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담삼봉에 얽힌 이야기, 모두 사실일까

[눈이 그치고 찾아간 소백산과 도담삼봉] ② 단양 도담삼봉

등록 2010.01.21 10:45수정 2010.01.2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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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덕분에 눈 덮인 도담삼봉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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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도담삼봉 ⓒ 이상기


소백산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니 오후 3시다. 우리는 돌아가는 길에 도담삼봉을 들르기로 한다. 그것은 도담삼봉이 돌아가는 길옆에 있기도 하지만, 최근 많은 눈과 추위로 도담삼봉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담삼봉을 끼고 흐르는 남한강 물은 얼어붙었고, 삼봉의 바위 위를 눈이 덮고 있다는 것이다. 도담삼봉에 도착해 보니 정말 여느 때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도담삼봉을 흐르는 강물이 얼어, 걸어서 삼봉에 접근할 수가 있다. 우리는 모두 강으로 들어간다. 나는 조금 주의를 게을리해서 미끄러져 넘어지기까지 했다. 조심조심 걸어 삼봉으로 간다. 삼봉은 가운데 남편봉을 중심으로 상류인 북쪽에 첩봉이 있고, 하류인 남쪽에 처봉이 있다. 이 세 봉 중 올라갈 수 있는 곳은 가운데 남편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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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봉우리와 정자 ⓒ 이상기


이곳에는 정자도 있어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 배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올라갈 수가 없다. 지난 여름 배를 타고 한 번 올라가려고 해 보았으나 여객선을 운행하는 선장이 난색을 표해 포기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정자에 오르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마음대로 오를 수 있다. 그렇지만 바위에 눈이 쌓여 조심해야 한다. 얼음에서 한 번 넘어진 나는 정말 조심스럽게 정자에 오른다.

정자는 옛날부터 있던 것은 아니고 1900년 전후에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퇴락해서 버려진 것을 90년대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했다. 정자에서는 북쪽으로의 조망은 바위에 막혀 있고, 동서남 세 방향으로의 조망만이 가능하다. 동쪽으로는 도담리 방향이, 남쪽으로는 강을 둘러싼 산이, 서쪽으로는 주차장과 상가가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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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을 지치는 가족들 ⓒ 이상기


또 삼봉 주변의 얼음판 위에서는 사람들이 얼음을 지치며 즐겁게 놀고 있다. 특히 가족 중심의 관광객들이 많다. 물론 우리처럼 산행을 하고 나서 들른 사람들도 있다. 또 팔십 전후로 보이는 노부부가 이곳을 찾아 정자에 오르려고 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즐거운 표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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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사진 ⓒ 김광수


특히 젊은 가족은 아이들을 밀고 끌어주며 좋아한다. 우리 팀도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정취를 만끽하며 단체사진을 찍는다. 역시 자연의 변화된 모습은 늘 우리를 즐겁게 하는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의 변화는 삶을 재미있고 풍요롭게 하는 마력이 있다. 


옛 기록 속의 도담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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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난 단양 ⓒ 이상기


단양은 산과 물이 기이하고 빼어난 땅이다. 한자로 말하면 산수기수(山水奇秀)의 땅이다. 그래서 이작(李作)은 "단양은 옛 고을이라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나니, 더 없이 맑은 기운이 축적 된다"고 했다. 또 천개의 바위와 만개의 골짜기가 있는 천암만학(千巖萬壑)의 땅이다. 신개(申槩)의 시에 보면 "천 바위와 만 구렁에 하나의 강이 돌아 흐르고, 깎아지른 절벽으로 작은 길이 이어 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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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자로 굽이치는 북벽과 온달성 지역 ⓒ 이상기


거기에 단양은 장강금포(長江襟抱)의 땅이다. 긴 강이 옷깃처럼 휘감아 돈다는 뜻이다. 여기서 긴 강은 남한강을 말한다. 그리고 휘감아 돈다는 것은 굽이쳐 흐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남한강은 단양 땅을 지나며 세 군데에서 크게 굽이쳐 흐른다. 첫 번째가 가장 상류의 영춘 지역이다. 북벽에서 온달산성으로 이어지는 영춘에서 남한강은 큰 S자를 그린다. 영춘 지역은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산성과 나루가 있어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다.

둘째가 덕천리에서 도담리를 지나 도전리로 이어지는 단양읍 지역이다. 이곳에서도 남한강이 큰 S자 자형을 이루며 흐른다. 바로 이곳에 단양팔경의 2경인 도담삼봉과 석문이 있다. 도담삼봉은 단양팔경 중 이야기 거리가 가장 많은 절경이다. 시인묵객들이 지은 시가 많을 뿐만 아니라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도 많다.

최근 단양 문화원에서 발간한 <단양한시선>에 도담을 읊은 시가 131편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인상적인 것이 금계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의 '이방백과 더불어 도담에 배 띄우다(與李方伯泛島潭)'와 다산 정약용의 '도담(島潭)'이다. 황준량은 1557년부터 1559년까지 단양군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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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과 유람선 ⓒ 이상기


이방백과 더불어 도담에 배 띄우다                                與李方伯泛島潭 

  산은 단풍잎 밝게 물들고 강물은 모래벌에 반짝이는데      山明楓葉水明沙
  삼봉은 석양에 비껴 저녁놀을 드리우네.                         三島斜陽帶晩霞
  신선의 뗏목을 타고 길게 뻗은 푸른 절벽에 올라              爲泊仙槎撗翠壁
  차가운 달 보기를 기다리며 금빛 물결 넘실댐을 바라보네. 待看霜月湧金波。

  도담                                             島潭

  봉래섬이 날아와 푸른 못에 떨어진 곳  蓬島飛來落翠池
  낚싯배 바위문을 조심스레 뚫고 가네.  石門穿出釣船遲
  어느 누가 솔씨 하나 가져다가 심어서  誰將一顆雲松子
  물위 나뭇가지에 쏴쏴 소리 보탰는고.  添得颼飅到水枝

장강금포의 세 번째 지형을 우리는 구담에서 만날 수 있다. 구담이라면 거북이 웅크리고 있는 깊은 못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장회나루 아래를 가리킨다. 이곳은 영춘이나 도담 지역처럼 S자형으로 굽이치지는 않지만, 강 옆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있어 단구협(丹丘峽)이라 불린다. 이곳은 단양과 청풍의 경계 지역으로, 구담봉과 옥순봉이라는 기이한 바위(奇巖)가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 속의 도담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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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동상 ⓒ 이상기

도담삼봉에는 정도전과 관련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가 정도전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고, 다른 하나가 정도전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는 정도전이 천출(賤出)이었다는 것이고, 어린 시절 이야기는 정도전이 총명했다는 것이다.

풍기 사람이었던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이 젊었을 때 이곳 도담을 지나다가 관상(觀相)보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정운경에게 10년 후 혼인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정운경은 그의 말대로 10년 뒤에 삼봉에 다시 돌아와 신분이 낮은 여인을 만나서 아이를 얻게 되었다. 그 아이를 길에서 얻었다 해서 이름을 도전(道傳)이라 하고, 부모가 인연을 맺은 곳이 삼봉이므로 호(號)를 삼봉(三峰)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담에 있는 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 땅에 있었다고 한다. 이 삼봉이 홍수로 떠 내려와 지금의 도담에 멈추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정선 사람들은 단양까지 흘러들어온 삼봉을 돌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단양 사람들이 이를 거부하자 정선에서는 다시 삼봉에 대해 세금을 낼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관가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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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예관에 바라 본 삼봉 ⓒ 이상기


이를 본 소년 정도전이 기지를 발휘해 '우리가 삼봉을 정선에서 떠내려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삼봉이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으니 가져가도록 하라'고 조언했다. 아무 소용도 없는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한 것이다. 이에 정선에서는 삼봉의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게 되었고, 그때부터 삼봉은 단양의 것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처봉과 첩봉 이야기다. 현재는 가운데 남편봉을 중심으로 양쪽에 처봉과 첩봉이 있다. 그렇지만 원래는 남편봉과 처봉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처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남편은 첩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첩이 애를 가져 부른 배를 남편 쪽으로 향하자, 화가 난 처가 돌아섰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실제로 첩봉은 남편봉을 향하고 있고, 처봉은 남편봉을 등지고 있는 형상이다.

이들 세 이야기 중 정도전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빼고는 나중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러한 스토리텔링을 우리는 긍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자연이나 문화유산은 이처럼 스토리텔링이 더해질 때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림 속의 도담삼봉

도담삼봉을 그림으로 그린 사람 역시 여럿이겠지만, 현재 남아있는 그림으로는 최북(1712-1786), 김홍도(1745-?), 이방운(1761-?)의 것이 유명하다. 이들은 모두 조선 후기 영조, 정조 때 사람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화인(畵人)들이다. 이들은 '도담(島潭)'이라는 화제로 도담삼봉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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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북의 도담 ⓒ 이상기


호생관 최북은 1749년 원교 이광사(1705-1777)와 함께 단양에서 노닐며 단구승유도(丹丘勝遊圖)를 그렸다. 최북은 우리에게 자신의 눈을 찌른 기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미학사상을 토대로 그림을 그린 지조 있는 화가였다. 그림 '도담'의 왼쪽에는 도보(道甫)가 쓴 해제가 있다. 도보는 원교 이광사의 자이다.

해제를 풀이해 보면 기사년 봄에 한벽루에서 글씨를 썼다. 그리고 월성 최씨인 식과 함께 놀면서 그림을 그렸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그림을 그린 사람은 최북이고 그림의 대상은 도담삼봉이 된다. 최북의 도담은 현재 주차장이 있는 도담 나루터에서 보고 그린 실경이다. 그렇지만 조금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그것은 사방에서 대상을 바라보고, 대상을 현실적으로 표현하려는 진경산수의 기법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북은 정선의 진경산수에서 김홍도의 실경산수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홍도는 연풍현감으로 있던 1794년 단양으로 유람을 했고, 2년 후인 1796년 '병진화첩'이란 이름으로 도담삼봉, 사인암, 옥순봉을 그렸다. 이들 그림은 단원의 산수화 중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들 그림은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여기서 사실적이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는 뜻이다. 도담삼봉 그림이 현재 우리가 보는 모습과 거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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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도담삼봉 ⓒ 이상기


중경에 삼봉을 크게 배치하고 근경에 나루를 건너려는 사람을 작게 배치했으며 원경에 멀리 보이는 산을 배치했다. 시선이 삼봉에 머물렀다, 원경의 산으로 간 다음 근경의 사람에게로 향하도록 그려져 있다. 그리고 바위와 소나무, 배와 사람을 제외한 대상을 과감히 생략하여 도담삼봉을 부각시키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근경에 아주 작게 사람을 배치하였는데 이것은, 이들이 삼봉을 바라보면서 하는 대화를 우리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또 이들 오른쪽으로 나귀를 끌고 가는 일행이 표현되었는데, 이것 역시 우리에게 뭔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 같다.

그림은 한편으로 시간을 멈추게 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과거와 현재를 소통시켜주는 역할도 한다. 이들 그림을 통해 우리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 그림을 통해 과거와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도담삼봉 #정도전 #최북 #김홍도 #실경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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