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들 잔치를 내 잔치인 것처럼 살았죠"

포항전집 김영자씨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

등록 2022.03.30 10:15수정 2022.03.3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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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간 포항 전집을 지켜온 김영자씨가 오늘도 파전을 굽고 있다. ⓒ 경북매일 자료사진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있었다.


유교적 전통이 여전한 20세기 영남이나 호남의 어느 도시. 카메라는 기와가 근사한 한옥을 훑어간다. 젊은 며느리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밤늦게까지 제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마침내 자정이 가까워서야 시작된 제사.

그러나, 며칠을 제수(祭需) 준비부터 요리까지 하느라 고생한 며느리는 제사상 근처에도 가질 못한다. 부엌에서 초조한 얼굴로 서성일뿐. 그것만이 아니다. 시어머니에게 야단까지 맞는다.

"너는 생선을 이렇게 이렇게밖에 못 굽니. 나물은 또 이게 뭐냐? 너무 오래 데쳤잖아."

세상의 변화 속도는 빠르다. 2022년 현재. 이런 풍경은 TV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촌극'에 가깝지 않을까?

경북 포항 죽도시장에서 15년 넘게 '포항 전집'을 운영하고 있는 김영자(64)씨는 요즘 고부(姑婦)들이 장보는 모습을 궁금해하는 내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다정하게 함께 와서 튀김과 전은 어떤 걸 선택하고, 문어는 얼마만 한 걸 구입하고, 탕국은 어느 정도 양으로 할지 의논해서 주문합니다. 옛날 하곤 전혀 다르죠. 요즘엔 직업을 가진 여자들이 대부분이잖아요. 게다가 며느리 타박하는 무서운 시어머니도 이젠 대부분 사라졌어요."

폐백, 돌잔치, 제사까지... 수십 가지 음식 만들며

포항 전집에서 만들어지는 음식은 20가지가 넘는다. 옥호는 '전(煎)집'이지만, 단순히 전만 부쳐 내는 건 아니다.

폐백 음식, 돌잔치 음식, 제사 음식, 이바지 음식까지. 기념할만한 날에 사용될 대부분의 음식을 만든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다. 죽도시장 한편에 자리한 포항 전집에 들어서면 예전 시골 잔칫집 마당에 넘쳐나던 음식 냄새가 그대로 풍겨온다. 유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농담 섞어 말하자면 김씨는 남의 집 잔칫상과 차례상을 대신 차려주느라 정작 자신은 설과 추석에도 쉬어본 적이 없다. 어떻게 보면 쉽지 않은 직업이다.

- 남들 쉴 때 더 바쁘다. 힘들지 않나.
"세상에 자기 마음에 꼭 드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이걸 하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키웠다. 가게를 찾아주는 손님들 모두가 귀하다. 특히 '음식이 참 맛있다'는 말을 들으면 새벽부터 나와 전 부치고, 닭 삶으며 흘린 땀이 웃음과 함께 식는다."

- 15년 내내 한여름에도 뜨거운 철판 앞에서 요리하며 살았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가끔 힘에 부친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젊어서부터 남에게 싫은 소리는 듣지 말고 살자는 나름의 원칙을 가졌다. 일을 하는 동안은 가게를 찾는 사람들에게 음식이나 응대에 대해 싫은 소리 듣지 않고 살려고 한다. 정 바쁘면 큰딸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그런다."

- 가벼운 질문 하나 하자. '맛있는 전'을 만드는 노하우가 있는지.
"특별한 비결이나 그런 건 없다. (웃음) 신선하고 좋은 고기와 채소로 금방 부쳐낸 전이 가장 맛있다. 만약 식감이 퍼석하거나 물컹하다면 그건 재료가 좋지 않았거나, 만든 지 오래된 것이다. 전과 튀김은 요리할 때 기름 온도도 중요하다. 그것 정도만 신경 쓰면 누구나 맛있는 전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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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 생선을 찾는 손님을 응대하는 김영자 씨. ⓒ 경북매일 자료사진

 
'이바지 음식'이 최고가... 300만 원짜리도

일상적으로 대하는 밥상이나 술상과 달리 사람이 일생에 한 번 밖에 못 받아보는 '상'이 있다. 돌잔치 상이 그렇고, 폐백 음식과 이바지 음식이 차려지는 상이 그렇다.
이바지 음식은 혼례를 전후로 신부 쪽에서 신랑 집으로 보내는 음식을 뜻한다. 예의와 정성이 담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만드는 비용도 만만찮다.

"과일, 떡, 해산물, 고기 등등을 격식에 맞게 차려내는 이바지 음식은 그걸 보내는 고객의 마음을 생각해 나 역시 정성을 다해 만든다. 수십 가지 음식이 준비되고, 시간도 오래 걸리니 보통으로 해도 100만 원 이상이다. 그때그때 식재료의 가격에 따라 다르지만, 내가 만들어본 최고가의 이바지 음식은 300만 원짜리였다."

장사를 하는 사람의 기본은 큰손님만이 아닌 작은 양을 구입하는 손님도 차별 없이 대해야 하는 것 아닐까? 김영자씨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인터뷰가 진행될 때 손님 한 명이 포항 전집을 찾았다. 나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반갑게 고객을 맞은 김씨는 튀김 5천 원어치를 팔면서도 깍듯하고 다정했다.

- 포항 전집의 주요 고객은 어떤 사람들인가.
"딱히 어떤 분들이 자주 온다고 말하기는 그렇다. 나이 든 사람도 있고, 젊은 주부들도 주문을 많이 한다. 고부가 함께 오는 경우도 있다. 무속인들도 상을 차리기 위해 방문한다."

- 인터넷을 통한 주문이 늘어나는 추세인데.
"우리 가게도 전화 주문은 물론, 인터넷으로도 주문을 받는다. 시대가 바뀌니 거기에 맞춰가는 것이다. 나는 인터넷 사용이 서툴지만 딸이 도와준다. 대형 마트와 인터넷 쇼핑몰이 전통시장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지만, 사실 이 문제를 극복할 뾰족한 방법은 없다. 찾아오는 손님에게 더욱 잘 하는 것으로 단골을 만들고, 단골이 입소문을 내주면 이렇게 또 가게를 유지하며 장사를 할 수 있지 않겠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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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받거나 판매할 전을 정리하는 김영자 씨. ⓒ 경북매일 자료사진

 
어쨌거나 고생스러운 일, 딸은 다른 직업 가졌으면

지난해 겨울부터 올봄까지 매주 재래시장 상인들과 만나며 느낀 게 있다. 음식 장사를 하는 이들은 일종의 '사명감' 같은 걸 가진 듯했다.

'돈 주고 사먹는 걸 함부로 만들어선 안 된다'는 공통된 태도를 그들에게서 본 것이다. 김영자씨도 다르지 않았다.

"손님으로부터 '이거 어제 구운 전 아니냐'라는 말을 들으면 종일 기분이 우울하다"는 그녀는 "며칠 전에 먹어보고 맛있어서 또 왔어요"라는 소리에 돈보다 더 귀한 보람을 얻는다고 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지만 추우나 더우나 하루 12시간 이상을 불 앞에서 전을 뒤집고, 기름 끓는 솥에서 튀김을 건져내고, 만들어진 음식을 정갈하게 담아내는 건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지극히 어렵고 힘든 일일 터. 그래서일 것이다. 아래와 같은 대답이 나온 것은.

- 가끔 일을 돕는다는 딸에게 가게를 물려줄 생각은 없는지.
"아니다. 고생스러운 건 나 하나로 족하다. 매일 불판 앞에서 가스 냄새 맡고 사는 딸의 모습을 보기 힘들 것 같다. 그래서 딸이 원한다고 해도 내가 말릴 생각이다. 또 하나, 만약 딸이 장사를 한다면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나. 얼마 후면 일흔이다. 그때까지만 일하고 나도 내 시간과 여유를 가지며 살고 싶다."

과장과 숨김이 없는 사람. 1시간 남짓 만남을 가지며 든 생각이다. 그런 김영자씨의 정직한 어법은 식재료를 고르고,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릴 때의 태도로 자연스레 이어지지 않을까?

20년 가까운 세월, 남의 잔칫상을 자신의 잔칫상을 차리는 심정으로 만들어온 사람. 그러니, 적당한 때가 되면 편하게 쉬어야 마땅하다. 그래서다. 일흔 살이 되면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김씨의 꿈을 나 역시 응원한다.

스스로 정한 김영자씨의 정년퇴직이 이제 5~6년쯤 남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포항 전집 파전과 오징어튀김, 영남 제사상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할 돔배기 구이 맛은 변함없을 테니 단골들은 미리 걱정하진 마시길.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죽도시장 #포항 전집 #이바지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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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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