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올림픽은 끝났지만, '안경선배'가 남았다

[운동하는 여자 ④] 성차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올림픽, 그중에서 빛난 우리의 '언니들'

등록 2018.02.26 17:29수정 2018.04.1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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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평창의 마지막 밤 25일 오후 강원도 평창올림픽스타디움에서 2018 평창동계올림픽 폐막 공연이 열리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올림픽이 최고의 구경거리였던 시절이 있었다. 유튜브도 넥플렉스도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초등학생이던 나에게는 올림픽 스크랩북을 만들라는 숙제가 주어졌다. 숙제를 잘하겠다는 핑계로 개회식부터 거의 매일, 엄청나게 집중해서 텔레비전을 봤다. 그래서일까,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성화의 마지막 주자가 활을 쏘고 불씨가 크게 타오르던 장면이 뇌 어딘가에 단단히 박힌 것 같다. 그 뒤로도 수많은 개회식을 봤지만 그 장면만 유독 생생한 걸 보면 말이다.

그렇게 개회식이 열리면 약 2주간 집집마다 비슷한 풍경이 연출된다. 작은 텔레비전을 두고 식구들이 전부 모인다. 중계 현장에서 캐스터와 해설가가 숨가쁘게 말을 이어간다. 안방에서는 어른들이 훈수를 두느라 바쁘다. '예쁘다, 못생겼다, 날씬하다, 선수하기엔 살이 너무 쪘다, 역시 백인은 타고난 게 다르다. 잘하는데 흑인이라서 무섭다.' 등등. 평화와 평등의 정신을 무시하면서 성차별적, 인종차별적인 표현이 난무하는, 승부보다 더 치열한 품평회가 열린다.

그런 어른들 틈에서 올림픽을 즐겼다. 정확히 말하면 가볍고 팔랑거리고 인형처럼 예쁜 선수들, 살아 움직이는 '올림픽 바비'들을 선망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경기장에서 돋보일 뿐만 아니라 '각국의 미녀 선수'라는 타이틀의 기사로 신문에 오르내렸고 안방 품평회에서도 후한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바비'로 호명되는 이들은 대체로 기술보다 예술성, 힘보다 유연성을 내세우는 종목, 혹은 노출이 많은 유니폼을 의무적으로 입는 종목에 출전하는 선수들이었다. 체조와 싱크로나이즈드, 비치 발리볼과 피겨 경기를 열심히 시청하면 어김 없이 이런 여성들이 나타났다.

평등·평화와 거리가 멀었던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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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컬링 대표 알렉산드르 크루셸니츠키의 도핑 의혹을 보도하는 BBC 뉴스 갈무리. ⓒ BBC


그러나 순진했던 시절을 벗어나면서, 올림픽이 화합과 상생, 평등과 평화라는 올림픽 정신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도리어 올림픽은 강대국 간의 파워게임이었다. 선수들의 약물 문제가 거론됐고, IOC가 부정부패 의혹에 휩싸이는 경우도 많았다. 대회 안팎에서 드러나는 성차별적인 특성도 무시할 수 없다.

'올림픽의 꽃'이라고 불리고 주로 여성 선수들이 활약했던 종목, 앞서 말한 바비들의 종목을 둘러싼 논란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특히 체조의 경우, 너무 어린 선수들을 데려다가 혹사시킨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중력을 거스르는 움직임이 많은 종목의 특성상 체구가 작고 가벼운 사춘기 이전의 소녀들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1992년 스페인 올림픽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상위 두 선수는 나이 15세, 키 137센티 몸무게는 31.5킬로그램 가량이었다고 한다. 가혹한 훈련과 다이어트가 어린 소녀들의 근육과 골격 발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 힘을 얻은 다음에야 겨우 연령 제한 규정이 생겼다. 1981년에 만 15세, 1997년에는 만 16세가 되지 않은 여성은 대회에 참가할 수 없게 됐는데 그러자 선수들 사이에서 나이 속이기가 횡행했다.


동계 올림픽 최고의 인기 종목인 피겨 스케이팅 또한 무리한 체중 감량 때문에 우려를 산다. 점프가 주된 기술인 이 종목도 체중이 가벼울수록 기술적이고 우아한 연기를 선보일 수 있다. 그로 인해서 수많은 선수들이 섭식장애와 우울증에 시달린다. 운동에 있어서 프로페셔널한 여성들이 보통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혹독하게 나이와 체중의 억압 속에서 훈련을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외에도 오직 여성 선수들만이 출전하는 종목이 따로 있다. 체조 가운데 리듬체조가 그렇고 싱크로나이즈드 또한 여성부 경기만 치러진다. 마치 물 속에서 무용을 하는 것 같은 싱크로나이즈드는 최근에 와서야 남성 선수들도 참가하고 있다. 하지만 올림픽에서는 남성부 경기가 열리지 않는다.

반대로 여성 선수가 배제됐던 종목도 있는데 바로 레슬링과 권투다. 여자 레슬링은 2004년부터, 여자 권투는 2012년에서야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총 3개의 금메달이 달려있는 노르딕 복합도 남성 선수만 출전하는 종목이며 스키점프 역시 2010년까지는 남성 종목이었다. 이렇게 성별에 따라서 참가가 제한되는 종목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봐도 올림픽의 성차별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사실 올림픽은 기원부터가 대단히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이벤트다. 고대 올림픽은 여성은 참가는 물론 관전조차 허락되지 않았고 그리스인을 제외한 외국인 역시 참가할 수 없었다. 오직 그리스인 남성에게만 참가 자격이 주어졌다.

그래서인지 대회 진행에 필요한 의전에 있어서도 성차별적인 요소가 자주 목격된다. 의전에는 미소로 분위기를 온화하게 만들고 적당히 아름다워서 시선을 끄는 존재가 빠지지 않는데 그게 바로 도우미다. 심지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시상식을 진행할 도우미를 선발하면서 '문신이 없어야 한다', '귀걸이를 하지 말아야 한다', '엉덩이가 날씬해야 한다'는 항목이 있어 비난을 샀다. 이런 논란 덕분에 2012 런던 올림픽 시상식에서는 여성 도우미 대신 전원 남성으로 이뤄진 도우미가 최초로 등장했다.

응원 또한 의전과 같이 여성이 도맡아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영역이다. 남한 언론은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부터 여성으로 꾸려진 북한 응원단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급기야 언론의 보도 행태가 도마에 올랐다. 취재를 명목으로 화장실 안으로 따라 들어가거나 불법으로 숙소 내부를 촬영한 것은 대회의 오점으로 남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을 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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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선수가 18일 오후 강원도 강릉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미터에서 경기를 마치고 기록을 기다리는 동안 먼저 경기를 마친 일본 고다이라 선수가 다가와 손을 잡고 있다. ⓒ 이희훈


아이러니하지만 그럼에도 평창 올림픽은, 유달리 멋진 여성 선수들이 약진했던 무대로 기억될 것 같다. 평창 올림픽에는 인상적인 여성 선수들이 많았다. 앞선 경기에서 실격당한 적 있는 동료를 위로하며 계주에서 우승한 쇼트트랙 선수들, 국적과 성적을 뛰어 넘은 우정을 보여준 이상화 선수와 고다이라 선수, 단일팀 감독을 맡고 첫 득점에 성공한 뒤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렸던 새라 머레이 감독, 개회식에서 다시 한 번 아름다운 연기를 보여준 김연아 선수까지.

개중에서 가장 돋보인 선수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여성 컬림팀 '팀 킴'이다. 이들의 등장은 좋은 의미로 충격적인데, 왜냐하면 이들이야말로 한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유형의 여성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여성 선수들은 경이로운 기교를 보여주거나 강인한 체력과 운동성을 추구하거나 하는, 두 가지 부류 중 하나로만 존재했다.

그런데 팀 킴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들은 평범해 보이지만 비범하고 정적인 것 같지만 배짱 있고 속내를 알 수 없는데 열정적이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서로를 믿고 이기고자 하는 갈망으로 똘똘 뭉쳤다. 그래서 은정, 영미 같은 누군가의 친구, 언니, 동생의 이름을 가진 20대 여성들이 만든 기적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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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컬링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왼쪽부터) 김선영, 김초희, 김경애, 김영미, 김은정 선수가 25일 오후 강원도 강릉 컬링센터에서 경기후 기자회견을 마치고 메달을 들고 있다. ⓒ 이희훈


그리고 팬들은 컬링이라는 낯선 종목의 진가를 발견했다. 화려하지 않지만 정교하고 몸싸움 없이도 (그래서 김은정 선수는 안경을 낄 수 있었다) 긴장과 재미가 넘치는 운동이 있음을 이제야 안 것이다. 팬들은 팀 킴이 출전한 총 27번의 경기를 마음껏 즐겼고 올림픽이 끝나면 컬링 경기를 볼 수 없음에 아쉬워 한다.

무수한 비판이 따르고 인기가 예전만 못할지라도, 올림픽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올림픽이 새롭고 다양한 스타일의 여성 선수들이 등장하는 무대가 되기를 바란다. 이 거대한 이벤트가 한 번 열릴 때마다 세계 인구의 약 70%, 47억 명이 적어도 한 경기는 보게 된다고 한다. 그때마다 수많은 여자 아이들이 꿈을 키울 텐데, 그 꿈이 고작 한두 가지로 한정될 이유가 전혀 없다. 여성 선수들의 영향력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들은 스포츠의 역사를 새로 쓰고 누군가가 꾸는 꿈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참고도서: 올 어바웃 올림픽 데이비드 골드블랫, 조니 액턴 지음 문은실 옮김(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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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결승전, 서로 격려하는 '팀 킴' 25일 오전 스웨덴과 힘겨운 결승전을 치른 여자 컬링 선수들이 서로를 감싸주고 있다. 이 경기에서 한국팀은 3대 8로 져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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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애플힙'은 박수치면서, '승모근'은 보기 싫다니
② '주먹대장' 그녀, 34초 만에 세상을 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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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페미니즘 #평창올림픽 #스포츠 #운동하는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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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는 여자>를 썼습니다. 한겨레ESC '오늘하루운동', 오마이뉴스 '한 솔로', 여성신문 '운동사이' 연재 중입니다. 노는 거 다음으로 쓰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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