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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 전 한국전쟁 당시 징집된 '17세 이하 소년병'(정부는 소년·소녀지원병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소년병'으로 통일한다)이 약 3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공식 확인됐다.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군사편찬연구소(국방부 산하)의 <6·25전쟁 소년병 연구>(이상호·박영실, 이하 <소년병 연구>)에 따르면, 2011년 11월 현재 국방부에서 파악한 소년병은 2만9603명이고, 이들 가운데 2573명이 전사했다. 특히 2만9603명 가운데는 여군 467명('17세 이하 소녀병')이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소년병 규모는 연구소에서 육·해·공군과 병무청, 행정안전부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다.    

군사편찬연구소는 국방부로부터 의뢰받아 지난 2009년 10월부터 <(가칭) 소년·소녀지원병 6․25 참전사> 편찬을 진행해왔고, 지난해 12월 '소년병의 한국전쟁 참전사'에 해당하는 <소년병 연구>를 펴냈다. 

정부가 소년병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소년병 범위를 정의하고, 참전 규모와 입대과정, 전투 참전, 전쟁 이후 삶 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녀병이 23명에 불과하다고?... "467명 징집됐다" 

 국방부 산하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6전쟁 소년병 연구>.
 국방부 산하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6전쟁 소년병 연구>.
ⓒ 군사편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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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소년병의 범위와 관련, <소년병 연구>는 "정식군번을 받은 시기를 기점으로 만 17세 이하의 자를 소년병으로 규정해야 한다"며 "학도의용군으로 편제되어 1951년 2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의 학도의용군 해산명령과 1951년 3월 16일 귀환조치령에 의해 학교로 복귀한 자를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전쟁이 발발한 이후 군번을 부여받은 정규군으로서 그 학적 소유를 불문하고 만 17세 이하의 나이에 조국수호를 위해 전후방에서 근무하고 일정기간의 복무완수(상이 포함)로 인해 제대한 자"를 소년병으로 정의했다.

애초 국방부는 한국전쟁 당시 현역으로 복무한 '18세 미만'(17세 이하) 소년병을 1만4400여 명, 국가보훈처는 2만8694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해왔다. 하지만 <소년병 연구> 편찬 과정에서 소년병 규모는 많이 늘어났다.

<소년병 연구> 편찬 과정에서 국방부가 잠정 확인한 소년병 규모는 2만9597명이었다. 하지만 최종 확인된 소년병 규모는 이보다 6명이 많은 2만9603명에 이른다. 이는 "당시 3개 사단에 해당하는 병력"(윤한수 6·25참전소년병전우회 사무총장)이라고 한다.

참전자 2만9603명 중 전사자(2573명)를 제외한 소년병은 2만7030명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2765명은 유엔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다만 <소년병 연구>는 "국방부에서 파악하는 소년병 현황도 입대일 기준으로서 우리가 제시한 군번을 부여받아 병적에 정식으로 기입된 기준을 통해 보면 그 수가 매우 많음을 알 수 있다"며 "그러나 이 자료도 최종적인 확인자료가 아니므로 그 정확한 수는 추후 더 많은 확인을 거쳐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특히 국군에 배속됐던 소년병 2만4263명 가운데 467명이 여군으로 확인된 점도 눈에 띈다. 즉 467명이 '소녀병'으로 징집됐다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국방부가 주장해온 '23명'보다 20배나 많은 규모다.

박원호 국방부 예비역정책발전TF장(중령)은 지난 2010년 3월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각 군을 통해 확인한 결과 현재까지 파악된 소녀지원병은 23명"이라며 "육군이나 공군에는 없고 해군에서만 그런 사례가 발견됐다"고 말한 바 있다.

소년병의 존재를 처음으로 공론화했던 6·25참전소년병전우회(소년병전우회, 회장 박태승)는 "소녀병 80여 명이 징집됐고, 현재 14명 정도가 생존해 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포천지구 전투에서 잠시 자세를 취한 소년병들.
 포천지구 전투에서 잠시 자세를 취한 소년병들.
ⓒ 군사편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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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 2573명, 1950년과 1951년에 집중돼"

또한 <소년병 연구>는 "(소년병의 경우) 학교 배속장교의 권유, 학교의 소집, 국민방위군 소집령에 의한 입대, 경찰의 불심검문에 의한 입대, 자원입대, 가두 징병모집 등 입대경위가 다양하다"며 "당시 전세의 악화로 인해 입대가 정상적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기보다는 임시방편적 수단에 의해 이루어진 사례가 많다"고 밝혔다.

이는 소년병 징집 과정이 대부분 불법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소년병으로 참전한 이우익씨는 중학교 3학년 때 단지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강제징집됐고, 조우현씨는 15세에 국민방위군에게 끌려가 전쟁에 참가했다.

소년병들은 경찰과 전방사단, 후방사단, 미군, 해병대 등에 배속되어 다부동전투 등 낙동강방어선 전투에 대거 투입됐다. 이후 일부는 지리산지구 게릴라 토벌작전이나 북진 대열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전사한 소년병은 2573명에 이른다. 이는 소년병 참전자수의 약 10%를 차지하는 수치다. <소년병 연구>는 "우리가 더욱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전사자가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시기"라며 "전사자는 1950년과 1951년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는데 이 가운데에는 낙동강방어선 전투와 중공군 참전 이후 희생이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전쟁 이후 삶"이었다. <소년병 연구>는 "문제는 이들이 전쟁의 휴전과 함께 군 복무를 마친 것이 아니라는 점"이라며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에 이르기까지 복무가 연장되어 제대가 되었을 때에는 이미 성인이 되어 버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끝났으나 거의 대부분 신설부대의 창설 요원이 되거나 또는 만기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해서 적게는 1954년까지 길게는 1956년까지 군에 남아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172쪽)

소년병 출신인 김인선씨는 "1954년 6월 1일자로 만기 제대하고 보니 공부도 못하고 어린 나리에 시달리고 보니 몸에 병만 들고 사회적으로 낙오자가 되고 보니 소년병들은 누구나 다 같이 억울하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한 소년병의 제대증서. 소년병은 학도병이나 학도의용군과 달리 정식 군번을 부여받은 정규군이었다.
 한 소년병의 제대증서. 소년병은 학도병이나 학도의용군과 달리 정식 군번을 부여받은 정규군이었다.
ⓒ 군사편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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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예우, 기념사업회 설립" 등 제안

<소년병 연구>는 "이러한 고단한 삶에 대한 국가보상체계는 매우 열악하다"고 지적한 뒤, "학계나 정부에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공적을 적극 발굴하고 홍보해야 할 관계 당국의 미흡한 대처를 지적할 수 있다"고 국방부·국가보훈처 책임론을 제기했다.

"2009년 정부는 '독도의용수비대 기념사업회'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100억여 원에 달하는 막대한 재원을 마련해주었다. 20여 명에 지나지 않는 이 단체에 이러한 막대한 예산을 집행해 준 배경에는 독도를 둘러싼 일본과의 외교적 경쟁과 국민적 자존감을 회복하려고 한 의도임을 알 수 있다. (중략) 아직도 6·25 전쟁 시기 어린나이에 참전하여 조국을 위해 자신의 생명과 미래를 바친 소년병에 대한 처우와 비교하면 너무나 차이가 크고, 소년병에 대한 예우차원의 국가적 지원이 무엇이었는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175쪽)

<소년병 연구>는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국가유공자법)의 조속한 통과 ▲국가보훈처의 구체적인 정책지침 수립 ▲소년병 참전자 기념사업회 설립과 정부의 재정지원 ▲소년병 참전 기념비 설립과 추모사업 전개 등을 제안했다.

소년병전우회는 소년병을 '참전유공자'가 아닌 '국가유공자'로 예우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소년병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자는 '국가유공자법' 개정안이 16대와 17대, 18대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자동폐기됐다.     

박태승 회장은 7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소년병 연구>를 통해 소년병의 실체를 인정하고 정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그동안 소년병을 비정규군으로 오해해왔는데 정식 군번을 부여받은 정규군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고 평가했다.

박 회장은 "그동안 국가도 당사자도 명예스러울 수 있도록 3대 국회에 걸쳐 국가유공자법 개정을 요구했지만 (정부와 국회는) 우리의 애원을 외면했다"며 "앞으로 국가유공자법 개정보다는 불법 징집에 따른 보상을 정부에 요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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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