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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실 자료사진(기사와 직접적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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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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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 측의 말만 들으면, 전국의 쿠팡물류센터에 설치됐다는 노동자 휴게실은 노동자친화적으로 보인다. 그 휴게실엔 여름을 기준으로 냉방시설이 설치돼 있고, 노동자들이 먹고 마실 수 있는 얼음물과 아이스크림도 구비돼 있다. 쿠팡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인 쿠팡플레이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를 마음껏 시청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돼 있다. 이 홍보가 사실이라면, 지난 18일부터 시행되기 시작한 '휴게시설 설치 의무화 제도'를 이미 선제적으로, 그것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본보기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작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말은 다르다. 민병조 공공운수노조 쿠팡물류센터지회장은 지난 16일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쿠팡은 휴게실에 에어컨을 달았다고 홍보하지만 실제로 노동자들은 쉬는 시간이 부족해서 휴게실에 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유는 이렇다. "식사시간 60분을 제외하면 휴게시간은 10분이 있는데 휴게실이 멀기 때문에 갔다 왔다 하면 휴게 시간이 끝나고, 그마저도 휴게소 수용인원이 너무 적어서 안 가는 분들이 더 많다."

<한겨레>에 글을 기고한 쿠팡물류센터 노동자 김미르씨(필명)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곳엔 휴게실이 없다. 휴게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곳은 있지만, 신입사원 교육장 또는 일용직 사원들이 퇴근카드를 찍고 나가는 장소로 이용된다. 사실 휴게실이 있어도 소용없다. 일하는 중간에 쉬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은 '밥 먹는 딱 한시간'이 전부다."(8월 17일 보도)

모델하우스 같은 휴게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 조합원들이 지난 1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대학사업장 집단교섭 투쟁 결의대회를 열고 대학청소, 경비, 주차시설관리노동자 등의 휴게실 개선, 샤워실 설치를 산업안전보건법으로 의무화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 조합원들이 지난 1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대학사업장 집단교섭 투쟁 결의대회를 열고 대학청소, 경비, 주차시설관리노동자 등의 휴게실 개선, 샤워실 설치를 산업안전보건법으로 의무화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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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노동자가 편히 쉴 수 있는 휴게실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있어도 이용할 수 없다면 그 역시 문제다. 아무리 좋은 휴게시설들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실사용이 불가능하다면, 사실상 아파트가 완공되기 전의 집 구조를 미리 재현해놓기만 한 '모델하우스'나 다름없다. 쿠팡물류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증언이 맞다면, 왜 쿠팡은 노동자들이 이용하지도 못하는 '모델하우스 같은 휴게실'을 설치해놓은 것일까?

이 휴게실은 폭염에 그대로 노출된 채 일하는 물류센터 노동자를 위한다고 사측이 내놓은 '무더위 대책' 중 하나였다. 대책이라고 세운 것이 노동자에게는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 휴게실이 실은 노동자를 위한 시설이 아니라 사업주를 위한 용도로 지어진 건 아닐까?

사실 노동자친화적으로 '보이는' 휴게실을, 노동자가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지와는 무관하게 설치됐다고만 홍보하는 쿠팡의 대응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그 현실은 어쩌면 '휴게시설 설치 의무화 제도'의 앞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제도에는, 돈이 드는 부분과 관련된 여느 노동법이 그렇듯, 사업장 규모에 따라 휴게실 미설치가 합법처럼 간주되는 곳이 예외적으로 존재한다. 의무적으로 설치를 해야 하는 사업장에서는 법이 규정한 한도 내의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지 못할 경우 과태료를 물어야 하는데, 그 기간을 일부 유예받을 수도 있다. 거기까지는 노동법이 그동안 제·개정돼 온 경험칙상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 있지만, 또 다른 문제가 남는다. 바로 '휴게시설 설치·관리기준' 안에 있는 '최소'규정이다.

'산업안전보건법' 제128조의2 제2항에 따르면, "휴게시설을 갖추는 경우 크기, 위치, 온도, 조명 등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하는 설치·관리기준을 준수해야 한다." 이는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 제194조의2에 그 조건들이 더 명확히 제시되어 있다. 이중 주목할 조건은 아마도 휴게시설의 크기 부분일 것이다. 사업주는 한 사업장 내에 바닥면적 '최소' 6㎡(1.815평), 천장높이 '최소' 2.1m의 규격을 갖춘 휴게실을 노동자들에게 제공해야 한다.

이 최소규격의 문제는 수용인원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만약 300명이 일하는 한 사업장에 6㎡ 면적의 휴게실이 생겨도 규정을 지킨 것이 된다. 이는 한 사업장에 최소규격을 갖춘 하나의 휴게실'만' 있어도 상관없다는 의미다. "다만, 둘 이상의 사업장의 근로자가 공동으로 같은 휴게시설(아래 공동휴게시설)을 사용하게 하는 경우 공동휴게시설의 바닥면적은 6제곱미터에 사업장의 개수를 곱한 면적 이상으로 한다." 물론 이때도 수용인원의 최대치는 없다.

최소규정만 지키면 '합법적인 휴게실'이 되므로, 6㎡ 안에 노동자들이 다 들어갈 수 없는 휴게실을 만들어놓은 사업주들은 이제 이렇게 항변하지 않을까? '우리는 법대로 휴게실을 설치했다. 그것을 이용하는 건 이제 노동자 개인의 몫이다. 우리는 할 만큼 다했다. 더 이상 뭘 해줘야 하나?' 

노동자가 몇명이든 1.8평이면 "합법"
 
지난 7월 연세대학교 청소노동자가 계단 밑 자투리 공간을 개조해 만든 휴게실 내부를 보여주며 구조상 어쩔 수 없이 허리를 숙여 생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7월 연세대학교 청소노동자가 계단 밑 자투리 공간을 개조해 만든 휴게실 내부를 보여주며 구조상 어쩔 수 없이 허리를 숙여 생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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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주가 비용을 들여야 하는 노동법은 항상 그 법 안의 최소규정이 일반화되는 현상을 띤다. 노동자 수가 많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최소규격의 휴게실을 '알아서' 이용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끼리 쉬는 순번을 나눈다든지, 아니면 휴게실 이용을 아예 포기한다든지의 선택지만 남은 셈이다.

최저임금이 그렇듯, '최소나 최저'라는 수식이 붙으면 노동자에게는 무조건 불리한 조건이 된다. 그 조건을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사업주 입장에서는 비용을 그나마 최소로 지불할 수 있는 가장 합법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휴게시설 설치 의무화 제도'가 생긴 이유를 다시 상기해보자. 벌칙규정이 있는 법으로 의무화하지 않으면, 사업주가 노동자의 "건강권 확보"를 위한 휴게시설 설치를 '당연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벌칙규정 없는 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법'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제·개정되는 노동법은 애초의 목적에 부합하는 역할을 하기보다, 처벌받지 않는 선에서 비용을 최소화하거나 법망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의 커트라인에 더 가까워졌다. 기업이 법의 존재이유를 망각하고, 그 허점만을 노린 결과다. "기간제근로자 및 단시간근로자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을 시정하고 기간제근로자 및 단시간근로자의 근로조건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제정된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되레 양산형 '2년 미만의 근로계약'을 활성화시킨 것이 단적인 예다. 법이 제·개정된 목적은 사라지고 그걸 회피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만 남은 셈이다. 그동안 왜 사업주들이 노동자를 위한 휴게실을 만들어주지 않았느냐를 생각해보면 답은 뻔히 나온다.

자본 디엔에이(DNA)를 갖춘 이들은 비용을 줄이기 위한 이러한 편법적 조치가 무슨 대단한 경영기법인 양 이야기하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당연한 본능이라고 규정짓는다. 이는 우리 사회가 어떤 식으로 이익을 편취하든 그 방법이 불법만 아니라면 '무조건' 허용하는 사회가 됐다는 의미가 아닐까?

최소의 규정만 지키면 어떻게 사업을 하든 옳다고 보는 세상에서 노동자들은 결국 위태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노동자친화적으로 '보이는' 휴게실 안이 아니라 그 밖에서 쉬는 노동자들을 상상하는 것이 전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쿠팡물류센터 노동자들처럼 있는 휴게실도 이용하지 못하는 현실을 막아야 할 제도가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부추긴다면, 그 제도 자체에 무언가 문제점이 있다는 방증은 아닐까?

물론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 제194조의2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이용하기 편리하고 가까운 곳에" 휴게실이 있어야 하기에, 쿠팡물류센터의 휴게실은 적절한 위치에 재설치 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해석을 요한다. 적절한 위치의 기준점이 개인마다 천차만별이듯 이용하기 편리하고 가까운 거리의 척도도 최대 몇 m 이내와 같이 정확히 기재되지 않는 한, 사업주도 노동자도 전혀 다른 기준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법은 이 모호한 기준에 대해 다음 문장에서 힌트를 주기는 한다. "공동휴게시설은 각 사업장에서 휴게시설까지의 왕복 이동에 걸리는 시간이 휴식시간의 20퍼센트를 넘지 않는 곳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휴게시간의 20퍼센트도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휴게시간이 식사시간을 포함한 것인지, 아니면 근로시간 도중의 짧은 휴식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인지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왕복 이동에 걸리는 시간도 그렇다. 어느 정도 빠르기로 걸어서 걸린 시간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경험칙상 이 애매한 부분은 결국 사업주의 해석에 따라 이행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원래, 애매모호한 조항은 있으나 마나 하다. 이를 '최소규정의 딜레마'라 할 수 있겠다. 최소규정으로 확실히 하면 그 기준만 지키는 것으로 악용되고, 최소규정조차 없이 애매모호한 단어만 있으면 아예 지키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이는 수단과 방법만 남은 법치주의의 이면이자, 그것이 사실상 전부가 된 세상에서 노동자가 겪어야 할 비극으로 보인다.

태그:#휴게시설 설치 의무화 제도, #산업안전보건법, #노동법, #최소규정, #휴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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