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할힌골과 보이르호수 중간지점에 있는 석인상. 할힌골에는 아주 오랜 옛날 '맥족(코리)'이 북방에서 내려와 이곳에 잠시 머물다 동남쪽 부여로 이동해갔다는 구전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코리족은 고구려의 전신이랄 수 있다. 진품은 몽골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곳에 서있는 석인상은 복제품이다.
 할힌골과 보이르호수 중간지점에 있는 석인상. 할힌골에는 아주 오랜 옛날 "맥족(코리)"이 북방에서 내려와 이곳에 잠시 머물다 동남쪽 부여로 이동해갔다는 구전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코리족은 고구려의 전신이랄 수 있다. 진품은 몽골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곳에 서있는 석인상은 복제품이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일본작가 시바 료타로가 항상 고민하던 문제 중 하나는 "일본 국민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였다고 한다. 한국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특히 필자와 고조선유적답사단 안동립 단장이 상당한 인내심과 노력을 들여 동몽골여행을 고집한 이유이기도 하다.

동몽골에서 고대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된 코리족 이동설화나 유적이 전승되고 있는 지역은 도르노드아이막 할힌골솜의 보이르호수 주변과 수흐바타르 아이막 다리강가솜 지역이다. 몽골의 '아이막'은 우리의 '도'에 해당하는 행정구역 명칭이고 '솜'은 우리의 '군'에 해당하는 행정구역 명칭이며 몽골어 '골'은 우리의 '강'을 지칭한다.

이러한 전승은 몽골 동부지역 다리강가 출신의 언어학자인 '소미야바아타르' 교수의 저서인 <몽골, 한국민족의 기원과 언어문제>에서도 언급되어 있을 정도로 몽골학자나 해당 지역민들한테는 일찍부터 알려져 있다고 한다.

몽골수도 울란바타르에서 동쪽으로 1000km 이상 떨어진 할힌골은 흥안령 북부의 흑룡강 중상류 일대에서 만주로 나갈 때 대흥안령 북단의 눈강 루트와 함께 주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때문에 할힌골 지역은 역사적으로 대전투가 많이 일어난 곳이다. 가장 가까운 사례를 들자면 1939년에 일어난 일본 관동군과 소련군간의 격전을 들 수 있다.

북방과 만주를 잇는 주요 통로인 할흐골에는 아주 오랜 옛날 '맥족(코리)'이 북방에서 내려와 이곳에 잠시 머물다 동남쪽 '부여'로 이동해 갔다는 구전설화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고구려의 전신이랄 수 있는 코리족의 이동에 관한 구전설화가 전승되고 있는 할흐골솜은 동몽골의 광활한 대초원인 메넨긴탈 동쪽에 위치해 있다.

할힌골솜의 할흐골은 대흥안령의 남단에서 발원해 몽골과 중국 국경을 이루며 흘러온 할흐강이 보이르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할힌골 일대는 칭기즈칸의 몽골족이 발흥할 때 '타타르'족의 유목지이자 대량의 마필을 생산한 지역이다. 칭기즈칸이 여타세력과 전면전에 앞서 타타르족과 생사를 건 사투를 벌여 이곳부터 장악한 이유도 말의 확보 때문이었다.

필자 일행이 할힌골을 돌아볼 때 끝없는 초원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염소와 양보다 말과 소를 기르는 경우가 훨씬 많아 이곳이 양질의 목축지임을 알 수 있었다.
 
동몽골 할흐골에 있는 보이르호수 모습. 몽골에서 5번째로 큰 호수로 초원에 있어 평균 수심이 6m에 불과하지만 커다란 조개가 서식하는 호수로 유명하다. 여름이면 몽골인들의 휴식처로 수평선 너머에 중국국경이 있다.
 동몽골 할흐골에 있는 보이르호수 모습. 몽골에서 5번째로 큰 호수로 초원에 있어 평균 수심이 6m에 불과하지만 커다란 조개가 서식하는 호수로 유명하다. 여름이면 몽골인들의 휴식처로 수평선 너머에 중국국경이 있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이른 아침 보이르호수가에 갔더니 핸드폰 크기의 조개 50여 개가 파도에 밀려와 있었다. 몽골인들은 조개가 물을 정화해준다고 믿어 조개를 잡지 않는다고 한다. 일행은 파도에 떠밀려온 조개를 호수 속으로 던져주었다.
 이른 아침 보이르호수가에 갔더니 핸드폰 크기의 조개 50여 개가 파도에 밀려와 있었다. 몽골인들은 조개가 물을 정화해준다고 믿어 조개를 잡지 않는다고 한다. 일행은 파도에 떠밀려온 조개를 호수 속으로 던져주었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다음은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의 저자 박원길 교수가 1992년 7월 23일에 할힌골 일대를 방문했을 때 '잠수렌수렝' 촌로로부터 코리족의 이동설화를 녹취해 기록한 내용이다.
 
"할힌골 유역은 농경과 어로, 수렵과 목축을 모두 겸해서 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이 지방은 중국이나 만주로 이동하는 길목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옛날부터 수많은 민족이 이 지방을 거쳐갔다. 아주 오랜 옛날에 코리 사람들이 이곳에 살았다. 보이르호수가에는 지금도 코리왕의 초상이라고 하는 석인상이 남아있다. 이 석인상을 경계로 동쪽에는 코리 사람이 서쪽에는 몽골사람이 살았다. 이곳 할힌골에 살고있는 몽골인과 코리족간에는 왕래가 잦았으며 서로 결혼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초원에서 양족의 여자들이 오줌을 누다 서로 만나면 몽골 여자들은 왼쪽 손을 코리족 여자들은 오른쪽 손을 흔들어 서로 간에 우의를 표시했다. 코리인들은 할힌골에 성을 쌓고 살았다. 지금은 잊어버려 기억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코리 사람들은 이곳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고 동남쪽으로 이동해 갔다."

맥족계 민족의 건국설화는 주몽(東明)설화이다. 주몽설화의 개요는 코리국 혹은 부여 출신의 주몽이 하늘의 아들이며 활쏘기에 능숙하기 때문에 지배 세력의 미움을 받아 지지세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각형인 '애기 오보' 모습에 놀라기도

할힌골 전투 현장과 박물관을 방문한 필자와 안동립 단장은 박원길 교수가 기록한 석인상을 찾아서 동쪽 초원으로 계속 나가다 몽골인들이 '애기 오보'라고 부르는 오보를 둘러보았다. 일행이 '애기 오보'를 둘러본 순간 깜짝 놀랐다. 몽골 전역 3만킬로미터를 돌아보면서 500여기 이상의 오보를 보았지만 정사각형 오보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할힌골 박물관을 둘러보고 석인상을 찾아 동쪽으로 가다 '애기오보'를 만났다. 몽골전역을 돌며 500여 개의 오보를 만났지만 사각형오보는 처음이라 이채로웠다.
 할힌골 박물관을 둘러보고 석인상을 찾아 동쪽으로 가다 "애기오보"를 만났다. 몽골전역을 돌며 500여 개의 오보를 만났지만 사각형오보는 처음이라 이채로웠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이흐 부르한' 불상모습. 사암, 화강암, 벽돌, 천연진훍과 광물을 혼합해 100여 명의 장인이 만들었다고 한다.
 "이흐 부르한" 불상모습. 사암, 화강암, 벽돌, 천연진훍과 광물을 혼합해 100여 명의 장인이 만들었다고 한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오보'가 뭔지 모르는 분들은 우리나라의 고갯마루에 돌로 쌓은 서낭당을 상상하면 된다. 몽골 오보는 대개 고개나 산꼭대기, 샘, 강, 기묘한 모양을 한 언덕, 바위, 중요한 상징을 지니는 나무 주변에 세워져 있다.

'애기오보'를 떠나 동쪽으로 조금 더 가자 '이흐 브르한(Ikh Burkhant)' 불상이 나타났다. 1864년에 100명의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불상은 사암, 화강암, 벽돌, 천연 진흙과 다른 광물을 혼합해 만든 벽돌로 불상을 만들었다. 30미터 크기의 불상은 불력으로 동쪽 국경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일행이 목표로 했던 할힌골 석인상, 몽골 정부서 보호


일행의 목표는 해지기 전에 보이르호수 캠핑장에 도착해 숙소를 잡는 것이었다. 대초원을 달리며 GPS를 바라보던 가이드 저리거씨가 갑자기 차를 세운 곳에는 게르 한 채가 있었고 중년의 아주머니가 말을 타고 다가왔다. 저리거씨의 질문에 아주머니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일행이 그렇게도 찾던 석인상이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가까이 다가가니 책에서 여러 번 보았고 울란바타르 국립박물관과 초이발상 박물관에서도 보았던 석인상이다. 동쪽을 바라보며 오른손에 그릇을 들고 있는 석인상은 의자에 앉아있었다.
 
첫번째 석인상과 400m 떨어진 지점에 있는 또 다른 석인상 모습. 머리 부분이 잘린 채 땅바닥에 떨어져있어 안동립씨가 엄숙한 마음으로 묵례를 올린 후 다시 원상회복 하자 사진에서만 보았던 석인상이 드러났다.
 첫번째 석인상과 400m 떨어진 지점에 있는 또 다른 석인상 모습. 머리 부분이 잘린 채 땅바닥에 떨어져있어 안동립씨가 엄숙한 마음으로 묵례를 올린 후 다시 원상회복 하자 사진에서만 보았던 석인상이 드러났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할힌골 석인상 인근에 있는 유목민들의 묘지 모습.
 할힌골 석인상 인근에 있는 유목민들의 묘지 모습.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몽골인들이 사용하는 털모자를 쓰고 대초원을 바라보는 대리석 석인상. 근방에 대리석이 나올만한 지형이 없기 때문에 권력자의 동상이지 않을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저 석인상이 정말 우리의 조상인 코리족 왕일까? 석인상 옆에 세워진 안내문을 보니 13~14세기에 세워진 것이며 몽골정부에서 3번이나 조사 보호 중이라는 기록이 있었지만 석인상에 대한 내력을 정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초원을 바라보니 400여 미터 아래에 또 다른 석인상이 보인다. 해지기 전에 보이르호수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또 다른 석인상에 도착하니 머리가 잘려 땅에 떨어져 있었다. 안동립 단장이 엄숙한 모습으로 잘린 머리를 주워 석인상에 올려놓자 사진에서만 보았던 석인상이 나타났다.
 
동행한 안동립대표가 제작한 우리역사지도. 안동립씨는 고조선문화유적답사단 단장이자 동아지도 대표이다. 그는 고조선과 우리문화유적을 찾아내기 위해 몽골 9번, 중국과 내몽골지역(만주지역)을 10여회 답사했다. 지도속 둥근 원안에 보이는 할힌골과 다리강가에서 압록강유역까지는 약1000킬로미터 쯤 떨어져 있어 우리 조상들이 활동한 후 한반도로 내려왔다는 역사학자들의 주장에 수긍이 갔다.
 동행한 안동립대표가 제작한 우리역사지도. 안동립씨는 고조선문화유적답사단 단장이자 동아지도 대표이다. 그는 고조선과 우리문화유적을 찾아내기 위해 몽골 9번, 중국과 내몽골지역(만주지역)을 10여회 답사했다. 지도속 둥근 원안에 보이는 할힌골과 다리강가에서 압록강유역까지는 약1000킬로미터 쯤 떨어져 있어 우리 조상들이 활동한 후 한반도로 내려왔다는 역사학자들의 주장에 수긍이 갔다.
ⓒ 안동립

관련사진보기

 
러시아고고학자 '블라지미르 D 꾸바레프'의 저서 <알타이의 제사유적>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중앙아시아와 중부아시아의 옛 튀르크 석상' 모습들이다. 그의 연구서를 보면 고대 튀르크 석상 대부분은 좌정하고 있는 전사를 표현하며 한쪽 손에는 그릇을, 또 다른 손에는 허리띠나 칼자루를 쥐고 있다. 문화는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석인상은  중앙아시와 몽골을 거쳐 한반도에도 흘러들어왔을 거라고 추정된다.
 러시아고고학자 "블라지미르 D 꾸바레프"의 저서 <알타이의 제사유적>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중앙아시아와 중부아시아의 옛 튀르크 석상" 모습들이다. 그의 연구서를 보면 고대 튀르크 석상 대부분은 좌정하고 있는 전사를 표현하며 한쪽 손에는 그릇을, 또 다른 손에는 허리띠나 칼자루를 쥐고 있다. 문화는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석인상은 중앙아시와 몽골을 거쳐 한반도에도 흘러들어왔을 거라고 추정된다.
ⓒ 오문수

관련사진보기

         
안동립 단장은 동아지도 대표이기도 하다. 고조선지도와 고구려지도 등 9편을 자비로 제작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공한 안동립 단장. 귀국해 여러 가지 자료를 검색하며 평생을 지도 제작에 바친 안동립 단장이 제작한 고구려지도를 살펴보니 할힌골 바로 아래에 만주 하얼빈, 장춘에 이어 압록강이 나타났다. 그제서야 우리의 선조들이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내려왔을 거라는 사학계의 주장에 수긍이 갔다. 할힌골이 한반도와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채혁 교수는 "이 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가 한민족 이동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키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인의 기원> 저자 이홍규 교수의 한국인 DNA 추적로를 보면 아프리카→페르시아→티베트서부 및 중앙아시아→알타이산맥→바이칼호수일대→내몽골, 만주 및 한반도 일대로 흥미롭다. 석인상을 돌아본 일행은 보이르호수 캠핑장에서 1박 한 후 다음 행선지로 떠났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할힌골석인상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