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8일, 일본 열도를 경악하게 만든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지원유세 중이던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암살범에게 저격을 당하여 사망했다. 그리고 그의 갑작스럽고 비극적인 죽음은, 일본의 정치 지형도 변화와 '헌법 개헌'이라는 또다른 나비효과를 불러오고 있다.
 
지난 15일 방송된 KBS <역사저널 그날> 373회는 광복절 특집 기획으로 '평화헌법 75주년, 전쟁할 수 없는 나라 일본'이라는 부제로 꾸며졌다. MC 최원정, 방송인 허준, 배우 이시원, 한국사 강사 최태성, 오일환 ARGO 인문사회연구소 박사, 태상호 군사전문기자가 패널로 출연했다.
 
아베 암살 이틀 뒤인 7월 10일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는 집권여당인 자민당이 압승을 거뒀다. 자민당은 총 248석중 무려 119석을 석권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아베의 죽음이 보수표 결집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이로써 아베의 숙원이었던 '평화헌법(헌법 제9조)' 개정 논의도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높아졌다. 아베는 건강문제로 총리직에서 물러나던 2020년 "개헌의 꿈을 이루지못하고 물러나는데 단장의 아픔을 느낀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아베의 정치적 후계자로 불리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아베 전 총리의 뜻을 이어 헌법 개정 등의 난제를 풀어나가겠다"라는 의지를 밝혔다. 
 
일본의 개헌은 국회에서 개헌안을 발휘하여 국민투표라는 과정을 거친다. 여론조사에서는 현재 일본 국민의 51%가 개헌에 긍정적인 것(부정은 33%)으로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제정된 일본의 평화헌법이란 '세계평화를 위한 일본 제재 헌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평화가 아닌 바로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제정된 헌법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당시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 총사령부의 목표는 일본의 비군사화였다. 여기서 독일-이탈리아 등 다른 패전국과 차이점은 일본만 평화헌법을 제정했다는 것이다. 미군정 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고안하여 1947년부터 도입된 평화헌법의 제9조에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군사력 볼보유)'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교전 불인정)'고 명시하고 있다. 평화헌법상 일본은 원칙적으로 타국이나 자국 영토 내에서 어떤 형태의 무력행사도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패전국이라도 주권 국가가 '영원히' 무력을 포기한다는 것은 당연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독일의 경우, 냉전이 시작되던 시기와 맞물려 자유진영에서 소련 및 바르샤바 조약기구(공산권 국가연합)의 서진을 막기 위한 방파제 역할로 '독일의 재무장'에 합의했다. 독일이 주변국에 적극적으로 과오를 인정하고 .죄하는 자세를 보인 것도 재무장에 대한 반발여론이 적었던 이유다. 이탈리아는 독재자 무솔리니가 퇴출되고 종전 이전에 연합국에 합류했던 덕분에 패전국으로서의 대우가 가혹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2차대전에서 가장 끝까지 연합국에 격렬하게 저항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또한 공식적인 항복문서 조인식(1945년, 9월 2일)조차도 일왕의 항복 연설 이후 한달 가까이 질질 끌려다가 이루어졌다. 당시 유럽과 태평양 전역을 모두 참전했던 한 미군은 "유럽 전선이 치열했다면, 태평양 전선은 처절했다"라는 말을 통하여 일본의 집요한 저항을 표현했다. 이 과정을 거치며 미국은 전후에도 일본을 강도 높게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평화헌법이다.
 
물론 평화헌법이 그저 일방적인 미국의 강요로만 만들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2차대전 패망과 본토에 떨어진 원폭투하, 굴욕적인 항복 등을 거치며 군국주의의 폐해와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일본 국민들은, 자기반성의 결과물로 평화헌법을 받아들이자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당시 전쟁의 책임자였던 쇼와 일왕은 "짐은 이 평화헌법의 제정을 기쁜 마음으로 재개한다"라고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일왕과 일본 국민들에게 이르기까지 평화헌법의 당위성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가 있었기에 75년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50년 시작된 한국전쟁(6·25)은 일본의 재무장에 일종의 전환점이 됐다. 미군은 한국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에 있던 병력을 차출해야 했고, 일본은 한국으로 가는 군수품의 기착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산업재건의 기틀이 됐다. 또한 주일미군의 빈 자리를 대신하여 일본의 안보를 지키기 위하여 준군사조직인 경찰예비대와 해상경비대가 조직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현재 일본 자위대의 전신이다. 우리 민족의 비극인 6·25가 일본의 경제부흥에 밑거름이 된 것을 비롯하여 자위대를 낳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일본도 처음에는 막대한 비용과 노력이 발생하는 재무장을 그리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당시 일본 국민들은 '안보는 미국에게 맡기고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에 올인하자'라는 여론이 우세했다.
 
뒤늦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일본 역시 한국전쟁의 참전국 중 하나였다. 미국은 과거 일본 해군들의 경험을 살려 해안선에 설치된 기뢰와 위험물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소해부대를 창설했다. 이전까지는 구 일본군 출신들은 철저히 배제되었지만,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구 일본군이라고 할지라도 자위대 전력으로 편입이 가능해지는 계기가 됐다.
 
자위대는 말 그대로 자국의 방어만 가능한 준군사조직이다. 일본의 자위대는 엄밀히 말해 '정식' 군대가 아니지만, 사실상 정규군에 버금가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의 군사력 평가단체 GFP가 2022년 발표한 세계군사력 순위에서 일본은 놀랍게도 5위로, 한국(6위)보다 높다. 한국-일본보다 순위가 높은 것은 명실상부한 강대국인 미국-러시아-중국, 그리고 이들과 마찬가지로 핵무기 보유국인 인도 뿐이다.
 
자위대는 다른 강대국 못지않은 최첨단 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섬나라의 특성상 항공과 해상전력은 막강하다. 일본은 원래 미국산인 F-15 전투기를 200대나 보유하고 있으며,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5세대급 최첨단 스텔스 전투기로 꼽히는 F-35도 23대나 보유하고 있다. 해상전력에서도 일본은 최첨단 이지스함을 무려 8척이나 보유하고 있다(한국이 단 3척).
 
일본의 비무장을 위해 평화헌법까지 제정했던 미국이 오히려 일본에 적극적으로 무기를 판매하고 있다는 국가라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일본은 본래 평화헌법상 전수방위(본토 방위를 위주로 하는 군사정책)에 묶여있었으나,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을 기점으로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려했던 미국의 이해에 따라, 태평양 등의 넓은 지역에서도 미군과 같이 군사적 행동과 지원이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자위대의 전력 강화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자위대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1990년대 중동에서 벌어진 걸프전쟁은 일본이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해외에 파병하는 전환점이 된다. 전쟁 후 치안과 평화유지 임무를 위하여 이라크에 주둔한 다국적군에 일본 자위대도 동참한 것.
 
일본은 걸프전 이전까지만 해도 해외파병을 엄격히 금지해왔으나 미국의 강력한 요구로 1991년 후방 지원을 위한 일부 자위대 병력을 파견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평화헌법 위반을 둘러싼 논란에 대하여 "자위대의 파견은 유엔군의 평화유지활동을 위한 것이고, 군대가 아니기에 해외 파병과는 성격이 다르다"라는 기묘한 해석을 내놓았다.
 
사실상 평화헌법의 원래 취지를 조금씩 변경해나가며, 실질적인 개헌이나 마찬가지의 효과를 지니는 일본식 '해석개헌'의 시작이었다. 법조계에서는 '법은 결코 자의적 해석이나 확대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격언이 있다. 일본은 본래 평화헌법의 취지와 내용이 명확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확대와 자의적 해석을 일삼으며 조금씩 그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다.

일본은 걸프전을 기점으로 '선 파병-후 법률 제정'이라는 방식으로 평화헌법을 우회하여 자위대의 활동영역 확장을 꾸준히 추진해왔다. 이미 1987년에 국제긴급원조대 파견법을 시작으로, 걸프전 이후인 1992년에는 '국제평화유지협력법'을 제정하고 해외파병 자위대를 PKO(평화유지군)로 명명하며 군대활동이 아닌 UN의 이름으로 평화유지임무를 수행한다는 명분을 주장하고 있다. 이후 1999년에는 '주변사태법'을, 미국 9·11 테러가 발생한 2001년에는 아예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면 자위대의 '선제공격'도 가능한 '테러대책 특별조치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일본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쟁이 가능한 보통국가'로의 전환이다. 평화헌법에 의하면 사실 자위대의 존재 자체가 위헌이다. 그래서 일본은 논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아예 자위대의 존재 자체를 헌법에 명기하려는 시도중이다.
 
사망한 아베 전 총리는 개헌을 바탕으로 경제대국이자 군사대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높이겠다는 야망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왔다. 아베는 총리재임기간 중 '집단적 자위권'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동맹이나 유대관계를 지닌 국가가 제3국으로 공격당했을 때 참전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이처럼 아베 정권에서 안보 및 군사에 관한 법률이 신설되거나 개정된 것만 무려 11개에 이른다.
 
일본의 침략에 피해를 입었던 기억이 강한 주변국들 입장에서는 평화헌법 개정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우익세력들은 집권당인 자민당을 움직여 평화헌법을 바꾸려는 시도를 계속해왔다. 평화헌법은 일본 우익세력의 오랜 꿈인 '전쟁 가능한 일본'을 막을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보루인 셈이다.
 
또한 일본의 개헌 문제와 맞물려 주목받고 있는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최근 신냉전의 도래로 진영간 블록화가 가속화되고 있으며 미국-동맹국의 자유주의 진영과, 중국-러시아로 대표되는 권위주의 진영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러우전쟁이 사실상 1,2차세계대전의 도화선과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민감한 국제정세 속에서 강대국들 사이에 둘러싸이는 우리 나라의 균형감각도 시험대에 올랐다.
 
전쟁에서 '선제타격을 할 수 있느냐'는 전쟁의 양상과 명분을 논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일본은 역사적으로 전쟁을 하면서 항상 예고없이 선제공격(임진왜란, 진주만 공습 등)을 했던 경우가 많았다. 그 공격의 첫 진출지와 피해자는 대부분 한반도였다.
 
러-우전쟁에서도 보듯이 국익 앞에서 국제사회의 현실은 냉엄하다. 한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인 미국은 국익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을 포기한 바 있고,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군사적 지원은 꺼리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대만 관계를 둘러싸고 중국과도 대치중이다. 현 동아시아 상황을 미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한국보다 일본이 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은 현실이다. 미국과 왜 일본의 편을 들고 밀착할 수밖에 없는지 그 상황과 이해관계를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 자민당은 현재 국내 총생산 대비 1%였던 방위비를 5년 내에 2%까지 늘리겠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의 국방예산은 전세계 9위이며, 현재도 5위의 군사력을 지니고 있다. 일본이 방위비를 지금의 2배로 늘린다면 2027년까지 국방예산 세계 3위까지 부상할수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너그럽게 보면 헌법을 개정하고 군대를 키우는 것은 일반적인 주권국가의 권리다. 하지만 지정학적 위치나 역사적 선례로 볼 때 한국을 비롯한 이웃국가들에게는 매우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일본이 지나간 역사에 대하여 진정성있게 반성하고 재발방지를 위하여 노력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생략된 채 '전쟁가능국가'로 돌아오려고 한다는 게 문제다.
 
일본이 다른 국가들에게 아직 신뢰를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헌을 밀어붙이다면, 동아시아는 또다른 군비경쟁의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과정에서 우발적인 상황으로 한반도가 또다시 전쟁터가 될 수도 있다. 생전 아베가 총리 재임시절인 2013년 2월 22일, 미국 전략문제연구소(CSIS) 초청 연설에서 영어로 "일본이 돌아왔다(Japan is back)"라고 선언했던 장면이, 어쩐지 '과거로 돌아가겠다
라는 중의적인 의미로도 느껴지며 불편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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