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대장' 그녀, 34초 만에 세상을 홀리다

[운동하는 여자 ②] '격투기 영웅' 혹은 '꼴보기 싫은 여자'... 론다 로우지를 둘러싼 시선

등록 2018.01.27 20:25수정 2018.04.1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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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에 들어서는 론다 로우지. ⓒ SPO TV


단 34초 만에 누군가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선사하는 게 가능할까? 나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유능한 여성을 알고 있다. 때는 2015년 8월 2일이었고 모든 일이 34초 만에 이뤄지고 끝이 났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엄청난 환호와 함성은 끊이지 않았다.

이토록 화려한 순간의 주인공은 론다 로우지. 베티 코헤이아를 상대로 치른 6차 타이틀 방어전의 결과는 1회 KO승이었다. 한국 언론이 붙여준 별명이자 그의 자서전 한국어 번역판의 제목이기도 한 'UFC 여제(女帝)'라는 타이틀이 빛을 발했다.

론다 로우지가 출전하는 경기의 구경거리는 케이지 밖에서부터 시작된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는 로우지는 두 눈을 과장되게 부릅뜨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약간 휘청거린다. 그날 그는 평소보다 더 분노한 것 같았다. 분노를 질료로 인간의 형상으로 빚어내면 그게 바로 론다 로우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분노의 록스타, 넘치는 테스토스테론!

조금은 코믹하기도 한 이 의식에는 이기고 말겠다는 자기 암시, 적을 향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데 이는 그가 열한 살 때부터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를 꿈꾸며 훈련하는 과정에서 익힌 습관이기도 하다. 세계 유도 선수권대회의 챔피언인 로우지의 어머니는 그가 아주 어릴 때부터 경기 전에 잡담하거나 장난을 치지 말고 '이길 생각부터 하라'고 가르쳤다. 

케이지 안에 들어서면 그는 더욱 분노한다. 론다 로우지는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심판의 사인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경기가 시작되고 론다 로우지는 힘과 용기를 앞세워 무섭게 달려든다. 로우지가 휘두른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얼굴을 집중적으로 가격당한 베티 코헤이아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 장면은 로우지의 파괴력을 널리 알리기에 충분했고 지금까지도 거듭 회자된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똑똑히 보았다. 무자비한 챔피언이 이미 나가떨어진 상대를 한 대만 더, 정말이지 한 대만 더 내려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하는 것을. 그는 심판의 사인을 보고 승리를 확인한 다음에야 겨우 멈췄고 마우스피스를 뱉으며 악당처럼 웃었다. 

'마음껏 분노하는 여성', 그토록 반가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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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기 영웅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고 낙담할 즈음에 론다 로우지가 등장했다. ⓒ pixabay


론다 로우지가 등장하기 전까지 나는 이른바 '세기의 대결'이라 불리는 경기를 지켜봤지만 도저히 이입하고 응원할 대상을 찾을 수 없었다. 경기장의 여성들은 모두 들러리에 불과했다. 싸움의 전리품이라도 되는 듯 몸을 전시하는 라운드걸과 차려입은 채로 남자친구와 나란히 앉아 있는 셀럽을 보면서 알 수 없는 굴욕을 느꼈다. '격투기 영웅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고 낙담할 즈음에 론다 로우지가 등장했다.

나에게 론다 로우지는 '처음의 다관왕'이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우선 그는 여성 UFC의 포문을 연 장본인이자 케이지를 지배하는 주인공이었다. UFC에서 여성부 경기를 볼 일은 없을 것이라고 딱 잘랐던 UFC 대표 데이나 화이트는 오로지 론다 로우지의 스타성을 믿고 여성부를 창설했다.

로우지는 수많은 팬을 끌어모으며 여성 UFC의 상징이 됐고 그를 필두로 여성 선수들의 기량이 전반적으로 향상됐다. 이러한 공로는 여성 선수에게도 남성 선수와 동일한 상금을 달라고 투쟁하며 성 대결까지 불사했던 테니스 천재 빌리 진 킹의 그것과 견줄 만하다.

이런 뒷배경을 모르더라도 론다 로우지의 격투 스타일은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구석이 있다. 한마디로 그렇게 싸우는 여성은 처음이었다. 특히 그가 힘을 내세우는 선수라는 점, 육중한 근육질 체형을 갖춘 점이 좋았다. 이제 막 태어난 새끼오리에게 각인된 어미의 모습처럼 이 타고난 싸움꾼의 강렬한 이미지는 지워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론다 로우지처럼 분노하는 여성은 처음이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분노는 남성의 전유물이다. 남성이 감정을 드러내도 좋을 때는 오직 분노했을 때 뿐이다. 반대로 여성이 감정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관대하기 이를 데 없는 가부장제가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감정이 바로 분노다.

물론 여성들도 분노하긴 한다. 하지만 뒤에서 저주를 내리거나 스스로를 파괴하는 등, 굴절된 방식으로 표출되기 쉽다. 억압으로 인해서 있는 그대로의 분노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할로윈데이에 론다 로우지 분장을 했던 미국의 소녀들이 선망한 것은 '분노할 줄 아는 여성의 아이콘'일 것이다.

그런데 론다 로우지로 인해서 시작된 이 낯선 변화가 남성들에게는 거의 반사적인 거부반응을 일으켰나 보다. 로우지는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샀지만 특히 남성들에게 미움받았다. 실제로 남성들이 있는 자리에서 론다 로우지를 화제로 삼으면 다양한 유형의 맨스플레인을 접할 수 있다. 개중에서 로우지가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남자를 이길 수 없다는 의견이 가장 지배적이다.

내가 다니던 체육관의 남자 고등학생 하나는 복싱을 취미로 잠깐 해본 게 고작이면서도 자신이 론다 로우지를 이길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나마 이 정도가 가장 우호적인 맨스플레인에 속하며 나머지는 처참한 수준이다.

실력은 부풀려졌고 인성은 형편없다는 평가와 함께 여성이라는 이유로 외모 비하도 빠지지 않는다. 계속 승승장구할 것 같던 로우지가 부진에 빠지고 연거푸 재기에 실패하면서 그를 향한 조롱과 야유가 더욱 거세졌다. 홀리 홈과 아만다 누네스에게 두들겨 맞던 게 너무 고소했다는 소감을 거듭 강조하면서.

남자들이 불편해한 '여자 악당', 그녀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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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치지 않고 꿈을 꾸고 있는 힘껏 노력할 줄 아는 이 강인한 여성의 행보를 지켜보고 싶다. ⓒ pixabay


사실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악당을 자처한 사람은 다름 아닌 론다 로우지 본인이다. 작정하고 미움을 사려는 것처럼 행동한 데에는 흥행을 위한 전략이 숨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따지고 보면 론다 로우지야말로 악당 캐릭터로 소비되며 인기를 끈 스포츠 스타의 전형이라는 점이다.

빼어난 실력, 돌발 행동과 벌언, 논란과 유명세를 즐기는 태도, 거만함과 당돌함을 내세운 스타는 로우지 이전에도 드물지 않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로우지가 나이 어린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하필이면 격투기로 너무 크게 성공했다는 점이 아닐까?

지금의 론다 로우지는 그를 미워하던 이들이 바라던 대로 추락했다. 출전은커녕 훈련도 하지 않고 있으며 그를 발굴한 데이나 화이트마저 은퇴를 종용하는 상황이다. 누구보다 그의 재기를 바라는 나조차도 적어도 UFC에서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의 인생 역정을 따라가 보면 그는 변화에 능숙한 사람이다.

로우지는 자신이 유도에 심취했던 시기를 사랑에 비유했다. 십대 시절을 모두 바쳐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으나 그는 돌연 유도를 그만뒀다. 유도를 하는 것이 더이상 행복하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곧바로 MMA에 뛰어들었다.

이러한 전적처럼 로우지는 어느 날, 지금 보도되는 대로 WWE(세계 레슬링 연맹) 선수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혹은 운동 선수가 영화에 출연하면 부진을 겪는다는 징크스의 증인이 되고 말았지만 배우로서 계속 활동할지 그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로우지는 배우가 되는 것이 자신의 오래된 꿈이었으며 진지하게 연기에 임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나는 꿈을 꿀 자격이 있다. 자칫 허황돼 보여도 큰 꿈을 꿀 수 없다면 꿈이란 게 대체 존재하는 이유가 뭔가?'
  그의 자서전(원제 My fight your fight)의 한 구절처럼, 그는 지금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지치지 않고 꿈을 꾸고 있는 힘껏 노력할 줄 아는 이 강인한 여성의 행보를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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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힙'은 박수치면서, '승모근'은 보기 싫다니
#운동하는여자 #페미니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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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는 여자>를 썼습니다. 한겨레ESC '오늘하루운동', 오마이뉴스 '한 솔로', 여성신문 '운동사이' 연재 중입니다. 노는 거 다음으로 쓰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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