왔는데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건 그런 사소한 것들이다. 타인의 호의에 무심코 기대었던 순간. 누군가를 완전히 믿어버렸던 찰나. 잠시 벌어진 그 틈 사이로 스며든 번개 같은 공감과 소통. 그런 일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내 삶을 이루었다."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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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책표지 ⓒ 문학동네

 

여행 작가로서 살아온 저자는 코로나로 인해 발목이 묶이게 된 뒤, 막막한 순간을 맞이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호의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길이 열리고 그녀의 직업도, 인생도 더욱 충만해지게 되었다고. 그 진솔한 고백 덕분에 나 역시 내 경험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무례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잔뜩 눈살을 찌푸리는 나이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좋은 기억들이 더 많다. 며칠 전엔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할 수 없어 맞으며 걷고 있는데, 낯선 여인이 다가와 우산을 손에 쥐어 주었다. 이럴 때마다 매번 다짐한다. 내가 받은 것들을 보답하며 살겠다고.
 
"코로나가 내게 일깨워 준 건 나는 타인의 온기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혼자 살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그건 일상의 공간을 혼자 점유한다는 것일 뿐. 사람에게 기대어 살아야만 했다." (144쪽)

일흔여덟의 나이에 십 킬로미터 마라톤을 시작했다는 저자의 어머니 이야기도 인상 깊다. 점점 더 기록은 하향 경신되고 있고 심지어 꼴찌를 하는 날도 있지만, 그녀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계속해 대회에 출전 중이라고 한다.

늦어도 괜찮다

마흔 넘어 운전을 시작한 것이 너무 늦은 것 같다고, 이쯤에서 포기할까 잠시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늦은 지 이른지는 상대적인 개념일뿐더러, 설령 좀 늦었으면 또 어떻단 말인가. 

여전히 초보운전을 벗어나지 못한 나는 도로가 무서울 때가 많다. 그때마다 되새길 일이다. 도로 위 운전자들 역시 다정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걸 믿고 뻔뻔한 무법자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하며 사람을 믿겠다는 것이다. 괜한 겁은 고이 접어두고 나는 오늘도 조심스럽게 도로 위에 나서본다.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김남희 (지은이),
문학동네, 2021


#호의는거절하지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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