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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가 만든 형제복지원 모형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가 만든 형제복지원 모형
ⓒ 한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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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9일 <알자지라>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다룬 '강간, 노예노동, 살해가 자행된 한국의 공포의집'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다큐에서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한국전쟁 후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 중 가장 어두운 역사의 한 장면이라고 묘사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 인터뷰를 통해 1976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에서 가장 잔인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이 다큐를 보면서 내가 특별히 분노하고 가슴 아팠던 것은 형제복지원 사건의 가해자인 박인근 일가가 형제복지원에서 착복한 돈으로 지금도 호주에서 잘살고 있으며 피해자들에게는 한 마디의 반성과 사과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 24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과를 이렇게 밝혔다.

"공권력이 직·간접적으로 부랑인으로 칭한 사람들을 형제복지원에 강제수용해 강제노역, 폭행, 가혹행위, 사망, 실종 등 중대한 인권침해가 있었음을 확인... 형제복지원 운영과정에서 감금 상태에 있던 피수용자는 강제노역, 폭행, 가혹행위, 성폭력, 사망에 이르는 등의 인간 존엄성을 침해받았으며, 국가가 형제복지원에 대한 관리 감독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확인... 국가는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문제에 대한 진정을 묵살했고, 사실을 인지했으나 조치하지 않았으며,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을 축소 왜곡해 실체적 사실관계에 따른 합당한 법적 처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을 거쳐 간 입소자는 1975년부터 1986년까지 3만 8000명이었다. 전두환 정권 전성기인 1984년에는 수용자가 4355명이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는 당시 형제복지원에 부친, 누님과 함께 감금되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형제복지원에서의 후유증으로 그의 부친과 누님은 평생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부친은 지난 4월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지난 24일부터 26일까지 한종선 대표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형제복지원, 정신과 신체가 만신창이 되는 곳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오른쪽 두번째)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오른쪽 두번째)
ⓒ 한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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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복지원 사건이 지난 24일 진화위에서 진실규명된 것을 축하드린다. 감회가 어떤지?
"아직은 반신반의 상태다. 국가공권력으로 인해 아무 죄도 없이 수용당한 후 진상규명 없이 국가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은폐하는 데 앞장섰고, 수십 년이 지난 이제서야 진상조사를 하고 1차 조사 결과를 내놨다는 것에, 아직 국가로부터 그 어떤 사과나 후속 약속도 받은 것이 없는 상태에서 또다시 국가에 이용당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진화위에서 1차 조사 결과로 국가폭력이 있었음을 명시하고 국가가 피해자들께 사과를 해야 된다는 사실을 내놨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기도 했다."

- 먼저 선생님과 누님에 대한 소개 부탁드린다. 어떤 사연으로 누님과 함께 형제복지원에 끌려가게 된 것인지?
"1984년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저와 4학년이었던 누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일 안 나가시고 집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가방 놓고 나와 봐라' 해서 아버지 따라 시내 구경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던 길에 동광파출소에서 저희에게 '안에서 잠시 기다리라' 하고 나간 후, 파출소 앞에 형제복지원 차량이 도착해 파출소 순경들과 악수하고 무슨 사인 같은 것을 한 후 경찰이 저희 남매를 차량에 실어서 형제복지원에 가게 되었다."

- 형제복지원에서는 누님과 언제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지면서 폐쇄할 때 '서울소년의집'이라는 곳으로 전원 조치되어 나오게 되었다. 그곳에 4년 수감되어 있다가 1991년 내가 용접사 자격증을 따고서야 비로소 바깥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누나는 1987년 형제복지원에서 강제귀가조치 당해 정신이상인 상태에서 거리에서 생활하셨다. 그러다가 행려환자로 구분되어 1989년부터 연산정신병원에서 생활하셨다. 누나는 작년 12월까지 정신병원에서 생활하시다 지금 저랑 살고 있다."

- 부친도 1986년 형제복지원에 끌려가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버지는 1986년에 동광파출소를 통해 형제복지원으로 잡혀 오셨다. 거기서 정신이상이 오셔서 1987년 폐쇄 때 강제 퇴소 후 거리에서 생활하셨다. 1989년부터 부산 대남정신병원에 행려환자로 다시 잡혀가시고 그 후 지금까지 평생을 정신병원에서만 생활하셨다. 올해 4월 코로나로 인해 돌아가셨다."

- 젊은 세대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모르는 이들이 많다. 회상하고 싶지 않겠지만, 형제복지원에서 겪은 고통스러운 경험 몇 가지를 소개하면?
"형제복지원은 4천여 명이 군대 방식으로 단체생활하는 곳이다. 새벽 4~5시쯤 기상해 저녁 8시까지 매일 눈떠있는 내내 구타와 기합, 고문, 동성간 성폭행, 맞아서 장애가 생기거나 죽고, 강제노역으로 정신과 신체는 만신창이 되는 곳이다.

지시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폭력을 동원해 정신과 약인 씨피제 같은 것을 강제로 먹였다. 덜 맞는 날엔 내일은 더 심하게 당할 것을 예상하고 불안 속에 살아야 했다."

공소시효와 소멸시효, 누구를 위한 법인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가 만든 형제복지원 모형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가 만든 형제복지원 모형
ⓒ 한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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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복지원에서의 일과는 주로 어떻게 되었는지?
"1984년 내가 형제복지원에 들어갔을 때는 모든 건물이 완공된 시점이라 땅을 파고 흙을 나르고 하는 강제노역은 없었다. 하지만 매일 기합을 받고 몽둥이로 맞거나 발바닥을 맞고 온갖 고문에 가까운 기합을 받으면서 살았다. 구타와 폭력으로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단체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간혹 박인근 원장의 수입 창출을 위해 생산품 노역 등을 하기도 했다."

- 형제복지원에서 나온 후 지금까지 어떤 세월을 사셨는지?
"다른 시설인 '서울소년의집'으로 옮겨지며 초등학교 6학년까지는 다녔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용접기술 자격증을 취득해 사회로 나왔다. 하지만 '노동의 대가'나 돈의 쓰임이나 가치를 시설에서는 배운 적이 없어서 언제나 노동력을 착복 당하며 살게 되었다. 그나마 다니던 공장도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쫓겨났다.

오갈 데 없이 살아야 해서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만 알기에 결국 도둑질도 하고 비행 청소년으로 지내다 교도소에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닥치는 대로 막노동에서부터 중국집 배달, 신문 배달, 우유 배달, 전단지 뿌리기 등 몸으로 할 수 있는 별의별 일들을 하면서 살아왔다."

- 누님은 지금도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계신데, 두 분의 형제복지원 트라우마와 후유증을 몇 가지 소개하면?
"트라우마라는 것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그런 것이다. 정신적 트라우마와 육체적 트라우마, 그리고 감각에 의한 트라우마가 있다. 정신적 트라우마는 기억하기도 싫은 형제복지원에서의 생활이 매일 머릿속에서 반복되고 있고, 육체적 트라우마는 몸에 남은 당시에 입은 흉터와 상처들로 인해 몸이 망가지는 것을 현재에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감각적 트라우마는 우연히 사물을 보았을 때 기억이 갑작스럽게 그때로 되돌리며, 후각 역시 갑자기 어떠한 냄새가 형제원에서 맡았던 냄새와 같을 시 그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청각 역시 같다. 형제원에서 자주 불렀던 노래라든가, 영화 속 언어폭력의 톤이 형제원 조장들의 톤과 맞을 때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그런다."

- 2005~2010년 1기 진화위에서는 왜 형제복지원에 대한 조사가 안 이루어졌나? 피해자들이 당시 진실규명 신청을 못 한 이유는?
"당시 진화위는 대부분 정치적인 것, 그리고 민주화에 대한 것들이 항상 뉴스에 나왔고, 우리는 이른바 '부랑인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다 보니 아마도 '신청하다 또 잡혀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또 진화위가 뭐 하는 곳인지도 잘 알지 못했다."

- 지난해 12월 10일 <알자지라>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다룬 다큐 <공포의집>을 보면 가해자인 박인근 일가들은 과거 형제복지원에서 갈취한 재산을 '쌈짓돈'으로 삼아 지금도 호주에서 골프장을 운영하며 잘살고 있다. 이런 뉴스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대한민국이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인지, 법치주의국가라면 헌법의 중요성, 필요성, 다양성 등을 바탕에 두고 죄지은 자를 벌하고 약자의 편에 서서 약자들을 구제해야 한다. 그럼에도 정부가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민다. 또 한편 공소시효와 소멸시효는 누구를 위한 법인가 하는 의문점이 든다."

"행안부, 진화위 권고사항 조속히 따라야"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가 그린 형제복지원 당시 그림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가 그린 형제복지원 당시 그림
ⓒ 한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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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화위가 과거 인권침해사건 피해자들을 위한 배보상 조치를 권고했으나 행안부는 진화위의 권고조치 문서를 반송하며 접수를 거부하고 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안부의 조치를 접하고 드는 생각은?
"대한민국은 애초부터 수많은 국가폭력피해자들에게 배보상 부분만큼은 그 어떤 나라보다 인색했다. 진상규명을 위한 법 하나 통과시키는 과정만 봐도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 그것을 보여준다. 지금 진화위에서 배보상을 행안부에 권고했다 하더라도 당장 이루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역대 국가폭력 피해당사자들은 진상규명 후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왔다.

진화위에서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라고 권고한 사실은 역사로 남을 수밖에 없기에 윤석열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는다면 민주국가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대통령만의 대한민국이 아니기에 민주적 헌법 가치를 명확히 안다면 대통령이 진심을 담은 사과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행안부는 진화위의 권고사항을 조속히 따라야 한다." 

- 윤석열 정권은 탈북어민 북송사건에는 인권침해라며 열을 올리는 반면 형제복지원사건 피해자 분들의 인권침해와 고통에는 너무나 무관심 한 것 같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 대표로서 이 사건과 관련해 윤석열 정부에 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형제복지원 사건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세히 알지도 못할 것이다. 이른바 '부랑인수용소'에 갇혔던 사람이니 그저 '부랑인'이었던 사람으로 아직도 인식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생존자들은 당당하게 국가폭력에 맞서 진상규명을 요구한, 배워야 할 시기에 배우지 못하고 온갖 폭력과 살해 위협 속에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들이 돈 몇 푼에 위로받고 편안한 삶을 누리고자 지금까지 살이 온 것이 아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 피해자들의 삶은 사람이라는 존재가치와 인간으로써의 권리를 뚜벅뚜벅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달려온 것처럼, 대통령이라는 권좌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 권위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과거 학살과 인권침해 피해자들에게 진정한 사과조차 하지 못한 겁쟁이 전두환은 그 권위 자체가 없다.

민주주의 대통령의 권위는 힘이 있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힘없는 약자들이 겪은 아픔과 상처를 제대로 보듬는 데에서 그 권위는 빛을 발할 것이다. 과거를 잊은 사람이 미래를 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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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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