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은 타협하거나 심의할 대상이 아닙니다

학생인권조례의 통과를 환영하며

등록 2011.12.27 18:52수정 2011.12.27 18:52
0
원고료로 응원
학생인권조례 서명지에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을 쓰게 되어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서명해달라고 붙잡으니까 뭔가 해서 왔던 시민들이 주민등록번호를 쓰는 것을 알고는 발걸음을 많이도 돌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처음 보는 청소년 활동가들에게 넘겨주었던 시민들이 10만 명이었습니다.

종종 교사들은 "학생 때는 권리도 없지만 의무도 없어서 어른 때보다 더 낫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유는 돈 안 벌어도 부모님이 먹여 살려 주니까 얼마나 편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늘 "그러니 파마 못하고 교복 입어야 하고 체벌 당해도 학생 때가 나으니 반항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제가 다닌 초등학교에서는 삼분의 일 가량 되는 학생들이 토플을 공부하고 고등학교 수학을 선행했습니다. 학원이 끝나는 시간이 밤 11시가 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밤중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고등학생이 되면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학교가 10시에나 끝나고 또 학원을 다니면 새벽 2시나 되어서야 집에 온다던데 내가 그 힘든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중학생이 되고, 처음 교복을 입고 입학식을 한 날 똑같은 교복에 (학교 규정에 따라)똑같이 검은 가방에 검은 양말과 무채색 운동화를 신고 거의 비슷한 머리를 한 몇 백 명의 무리를 보고,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나인 것을 확인하고 소름이 끼쳐 흐느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죄수처럼 이런 칙칙한 옷을 입고 구령에 맞춰 걸어야 하며 왜 저런 을씨년스런 건물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야만 하는지 자문하면서.

중학교 1학년의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자해하는 습관이 생겼었습니다. 커터칼로 손바닥이나 손목 같은 곳의 살을 찢으면서 마음을 달랬었습니다. 손바닥에 죽죽 그어진 상처들을 가지고 학교에 가면 지각 체벌 담당이었던 국어교사가 내 손바닥을 때렸습니다. 몇 분 늦게 왔다고, 딱지도 안 앉은 상처들 위로 회초리를 내리쳤습니다.

2학년 여름에 자퇴를 결정했고, 자퇴한 첫날 그 질긴 경쟁과 억압에서 벗어난 것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학교라는 공간은 나에게 무시무시한 트라우마로 남았고, 더 이상 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가해지는 잔인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만 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습니다.

체벌금지, 두발복장자유, 성적지향 및 임신출산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와 종교 및 집회의 자유 등의 내용을 담은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안은 서울시민 10만명의 지지와 동의를 얻어 발의에 성공하였습니다.


교총 등 보수 교사단체나 어버이연합 등의 폭력적인 보수단체들은 특히 성적지향과 임신출산을 물고 늘어지며 '학생인권조례 통과되면 학교에서 항문성교를 배우고, 초등학생의 임신이 조장된다.'는 이상한 논리로 학생인권조례 통과를 방해했습니다. 한나라당 정문진 의원은 심지어 공개적인 의회 자리에서까지 "학생 때 임신했던 며느리 받아들일 수 있나, 학생들이 돈 벌려고 일부러 출산해서 아이를 내다 팔면 어떡하냐, 프로이트에 따르면 동성애는 구강기 때 이상이 생겨서 발생하는 병리적 현상이다"라는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었습니다.

그들은 차마 누군가를 차별해도 된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저런 논리들을 차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뜻은 누군가는 차별받아도 된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a

학생인권조례 반대자들이 교육위원들에게 보냈던 문자 내용. ⓒ 강민진



학생인권조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명시한 조례입니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 자신의 개성을 실현하고 목소리를 낼 권리, 양심을 지킬 권리 등의 당연하기 그지없는 권리들을 학생들은 여태껏 누려오지 못했기 때문에 제정하는 조례입니다.

주민발의안이 발의되고, 교육청 심의를 거쳐 의회 심의 단계까지 이르렀을 때, 더 이상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법이 만들어질 때마다 기본적 차별금지 조항에서 빠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성소수자들이 절박한 마음에서 의원회관을 점거, 6일간 농성하였습니다. 청소년 인권활동가들과 인권을 옹호하는 교사, 학부모들, 교육운동 활동가들 또한 학생인권조례가 훼손되는 것에 우려를 표하며 올바른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라는 뜻을 전달했습니다.

이윽고 주민발의안 원안은 아니었지만 원안에 가까운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음이 의회 본회의에서 공표되었습니다. 집회와 복장자유 조항에 단서조항이 붙었고, 사생활 보호 조항에서 보호자는 예외로 둔다는 조항이 따라붙었지만 차별금지사유에 임신출산,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논란이 되었던 종교의 자유, 두발자유 관련한 조항도 살아 있었습니다.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당연한 권리를 명시한 조례가 통과되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약간 서럽기도 했습니다.

a

청소년 활동가, 교육운동 활동가, 성소수자들이 모여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때. ⓒ 강민진


학생인권조례는 통과되었습니다. 그런데 교과부에서 재심의 요청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토록 논쟁거리가 되었고 비상식적 공격을 받아 온 학생인권조례가 결국에 통과된 후에도 다시 심의를 해봐야겠다는 주장입니다. 인권은 타협하거나 정치적인 판단으로 물러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과학기술부, 이대영 부교육감, 민주당 시의원들과 교육위원들에게 다시 한 번 올바른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것을 당부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인권 #청소년 #교과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강민진입니다. 현재는 청년정의당 대표로 재직중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2. 2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3. 3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4. 4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5. 5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