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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은 2004년 1월 창원 두산중공업 사측이 '노동열사 배달호 추모비'의 회사 내 건립에 반대하자 노조 측에서 도로 화단에 세워 놓은 모습. 오른쪽 사진은 2003년 한진중공업에서 사망한 김주익·곽재규 노동자의 장례 현장 모습.
 왼쪽 사진은 2004년 1월 창원 두산중공업 사측이 '노동열사 배달호 추모비'의 회사 내 건립에 반대하자 노조 측에서 도로 화단에 세워 놓은 모습. 오른쪽 사진은 2003년 한진중공업에서 사망한 김주익·곽재규 노동자의 장례 현장 모습.
ⓒ 윤성효.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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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해도 너무 한다. 해고자 18명, 징계자 90명 정도. 재산가압류, 급여가압류, 노동조합 말살 악랄한 정책으로 우리가 여기서 밀려난다면 전 사원의 고용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 이제 이틀 후면 급여 받는 날이다. 약 6개월 이상 급여 받은 적이 없지만, 이틀 후 역시 내게 들어오는 돈은 없을 것이다."

대우조선 얘기인가 싶겠지만, 무려 19년 전인 2003년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가 남긴 유언이다. 2002년 두산중공업 노조 교섭위원이었던 배달호 열사는 파업으로 구속됐다 9월 풀려났다. 감옥에서 나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회사의 손해배상청구소송과 그에 따른 재산 및 임금 가압류, 징계였다. 정직 3개월을 마치고 12월 26일 현장으로 복귀했지만, 월급통장에 찍히는 액수는 2만5000원뿐이었다. 노조 탄압에 대한 절망감, 손해배상 가압류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회사에 대한 울분으로 배달호 열사는 2003년 1월 9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회사는 아예 이번 기회에 노동조합을 말살하고 노동조합에 협조적인 조합원의 씨를 말리려고 작심을 한 모양이다. (…)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노동자는 다 굶어 죽어야 한단 말인가. (…) 잘못은 자신들이 저질러놓고 적반하장으로 우리들에게 손해배상 가압류에 고소·고발에, 구속에, 해고까지 노동조합을 식물노조로, 노동자를 식물인간으로 만들려는 노무정책."

같은 해 10월 17일, 김주익 부산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위원장도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 이미 2002년부터 진행되던 손해배상 가압류를 포함한 노조 탄압과 정리해고, 임금동결에 맞서 2003년 6월 11일 고공 크레인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은 129일 동안이나 지속됐지만, 회사는 교섭을 회피하며 탄압에 손해배상 가압류를 활용했다. 파업 중인 조합원들에게 10월 15일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손해배상 가압류를 하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조합원은 2백 명으로 줄었고, 김주익 지회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라도 투쟁이 승리하길 바랐다.

손해배상 가압류와 노동자 죽음의 역사

한국에서 노동조합에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역사는 훨씬 오래됐다. 최초의 사례는 1990년 대구 계명기독대학이 동산의료원 노동조합에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이라고 한다. 당시 대구지방법원은 노동조합쟁의조정법 위반을 이유로 노조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이 판결 이후, 회사로부터 노동자의 급여나 재산이 가압류당하는 사례가 다수 발생했다. 특히 당시 노동부장관이 해당 판결을 모범사례로 제시하며 전국 근로감독관이 모인 자리에서 민사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도록 하는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손해배상청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대다수 노동조합과 조합원 측의 민·형사 책임이 인정됐다.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 가압류가 널리 알려진 것은 2013년 이후다. 쌍용자동차, 철도노조, 한진중공업,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 등에 수십억, 수백억 원의 손해배상과 가압류 판결이 떨어졌다. 특히 2009년 쌍용차 파업 이후 보복성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노동자와 가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고통받는 상황에 대한 노동자, 시민들의 공감이 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체 '손잡고'도 만들어졌다. 이후 주간지 <시사IN>의 독자가 47억 원 배상 판결을 받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기사를 접하고, 상상도 안 되는 액수이지만 10만 명이 4만7000원을 낸면 책임질 수 있지 않겠냐는 편지와 함께 돈을 보내면서 '노란봉투 캠페인'이 시작됐다.

가수 이효리씨의 4만7000원 동참으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손해배상 가압류 문제가 사회적인 의제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손해배상 가압류의 법적 근거가 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 일명 '노란봉투법'을 발의하는 활동도 본격화되었지만, 지금까지 진전이 없다.
 
10월 6일,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결의대회를 열어 '노조법 2?3조 개정 촉구!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10월 6일,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결의대회를 열어 '노조법 2?3조 개정 촉구!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 호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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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손해배상청구와 가압류청구는 노동사건에 특유한 제도가 아니라 일반적인 민사법상 제도다. 민법에 따라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 제도들은, 노동자들이 쟁의 및 파업하고 난 뒤 고용주들이 보복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노동자의 삶과 건강을 파괴하는 무기가 되고 있다.

노동자 몸과 마음을 할퀴는 손배가압류

2018년 7월부터 12월까지 '손잡고'가 진행한 손배가압류 노동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쟁의행위로 인해 손배가압류를 경험한 노동자의 경우, 여성과 남성 모두 지난 1년간 근골격계 통증(요통, 상지통, 하지통) 유병률이 60%가 넘었다. 또한 손배가압류를 경험한 노동자 집단은 일반노동자 집단과 비교해 지난 1년간 전신 피로나 청력 문제 등의 건강문제 모두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높은 유병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의 경우 적게는 3.4배(전신 피로), 크게는 9배(근골격계 하지통)까지 격차를 보였으며, 자가평가 건강 수준은 30배가 넘는 유병비를 보였다. 

여성의 경우 적게는 4배(근골격계 상지통), 많게는 8.2배(근골격계 하지통) 높은 유병비를 나타냈다. 자가평가 건강 수준 역시 20배 넘게 높은 수준의 유병비가 보고됐다.

정신건강은 그 결과가 더욱 끔찍하다. 동일 업종과 연령대의 일반 노동자 집단과 비교했을 때, 쟁의행위로 인한 손배가압류 경험이 있는 남성 노동자의 경우, 지난 1주간 우울증상 11.9배, 지난 1년간 자살 생각 21.9배 높은 유병비를 보였다. 손배가압류 경험이 있는 여성 노동자 역시 지난 1주간 우울증상 8.6배, 지난 1년간 자살 생각 22배 높은 유병비를 보였다.

연구진은 이후 노동자 12명을 심층 인터뷰한 내용을 최근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노동자들이 쟁의행위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이나 손해배상청구에서 오는 중압감으로 트라우마를 겪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고, 이로 인해 이후 수년간 건강 상태가 계속 악화하였다는 것이다. 실태조사를 분석한 논문 제목처럼 '갚을 수 없는 돈'이 '아픈 몸과 마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장기간에 걸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손배가압류로 안전 문제에 '재갈 물리기'

직접적으로 안전 문제와 관련한 작업 중지 때문에 손해배상을 당하는 일도 있다. 올해 6월 한국타이어 공장에서 기계의 안전 방호조치가 정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설비를 비상 정지시켰던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해 회사가 9000여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당시 노동자가 세운 설비는 2020년 노동자 사망 사고가 발생했었다. 중대재해가 발생했던 장비에 이상을 느낀 노동자라면 누구든 기계를 세우고, 안전 점검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기계를 세운 후 노사가 함께 현장을 확인하는 과정도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며칠 뒤 노조 측의 설비 중지로 3억 원가량의 손해를 봤다며 노조 지회장 등을 업무방해로 고소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노동자들의 안전에 관한 문제 제기를 손해배상으로 입막음해 온 역사 또한 길다. 현재 금속노조 기아차지부 홍진성 지부장은 대의원이던 2014년, 회사로부터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와 1억 원의 손해배상청구를 당했다. 조립이 완료돼 기계에 매달려 다음 라인으로 운반되던 무게 10kg짜리 머플러가 작업자 옆으로 떨어졌다.

당시 대의원이던 홍진성 지부장은 작업을 중단하고 공장 측에 안전 점검을 요구했다. 회사 측은 "부상자가 없어 안전사고는 아니다"라며 작업 재개를 지시했지만, 노동자들은 "안전 점검 전 재개는 불가능하다"고 맞섰다. 결국 그날 오후 늦게 노사 대표의 안전 점검 회의 뒤에야 작업이 재개됐다.

그러나 회사는 몇 주 뒤 총 516분의 작업중단으로 고정비 손실만 4억8000만 원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며 홍 대의원을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하고 1억100만 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도 제기했다. 이 사건은 2년 뒤 노동자 무죄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그 기간 노동자와 가족들은 고통받았고, 현장에는 안전 문제를 가지고 작업을 중지하면 회사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 학습됐다.

노동자의 쟁의행위뿐 아니라 안전 문제 제기에까지 손해배상으로 대응하는 회사의 태도는 이런 효과까지 계산한 노림수다. 손해배상청구 소송 당사자의 증언처럼 천문학적 숫자의 금액이 주는 '중압감'은 노동자를 짓누르고, 입을 다물게 하고, 무릎을 꺾이게 한다. 그 과정에서 일터는 위험해지고 노동자의 몸과 마음은 다친다. 노란봉투법, 노동자의 건강을 위해서도 지금 바로 필요하다.

[참고 자료]

1) 박주영, 최보경, 김란영, 윤지선, 박형근. 갚을 수 없는 돈, 떠나는 동료, 아픈 몸: 2018 손해배상·가압류 노동자 실태조사, 보건사회연구 2020, vol.40, no.3, pp.10 – 47 
2) 박주영, 소송 대상자의 구술기록을 통해 본 소송이 노동자 건강에 미치는 영향, 「헌법, 노조법과 손해배상가압류 소송기록을 통해 본 손배가압류 제도 토론회」, 2022. 6.30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최민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 일터 11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손배_가압류, #손해배상, #노조법, #노란_봉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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