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굴 이야기> 스틸 컷

<금정굴 이야기> 스틸 컷 ⓒ 전승일

 
"EBS의 < 지식채널 e > 프로그램이 심의실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다른 아이템으로 긴급 대체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EBS 사측은 오늘(2월 20일) 개최된 특별심의위원회를 통해 < 지식채널 e >의 '구럼비' 프로그램이 '총선을 앞두고 있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 시기'라는 이유로 방송 부적합 판정을 내렸다." - 2012년 02월 21일 전국언론노동조합 <EBS 너 마저> 논평 중

딱 10년 전 이명박 정부 말기다. 사내 심의 기구인 EBS 심의실은 정치적 이유를 들어 당시 인기리에 방송되던 < 지식채널 e >의 특정 에피소드를 불방시켰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하던 시기 제작된 '구럼비' 편은 제주 강정마을의 구럼비 바위에 얽힌 전설 및 주변 생태계를 소개하고 구럼비 바위가 지닌 문화적‧역사적 가치를 다뤘다.

이에 대해 당시 EBS 심의실은 "최근 수년간 국가안보론과 환경보전론, 국가이익과 지역사회 이익의 충돌 등이 얽혀있는 사안으로서, 최근 우리 사회의 이념적 대립과 정쟁 격화의 양상에 비추어 볼 때 사회통합의 측면에서 매우 우려되는 소재"라는 장황한 이유로 '구럼비' 편이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공정성)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직후 EBS PD들은 단체 성명을 내고 "이런 결정이 계속 정당화된다면 우리는 끔찍한 자기검열의 시대를 살아야 할 것"이라며 "시청자의 편이 아니라 정치권의 눈치나 보면서 자신이 만드는 프로그램이 방송이 될 수 있을 것인지를 먼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이는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미래"라고 반발한 바 있다.

지난 3월 EBS 김유열 사장이 취임한 가운데 EBS가 다시 한번 검열을 휘두르는 상황이 발생해 주목된다. 그것도 사내 PD가 만든 프로그램이 아닌 22일 개막한 2022 EBS국제다큐영화제(EIDF)에 출품된 기성 감독의 작품을 상대로 한 "방송불가" 판정이라 영화계 안팎의 반발이 예상된다.

극장 상영은 되고, EBS 방영은 안 된다?
 
 <금정굴 이야기> 스틸 컷

<금정굴 이야기> 스틸 컷 ⓒ 전승일

 
'방송사의 사정으로 8월 28일 일요일 22:50 방송 예정이었던 <금정굴 이야기>는 <#체인지더네임>으로 변동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지난 18일 EIDF 홈페이지에 공개된 공지다. 1950년 경기도 고양시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을 주제로 한 전승일 감독의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금정굴 이야기>는 올 EIDF '단편화첩' 섹션 상영작으로, 오는 26일 극장 상영과 28일 EBS 방영을 앞두고 있었다.

EBS의 방송 불가 판정이 알려진 것은 전 감독이 23일 개인 소셜 미디어를 통해 해당 판정을 알리면서다. 전 감독은 "황당한 일 발생"이라며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금정굴 이야기> 극장 상영은 아무 문제 없는데, 방송은 심위위원회에서 '방송불가' 결정이랍니다"라고 밝혔다.

이후 전 감독이 공개한 EBS 심의실의 '방송 불가' 사유는 단 한 장면의 자막이었다. 영화 전반부 "한국의 군대와 경찰은 1950년 7월부터 10월까지 최소 10만 명의 민간인을 아무런 재판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학살했으며 미군은 이를 묵인·방조했다"는 자막을 문제 삼은 것이다.

전 감독에 따르면, EBS 심의실은 이 영화 속 해당 자막의 사실 여부를 영화제 코디네이터에게 확인했고, 이후 '방송 불가' 판정을 EIDF 조직위에 문서로 하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24일 항의 성명을 준비 중인 전 감독은 "시중에 출간되어 있는 서적과, 위키백과 보도연맹사건 내용을 참고했다"며 "이승만 정부 시기의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은 이미 널리 밝혀진 역사적인 '팩트'"라고 반박했다.

이와 관련, <금정굴 이야기>는 1950년 경기도 고양시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을 주제로 삼았으며, 해당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금정굴인권평화재단이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또 지난 2007년 7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혹은 과거사위)도 '진실규명 결정'을 한 바 있다.

당시 과거사위는 금정굴 사건에 대해 "고산돌 외 75명을 포함한 153명 이상의 고양지역 주민들이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9일부터 10월 31일 사이에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고양경찰서 경찰관에 의해 고양시 소재 금정굴에서 집단총살 당하였다"며, '경찰에 의한 불법적인 집단학살 사건'이며, '최종 책임은 국가에 있으므로 국가가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을 골자로 하는 결정 내용을 공개하기도 했다.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신기철 지음, 자리출판사), <국민은 적이 아니다>(신기철 지음, 헤르츠나인),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신기철 지음, 인권평화연구소), <전쟁의 그늘>(인권평화연구소),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신기철 지음, 인권평화연구소), <골령골의 기억전쟁>(박만순 지음, 고두미), <전쟁 속의 또 다른 전쟁>(서중석 외 지음, 도서출판선인), <한국전쟁과 집단학살>(김기진 지음, 푸른역사),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김기진 지음, 역사비평사).'

전 감독이 공개한 참고 서적 목록들이다. EBS 심의실 측이 영화제 측에 문의했다는 사실 여부의 참고 자료라 할 수 있다. 24일 성명서 연명을 위한 개인과 단체를 조직 중인 전 감독은 "영화제 측은 해당 판정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안다"며 "영화관 상영은 문제 없고 EBS 방영만 불가 처리한 EBS 심의실과 심의위원회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제19회 EIDF 공식 포스터

제19회 EIDF 공식 포스터 ⓒ EBS

 
이와 관련, EIDF 측 관계자는 24일 오후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EBS 측으로부터 방송 불가 결정이 내려와 영화제 내부 스태프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면서 "영화제 사무국과 EBS 영상 부서 차원에선 최종 결제(결정)를 미루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다"라고 밝혔다.

같은 날 EBS는 사 차원에서 입장을 내고 "(<금정굴 이야기>가)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공정성)와 제14조(객관성) 조항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여 대체 편성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EBS가 방송 불가 사유로 든 규정은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공정성)과 제14조(객관성)로 '방송은 사실을 정확하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다루어야 하며, 불명확한 내용을 사실인 것으로 방송하여 시청자를 혼동케 하여서는 아니된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EBS는 "방송 프로그램은 충분한 상황 및 시대적 맥락을 설명해야 하나, 방송 심의 과정에서 해당 작품은 18분 길이의 단편작품으로 압축과 은유를 통해 상황과 맥락을 표현하다 보니, 객관적 자료 제시나 데이터에 대한 출처 표시 등이 부족한 점으로 인해 시청자들이 프로그램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불충분한 점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며 "해당작품은 애니메이션, 콜라주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 사회공동체적 트라우마를 재해석한 작품으로 그 작품적 가치는 존중된다"고 덧붙였다.

EBS가 확인시켜 준 시대의 역행
 
 <금정굴 이야기> 스틸 컷.

<금정굴 이야기> 스틸 컷. ⓒ 전승일

 
"금정굴 학살은 1995년에 PD수첩에서 저의 취재로 처음 방송해 많은 국민들이 충격을 받았던 사건입니다. 당시 학살에 참여한 우익단체의 항의는 있었지만 방송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2022년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영화제는 표현의 자유를 지켜내지 못하면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한 번 이런 문제가 생기면 오랫동안 잘 가꿔온 영화제가 그 위상에 타격을 받습니다. 과거 <다이빙벨>을 둘러싼 부산영화제의 어려움을 잘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한국 다큐멘터리계의 큰 자산인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기 바랍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 <공범자들>의 감독이자 지난 1995년 < PD수첩 >에서 '금정굴 학살'과 발굴과정을 취재했던 최승호 <뉴스타파> 기자가 24일 <금정굴 이야기>에 대한 EBS의 결정을 접한 뒤 소셜 미디어에 개진한 의견 중 일부다.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네요"란 최 기자의 한탄이 눈에 띈다.

이처럼 전 감독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EBS의 결정에 대한 영화계 안팎의 반발과 우려가 예상된다. 전 감독은 연명 중인 성명서에서 "EBS 심의위원회는 <금정굴 이야기> '방송불가'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문서로 밝히고, 이를 영화제팀과 감독에게 공개하여야 한다"며 "EBS 심의위원회는 <금정굴 이야기> '방송불가' 결정을 즉각 철회해야 하고, 방송 일정을 다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정굴 사건이 언론 보도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 1995년이고, 진실화해위 결정은 2007년 일이다. 또 EBS의 < 지식채널 e > 방송 불가 결정이 2012년이었다. 그 10년 전 < 지식채널 e > 사태 당시 EBS PD 들은 "끔찍한 미래"를 우려했다. 

18분 분량의 단편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에 "객관적 자료 제시나 데이터에 대한 출처 표시" 등을 요구하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EBS의 금번 결정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주목된다. 
EBS 금정굴이야기 EIDF 전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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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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