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지옥' 피해자들 죽어가... 빨리 알려야지"

[서산개척단⑦] 개척단 소재 연극 본 어르신들... 그리고 언론보도가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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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욱(etshiro)편집김지현(diediedie)등록 2017.12.18 16:13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조직한 박정희 정권은 부랑자, 고아들을 충남 서산에 가뒀습니다. 바다를 막아 땅을 일구게 했습니다. 이들과의 강제 결혼을 위해 부녀자도 끌려왔습니다. 보상 대신 그들 앞에 놓인 것은 20년 상환으로 갚아야 할 빚 뿐. 대부업자는 국가입니다. [편집자말]

지난 11월 7일, 서산 개척단 출신 김무학, 이명산, 함정석, 김인씨가 서울 종로구 아르코예술극장 앞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나고 있다. ⓒ 김성욱


지난 11월 7일 오후 4시 5분, 혜화역 마로니에공원.

김인 : "야야, 인제 오네. 니 내 누군지 모르나?"
함정석 : ...?
김인 : "얘 좀 봐라, 진짜 모르네. 허허 참... 나 김인이잖아, 김인이!"
함정석 : "뭐 김인이? 야 너 왜 이렇게 늙었냐!"
김인 : "늙었지. 니도 마이 늙었다. 하하하."

김무학(75)·김인(75)·이명산(75)·함정석(75)씨가 공원에 흩뿌려진 낙엽들을 밟으며 한데 모였다. 아르코예술극장에서 대한청소년개척단(서산개척단)을 소재로 한 연극 <언덕을 오르는 마삼식을 누가 죽였나>(김연재 작·정승현 연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만나자마자 10년 만이니, 20년 만이니 서로 옥신각신하던 이들은 모두 56년 전 강제 노역과 강제 결혼에 시달리던 서산개척단 출신들이다.

"다 죽어가는데... 연극이든 영화든, 계속 알려져야지"

지난 11월 7일, 서산 개척단 출신 김무학, 이명산, 함정석, 김인씨가 서울 종로구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열린 연극<언덕을 오르는 마삼식을 누가 죽였나>를 관람하고 있다. ⓒ 김성욱


지난 11월 7일, 서산 개척단 출신 김무학, 이명산, 함정석, 김인씨가 서울 종로구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열린 연극<언덕을 오르는 마삼식을 누가 죽였나>를 관람하고 있다. 이명산씨는 공연 도중 눈물을 흘렸다. ⓒ 김성욱


반가움도 잠시, 황급히 극장으로 향한 이들은 오후 4시 10분 공연 시작 직전에야 겨우 좌석에 앉았다. 이날 공연은 개척단 출신 어르신들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극단 측에서 정규 공연 시간 외에 별도로 마련한 것이었다. 그들만을 위한 무대를 앞두고도 어르신들은 "아무개는 살아있어?" "벌써 죽었지. 이제 거진 다 죽었어"라면서 못다한 안부를 묻기에만 여념이 없는 듯했지만...

"삑! 삐익!"

구호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연극이 시작되자 반가움도, 웃음기도 싹. 허리와 등이 일제히 의자에서 떨어지고, 눈은 동그랗게 커지는 어르신들.

"개처럼 짖어!"
"위험한 새끼들 교화시키느라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뻘에 빠져 죽어나간 사람이 어디 한둘이야?" (극중 대사들)

1시간 50여 분 동안 극이 그리는 서사에 따라 어르신들은 울고 웃었다. 급식통을 싹싹 긁어 단체 배식을 하는 씬에서는 손뼉을 치며 함께 웃다가도, 구호반의 구타와 폭력 소리를 대신한 북소리가 둥, 둥 이어지자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는 소리가 들렸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던 이명산씨는 코가 다 빨개졌고, 김무학씨는 연신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애써 손으로 눌렀다. 함정석씨는 발 뒤꿈치를 들고 몸을 웅크린 채 무대를 응시했고, 김인씨는 시종일관 미간을 찌푸렸다.

연극이 끝난 뒤 어르신들은 "잘 구성해서 만들었다" "잘 봤다"라면서도 "뭔가 좀 부족하다"라고 입을 모았다. 연극에 그려진 것보다 실제 개척단 생활이 훨씬 참혹했다는 설명이었다.

1961년부터 서산 개척단 생활을 한 이명산씨는 "옛날 생각도 나고, 폭력이나 억압하는 장면들을 보니까 안쓰럽고 안타까워서 눈물이 나더라"면서도 "좀 더 상세하게, 예를 들면 도비산에서 열 맞춰서 곡괭이 이만한 거를 하나씩 들고 돌을 지고 왔다갔다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좀 더 자세히 연극에 나와야 하는데..."라면서 아쉬움을 털어놨다. 50년 넘게 이어진 그들의 응어리가 2시간 짜리 연극으로 다 표현될 수 있을 리 없었다.

서울에 살고 있는 다른 이들과 달리 충남 서산에서 연극을 보기 위해 올라온 김인씨는 연극이든 영화든 개척단의 참상을 알리는 시도들이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연극의 내용보다도 무엇보다 이런 걸 계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중요하지 않겠나"라며 "나도 다 늙었고, 아까도 말했지만 이미 죽은 친구들도 많아요. 다들 죽어가는데 얼른 이 일이 알려져야지"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들은 이날 연극이 끝난 뒤에도 주변 식당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아쉬움을 달랬다.

지난 11월 7일, 서산 개척단 출신 김무학, 이명산, 함정석, 김인씨가 서울 종로구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열린 연극<언덕을 오르는 마삼식을 누가 죽였나>이 끝난 직후 박수를 치고 있다. ⓒ 김성욱


지난 4일 충남 서산 인지면 모월리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연극 <언덕을 오르는 마삼식을 누가 죽였나>를 함께 시청하고 있다. ⓒ 김성욱


지난 4일 서산 개척단 출신 성재용, 이정남, 정영철씨가 충남 서산 인지면 모월3리 마을회관에서 연극 <언덕을 오르는 마삼식을 누가 죽였나>를 함께 시청하고 있다. ⓒ 김성욱


서산을 찾은 연극

그리고 한 달쯤 뒤. 지난 4일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3리 마을회관에서 이 연극이 또 다른 개척단원들을 만났다. 실제 무대 대신 서울에서 갖고 온 55인치 TV를 통해서였다. 바쁜 농사일과 건강 문제 탓에 서울을 찾지 못한 어르신들을 위해 이조훈 감독이 극단 쪽의 양해를 받고 연극 촬영본을 공수해온 것이었다.

오후 2시 10분께, 연극을 보러 오란 소식에 개척단 출신 정영철(76)·성재용(74)·이정남(78)·정화자(75)씨를 비롯한 마을 주민 19명이 회관 안방에 모였다. 이 감독이 영상을 키려 하자 정화자씨는 커튼을 내리고 불을 껐다.

"삑! 삐익!"

잘 익은 귤과 감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던 주민들은 금세 모니터에 집중했다. 그렇게 또 1시간 50여 분.

시공간은 달랐지만 연극을 본 반응은 비슷했다. 정화자씨는 "보고 예전 생각나니까 또 목이 맥히고 마음이 아프다"라면서 말을 잇지 못했고, 성재용씨는 "아이고, 우리가 겪은 거에 비해선 내용이 약하지요. 맨손으로, 삽으로 집터 닦고 논 갈은 거 생각하면 노역이고 뭐고 실지로는 훨씬 심했지요"라고 말했다.

연극을 보며 눈가가 촉촉해졌던 정영철씨는 "(연극에) 배가 고픈 얘기가 너무 안 나왔어"라면서도 "어째든 이렇게 연극도 만들어지고 하는 게 참 고마운 일이지. (이조훈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도 잘 나올 거야"라고 기대했다.

<박정희판 '군함도' 모월리의 진실> 연재, 그 후

지난 4일 충남 서산 인지면 모월3리 마을회관에서 마을 주민들이 연극 <언덕을 오르는 마삼식을 누가 죽였나>를 함께 시청하고 있다. ⓒ 김성욱


지난 4일, 서산 개척단 출신 정화자씨와 정영철씨 부인 장교수씨, 성재용씨 부인 유선심씨가 모여 이야기 하고 있다. ⓒ 김성욱


<오마이뉴스>의 <박정희판 '군함도' 모월리의 진실> 연속 보도 이후 첫 방문이어서인지 개척단 어르신들과 주민들로부터 기사에 대한 후일담도 이어졌다.

정영철씨는 "인터넷이 무섭긴 무서운가벼. 연락 안 오던 후배 녀석한테 전화가 왔는데, '아이고 형님 평생 한으로만 있던 건데 잘 터뜨렸다'고 하더라고"라며 "나는 잘 몰라도 조금씩 이렇게 (서산 개척단 이야기가) 퍼져야지"라고 전했다.

성재용씨의 부인 유선심씨도 "며느리가 인터뷰 기사를 처음 보고는 아들 딸들한테 알려줬더라고요. 사위한테서도 전화가 따로 와서는 그동안 그렇게 고생하셨었는지 몰랐었다고..."라며 웃어 보였다. 성재용씨는 기사를 본 자식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를 전하며 또 한번 눈물을 삼켰다.

정화자씨는 좀 더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알려지는 게 한편으론 싫기도 해. 꺼려지고... 그치만 우리들 억울한 걸 생각하면 이걸 사람들이 많이 알게 돼야 하는 거니깐 나도 이렇게..."

춥다며 따뜻한 차를 건네던 그는 "우리들 맺힌 걸 어떻게든 국가가 풀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개척단 출신이 아닌 다른 주민들도 힘을 보탰다. 이 마을 이장인 하경옥씨는 "옆에 주민들이 보기에도 안타까운 사연들"이라면서 "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모월리에 있는 반석교회 유충희 목사도 "정화자 선생님, 성재용 선생님 등이 교회에 나오시기 때문에 익히 말씀은 들었지만 기사를 보니 더 충격적이더라"며 "이번 기사들을 통해 어르신들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려 고맙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라 실질적인 보상이 이뤄지길 바란다. 나도 사역하는 목회자로서 진실을 알리는 데 함께 힘을 모으겠다"라고 약속했다.

모월리의 시간

지난 4일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3리 마을 회관 앞, 서산 개척단 출신 정영철씨. ⓒ 김성욱


그렇게 취재를 얼추 마무리하고 서울로 올라가려던 차, 회관에서 나오던 정영철씨가 대뜸 기자를 불렀다.

"하여튼 관심 가져주고 우린 고맙지. 얘기 들었나? 나는 그동안에 마이 아팠어. 아파가지고 연극도 보러 못 가고. 이번엔 머리가 지끈지끈 하도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귀가 안 들려서 그렇다네. 그래서 여기 보청기도 새로 꼈다니까, 참말로. 그때 왔을 때만 혀도 내가 안 그랬었잖아."

3개월여 만에 찾은 모월리였지만 이곳 어르신들에게 시간은 조금 더 빨리 가고 있는 듯했다.

[지난 기사] "박정희판 '위안부' 사건, 제보자는 <1박 2일>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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