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당신 이쁜 옷 입었네!"

8년 세월 함께 한 코발트색 점퍼와의 이별

등록 2007.06.14 11:12수정 2007.06.14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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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릇치고도 괴상한 버릇, 남들이 들으면 정말 못 말리는 아줌마라고 하겠지만 나는 꼭 서너 살배기 아이들처럼 내가 좋아하는 옷과 신발만 줄기차게 고집하는 괴상한 습관이 있다. 아무리 폼나는 정장 옷과 구두가 있어도 그것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다면 불가피한 경우 빼고는 절대로 걸치지 않는다.

편한 옷, 편한 신발 그에 걸맞은 맨얼굴. 어디를 가든지 그 차림 그대로 아무렇지 않게 활보했던 탓에 꾸미고 나가면 수십 년 지기도 처음엔 제대로 못 알아보는 해프닝도 있을 지경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차림은 점퍼에 바지 차림이다. 신발은 사계절 내내 스타일이 변하지 않는 효도신발. 가끔 예쁜 스커트 정장을 입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하지만 그놈의 신발 때문에 번번이 포기하기 일쑤다. 날렵한 제비모양으로 빠진 뾰족구두, 신으면 체형이 저절로 S라인이 된다는 하이힐에 도저히 적응하지 못하는 원초적 결함이 있으니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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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행지의 계단에서 ⓒ 조명자

자,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자. 요 위 사진 속에 그 옷, 연 코발트색의 점퍼와 함께 한 세월이 어언 8년 세월이다. 수술을 받고 2년 후였던가? 한쪽 가슴을 절제했으니 인조 유방 없이 얇은 티셔츠나 남방셔츠를 입을 수가 없었다.

요즘은 유방암 수술 환자들 대부분이 유방보존수술을 택하거나 절제할 경우에는 유방재건수술을 해 온전한 가슴을 만들지만, 나는 실리콘 브래지어로 대충 살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실리콘이 너무 무거워 그러잖아도 편한 것만 받치는 나를 질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브래지어를 안 해도 대충 넘어갈 옷. 그때부터 그런 옷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구한 점퍼가 바로 저 옷이다. 티셔츠에 조끼 걸치고 그 위에 펑퍼짐한 저 점퍼를 걸치면 외출준비 땡. 얼마나 좋은지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방풍에 방수까지…. 더구나 색깔도 환한 코발트색이니 더더욱 금상첨화였다. 보기엔 저래도 저 옷이 그 당시엔 상당한 고가로 구입한 '이태리산' 수입 옷이다. 사실 정장도 아닌 점퍼를 비싼 값에 산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았지만 그때 형편에 싸네 비싸네 타박할 처지가 아니었다.

브래지어 없이 찌그러진 가슴을 자연스럽게 감춰 줄 옷. 도심지고 산이고 들이고 어디를 가든지 저 옷 하나면 만사 오케이였다.

한여름이나 한겨울 아니면 저 옷 하나로 버텨 사람들 사이에 저 옷차림이 내 트레이드가 될 정도였으니 10년 가까운 세월, 사진 속의 내 모습은 저 색깔 하나였다. 그렇게 나의 40∼50대를 함께 한 옷. 나의 역사이자 내 분신과 마찬가지였던 옷이 세월의 무게에 무너졌다.

1년 전부터 앞 지퍼 선과 주머니 부근부터 찢기고 너덜너덜해지더니 기어이 쭉쭉 찢어지기 시작했다. 옷 천이 삭았으니 아무리 곱게 꿰매도 한번 빨래만 하면 또 다른 곳이 찢어져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저 옷과 작별을 해야 했다. 너무 아깝고, 너무 서운하고 꼭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 같이 쓰린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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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을 온전히 나와 함께 한 내 옷에게 감사를... ⓒ 조명자

면이라면 태워줄 텐데 소재가 화학섬유니 그럴 수도 없었다. 매립용 봉투에 집어넣으며 사람한테 하듯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곧바로 저 옷과 비슷한 옷을 구하려 백화점을 누볐다. 이 옷, 저 옷 번갈아 입는 사람이라면 대충 구하겠지만 또 얼마만큼의 세월을 함께 할지 모르는 옷인데 적당히 고를 수 있나.

고르고 고른 끝에 분홍색 점퍼를 선택했다. 분홍색이 부담스러웠지만 50% 할인 판매대에서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늘 희고 검은 무채색이나 베이지색 유의 누리끼리 또는 남의 눈에 잘 안 띄는 색상만 선호했던 나로선 대단한 변화였다.

아니나 다를까. 분홍 점퍼를 입고 나타난 나를 본 지인들이 모두 한마디씩 했다. 어떤 후배는 보자마자 "언니가 늙었나봐…"하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감싸 안았다. 그런데 마누라가 머리를 볶든 새 옷을 입든 생전 관심이 없던 남편이 이번엔 웬일인지 아는 체를 했다.

"어∼ 당신 이쁜 옷 입었네. 그거 어디서 났어?"
#코발트색 점퍼 #이별 #버릇 #옷차림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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