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3분 안팎의 시간 동안 가볍게 듣는 노래 한 곡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가수뿐 아니라 작사가와 작곡가, 편곡가, 연주자, 그리고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엔지니어 등 상당히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 '종합예술'이라 불리는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져 극장에 걸리기 위해서도 배우와 감독, 작가, 연출부, 촬영팀, 조명팀, 미술팀, 소품팀, 편집팀, 홍보팀 등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 천 명에 달하는 많은 인력이 힘을 쏟아야 한다.

하지만 음악에서 싱어송라이터들이 있는 것처럼 영화에서도 재능 있는 몇몇 감독들은 혼자서 '1인다역'을 도맡아 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유난히 연출과 각본작업을 함께 병행하는 감독들이 많다. 실제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과 <모가디슈>의 류승완 감독,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 <수리남>의 윤종빈 감독,<명량>의 김한민 감독, <곡성>의 나홍진 감독 등은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의 각본 작업에 직접 참여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올드보이>와 <박쥐>,<헤어질 결심>으로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심사위원상, 감독상을 수상했던 박찬욱 감독 역시 자신이 연출한 영화 대부분의 각본을 직접 쓰는 대표적인 감독이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에게는 언젠가부터 국내에서 개봉됐던 모든 장편 영화의 각본을 함께 작업한 콤비(?)가 생겼다. 2005년부터 박찬욱 감독과 영화 5편의 각본작업을 함께 해오고 있는 정서경 작가가 그 주인공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대장금>을 끝낸 이영애가 차기작으로 결정한 영화였다.

<친절한 금자씨>는 <대장금>을 끝낸 이영애가 차기작으로 결정한 영화였다. ⓒ CJ ENM

 

'거장' 박찬욱 감독과 콤비(?) 결성한 작가

서울대 철학과를 중퇴하고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한 정서경 작가는 작은 영화사에 다니던 남자친구와 결혼하고 생계를 위해 기자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2002년 단편영화제에 응모하기 위해 만들었던 23분 짜리 단편영화 <전기공들>을 인상 깊게 본 박찬욱 감독의 러브콜을 받고 프로작가로 데뷔할 기회를 얻었다. 그 작품이 바로 박찬욱 감독 '복수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한 <친절한 금자씨>였다.

정서경 작가의 상업 시나리오 데뷔작이었던 <친절한 금자씨>는 박찬욱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과 이영애의 열연이 더해지면서 전국 360만 관객을 동원, 크게 성공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하지만 정서경 작가는 <친절한 금자씨>의 성공 이후 2006년 남선호 감독의 <모두들, 괜찮아요?>와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각각 전국 4700명, 73만 관객에 그치면서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렸다.

정서경 작가는 2009년 박찬욱 감독이 3년 만에 선보인 신작 <박쥐>의 시나리오를 공동집필했고 <박쥐>는 국내 220만 관객과 함께 박찬욱 감독에게 커리어 두 번째 칸 영화제 트로피(심사위원상)를 안겼다. 박찬욱 감독이 <박쥐> 이후 다시 긴 공백을 갖고 단편영화 연출과 할리우드 영화 <스토커> 연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제작 등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정서경 작가도 졸지에 긴 공백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정서경 작가는 공식적인 활동이 없어 보이는 시기에도 이경미 감독의 차기작 <비밀은 없다>와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시나리오를 집필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비록 <아가씨>는 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지 못했지만 '19금 영화'임에도 전국 42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박찬욱 감독 영화 중 < 공동경비구역 JSA > 이후 가장 좋은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정서경 작가는 2017년 <미옥>의 각색 작업과 2018년 <독전>의 각본작업에 참여했다.

2018년 이보영 주연의 tvN 드라마 <마더> 각본을 쓰며 드라마에 진출한 정서경 작가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각본을 쓰며 박찬욱 감독의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에 기여했다. 칸 영화제 3회 수상에 빛나는 '거장' 박찬욱 감독이 "내 영화 경력은 정서경과의 만남 전후로 나뉜다"고 말할 정도로 거물 작가로 자리 잡고 있는 정서경 작가는 방송 6회 만에 시청률 8%를 돌파한 tvN 주말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각본을 썼다(닐슨코리아 기준).

여우주연상 3개 휩쓴 이영애의 대표영화
 
 눈 주변을 빨갛게 칠한 금자씨의 독특한 화장은 '이영애이기에' 잘 어울릴 수 있었다.

눈 주변을 빨갛게 칠한 금자씨의 독특한 화장은 '이영애이기에' 잘 어울릴 수 있었다. ⓒ CJ ENM

 
2004년 3월 MBC의 사극 <대장금>이 50%가 넘는 시청률로 종영하자 <대장금>과 이영애의 인기는 국내는 물론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대장금> 신드롬'은 분명 이영애에게 더할 수 없는 영광이었지만 차기작에 대한 고민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이영애가 어떤 작품을 하더라도 관객들은 이영애에게서 장금이를 찾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영애가 독특한 스타일의 <친절한 금자씨>를 차기작으로 결정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친절한 금자씨>는 여성의 복수를 다룬 영화다. 게다가 이영애라는 당대 최고의 여성스타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만큼 전작 <복수는 나의 것>이나 <올드보이>처럼 선혈이 낭자한 복수의 방식은 어울리지 않았다. 따라서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는 금자씨가 '복수를 통한 영혼의 구원'을 원하는 캐릭터로 그려지길 원했다. 그리고 이영애는 완벽한 연기변신에 성공하며 청룡영화상과 백상예술대상, 디렉터스 컷 어워즈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이영애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교도소 장면을 제외하면 내내 짙은 붉은색 눈화장을 하고 나온다. 금자씨의 교도소 동료들은 하나 같이 출소한 금자씨를 보고 "화장이 그게 뭐니?"라고 질문한다. 이 때 금자씨는 "친절해 보일 까봐"라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하는데 실제 이 대사는 예고편에 들어가며 유명해졌다. 사실 초본에는 짙은 스모키 화장이었지만 스모키 화장으로는 도저히 이영애의 미모를 가릴 수 없어(?) 더욱 강렬한 화장으로 바꿨다고 한다.

백한상(최민식 분)이 저지른 죄를 뒤집어 쓰고 13년 동안 복역하며 복수를 꿈 꿔 온 금자씨는 출소 후 백한상의 휴대전화에서 또 다른 피해자들의 소품을 발견한다. 폐교로 피해자 가족들을 불러 모은 금자씨는 피해자 가족들에게 '개인적 응징'과 법의 심판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투표 결과 금자씨를 용서하기로 한 원모 부모를 제외하고 7:2로 개인적 응징 의견이 우세했으며, 결국 백한상은 분노에 찬 피해자 가족들로부터 '개인적 응징'을 당했다.

<친절한 금자씨>에는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대거 카메오로 출연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서로 대치했던 송강호와 신하균은 금자씨와 제니(권예영 분)를 납치하려다가 금자씨의 총에 맞고 즉사한다. 이 밖에 강혜정이 원모 사건을 보도하는 앵커, 윤진서가 금자씨의 동료 재소자로 출연했고 유지태는 금자씨의 환영에서 성장한 원모로 등장해 그녀의 입에 재갈을 물린다.

일말의 동정조차 필요 없는 절대악 
 
 최민식은 <올드보이>에 이어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두 편 연속으로 출연했다.

최민식은 <올드보이>에 이어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두 편 연속으로 출연했다. ⓒ CJ ENM

 
2000년대 초반 최민식은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과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등 칸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작품들에 연속으로 주인공을 맡으며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최민식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3부작 마지막 작품인 <친절한 금자씨>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백한상으로 출연했다. <친절한 금자씨>와 박찬욱 감독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없다면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다.

최민식이 연기한 백한상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요트를 사기 위해' 무려 5명의 아이들을 유괴·살인하고 금자씨의 딸 제니를 호주로 입양 보낸 '빌런'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끝까지 백한상의 유괴목적이었던 요트를 사려는 이유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정서경 작가의 말에 따르면 박찬욱 감독이 백한상을 '태생부터 악마'로 지정했다며 백한상에게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인간적인 이유를 부여하기 싫었다고 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저마다의 사정을 가진 많은 여성 재소자들이 출연하지만 그 중에서 관객들에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인물은 고수희가 연기했던 마녀였다. 바람이 난 남편과 불륜녀를 죽이고 그들의 살점을 구워 먹어 교도소에 들어온 '마녀'는 밥에 꾸준히 소량의 락스를 뿌린 금자씨의 작전으로 몸이 점점 약해지다가 3년 만에 사망했다. 그 사건 이후 금자씨는 교도소 내에서 '마녀'라는 별명을 물려 받게 됐다.

오수희는 간통죄로 교도소에 오게 된 재소자로 불륜을 극도로 싫어하는 마녀에게 심한 괴롭힘을 받다가 금자씨에 의해 고통에서 벗어나고 금자씨를 돕기로 한다. 출소 후에는 장신구 공방을 차려 '무조건 예쁜 게 좋은' 금자씨의 권총에 화려한 은장식을 만들어준다. <친절한 금자씨>는 오는 28일 개봉하는 <정직한 후보2>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라미란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하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친절한 금자씨 박찬욱 감독 정서경 작가 이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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