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01 19:26최종 업데이트 24.02.01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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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하기 좋은 직업'이라고 불리는 직업들이, 정말 여자에게 좋은 직업이 맞는 것일까. ⓒ pixabay

 
1년 반을 꼬박 준비한 책 <직업을 때려치운 여자들>(동아시아)이 출간됐다. 나와 퇴직 교사 출신의 작가이자 성교육 활동가인 서현주가 공저한 책이다. 책의 부제는 이러하다. '서로의 레퍼런스가 된 여성들의 탈직장 연대기.'

'선생을 때려치운 여자들'에서 시작한 '직때녀'

책은 교사, 간호사, 승무원, 방송 작가 같은 '여초' 직업들, 흔히 '여자하기 좋은 직업'이라고 사회가 권하는 직업들이 정말 여자에게 좋은 직업인지를 묻는 것에서 시작한다. 애초에 기획은 '선때녀'(선생을 때려치운 여자들)였다. 나와 현주는 2021년, 내가 진행했던 대담 연재 '이슬기의 대담한 언니들'을 통해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 만난 사이였다. 현주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자, 성평등 어린이·청소년 책을 선정해 추천하는 여성가족부 주관 사업인 '나다움어린이책'의 선정 위원이었다.


그러나 일부 보수 세력들의 '조기 성애화 조장' 주장 등의 반발에 부딪혀 사업이 좌초된 이후에도 굴하지 않고, 성인지 감수성이 뛰어난 어린이·청소년 신간 도서를 소개하는 <오늘의 어린이책>을 펴낸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비슷한 또래에 관심사가 비슷해서, 이후로도 종종 안부를 나누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인 2022년 3월, 현주가 말했다. "선생 일을 때려치웠다"고.

그 말은 희한하게 내 안에서 공명했다. 여성으로서 교사라는 직업을 때려치운다는 말의 무게를, 나는 알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내 주변 여성들의 삶이, 이를 증명했다. 특히나 경남 창원이라는 지방 도시에서 자란 나는, 딸들이 적성이나 흥미와 관계없이 교사라는 직업을 권유받고, 아들들과는 다르게 서울로의 대학 진학이 좌절된 대신 지역의 국립 사범대로 흡수되는 메커니즘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른바 딸에게만 적용되는 '가성비 서사'다. 교사가 되기 위해 삼수 끝 교대에 입학하고, 임용고시도 재수‧삼수를 거듭하는 사례 또한 많이 봤다.

교사라는 직업이 여성에게 갖는 울림이 그 정도인데, 그걸 그만둔다고? 기사로 쓰기에는 호흡이 긴 얘기이기에, 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애초에 '선때녀'(선생을 때려치운 여자들)로 시작한 기획안은 출판사와의 논의를 거쳐 여초 직업 전반에 관한 '직때녀'로 진화했다. 그리고 불과 9개월 만에, 나도 9년 다닌 언론사를 때려치운 '직때녀'가 되었다.

'여자하기 좋은 직업'이라는 말에 숨은 뜻
 

<직업을 때려치운 여자들> 겉표지 ⓒ 동아시아


'여자하기 좋은 직업'으로 불리는 교사, 간호사, 승무원, 방송작가들에는 모종의 공통점이 있었다. 방학과 유급 휴직이 보장되는 교사, 자격증이 있는 전문직으로 재취업이 용이한 간호사는 여성들이 겪는 경력 단절에서 자유로운 직종이었다. '가사 일을 하며 틈틈이 짬을 내 일하는 자리'로서의 연원을 가진 방송작가는 많은 월급을 주지 않아도 되는 일자리로 자리매김했다. 곧 가정에서 여성의 몫으로 예비된, 가사나 육아를 하기에 좋은, '일등 신붓감'에 근접한 직업들이었다. 성적 대상화에 시달리거나, 가정은 물론 직장에서도 돌봄의 의무를 이행하라는 압박을 받는 것은 네 가지 직종 모두 동일했다.

우리가 만난 여자들은 이들 직업에 가해지는 구조적 억압을 직시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간호사 세계의 직장 내 괴롭힘으로 알려진 '태움'에 대해, 우리가 만난 간호사들은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다) 라는 식의 악의적 논리로 호도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간호사만 투입해 최대로 많은 환자를 보게 하는 시스템하에서, 태움은 자신을 억압하는 근본적 원인이 아닌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자를 향한 '수평 폭력'의 형태로 자행된다"(소민‧가명)는 것이 그들의 진단이었다.

이들 직업군들은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캐시 카우'(수익 창출원)가 아닌 필수 유지 인력으로 불리며, 착취당하고 있는 현실도 비슷했다. 병원에 과밀 병상이 있다면, 학교에는 과밀 학급이 있듯이. 가사와 육아의 굴레로 노조 참여도 쉽지 않은 이들의 주장은 쉽게 과소 대표됐다.

<직때녀>는 퇴직 강권서가 아닙니다
 

2019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열렸던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던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제 3회 3시 STOP 조기퇴근시위' 당시 모습. ⓒ 권우성

 
노파심에서 얹는 말 하나. <직업을 때려치운 여자들>은 '본격 퇴사‧퇴직 강권서'가 아니다. 책에서는 여초 직업군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는 이들을 '알을 깨는 여자들'이라 표현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에서 두 발 딛고 서 있는 이들, 더 나은 노동 환경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 역시 저마다의 알을 깨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을 착즙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이들은 사업장에서 개별적으로, 혹은 노조나 연구 모임 등을 통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해 10월 아이슬란드에서 열린 여성 총파업처럼, 한국에서도 여성 노동자의 이름으로 오는 3‧8 세계 여성의 날에 총파업을 추진하자는 논의가 힘을 얻는 데는 이런 여성들의 노고가 있다.

책을 쓰는데 도움을 준 수많은 여성들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의 인터뷰이가 된, 얼추 알고 지낸 기간이 20년을 넘어가는 친구들은 내게 말했다. "고맙다"고. 인터뷰이 중 한 명인 수정(가명)은 메일에서 나를 '작가님'으로 호명하며, 전에 없이 존댓말을 썼다. "횡설수설이었던 인터뷰 내용들을 멋지게 재탄생하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다른 친구 승희(가명)는 말했다. "내 얘기가 책이 될 수 있을 줄 몰랐어!" 나는 생각한다. 당신들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책을 쓸 수 있었다고.

엄마는, 뜻밖에 "미안하다"고 했다. 좀 더 가정 환경이 넉넉했더라면, 네가 이런 책을 쓸 만큼 사회적 차별에 민감한 사람으로 자라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였다. 엄마는 이런 생각들을 품고 사는 딸의 삶이 무척이나 팍팍했으리라 짐작했는지 전화를 타고 흐르는 목소리가 퍽 울적하게 들렸다. 현주의 엄마도 딸에게 "교직을 권해서 미안하다"는 얘기를 전했다 한다. 그 얘기들을 서로 나누며, 우리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생은 줄곧 딸을 위하는 쪽이었기에, 그런 말씀들을 했거나 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한 가지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최근 몇 년간, 내 머릿속에서 꾸준히 굴러다니는 말이다. 2019년 당시 소설집 <오직 한 사람의 차지>를 낸 김금희 작가를 인터뷰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김 작가가 만들어내는, 햄버거집에서 감자튀김을 다 흩뜨려 놓고 같이 먹는데 자기 몫의 버거는 먹지 않고 감자튀김만 먼저 공략하는 이를 향한 속칭 '빠꾸' 없는 힐난 같은 장면들을 사랑했다. 그런 장면들, 감정 서술은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가 답했다.

"그게 전달이 된다면, 받아들이는 분의 능력도 있는 거 같아요. 자기 마음에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을 기억에 담아뒀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각자 매우 다르게 사는 것 같지만, 비슷하게 살고 있잖아요. 그 과정을 함께했다면 세심하게 생각만 하면 되는 거예요."

뜻밖의 칭찬을 들은 셈이어서, 다음에 하려던 질문을 까먹고 순간 어리벙벙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그 말을, <직때녀>를 읽는 여성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직업을 때려치운 여자들>을 읽고, 마음이 공명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걸 받아들이는 분의 능력도 있는 것이라고. 나를 옥죄는 직업적 현실을, 그저 지나치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꾸준히 분석하려 한, 나만의 타개책을 열심히 모색한 당신들에게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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