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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의 선재(유아인)
 "밀회"의 선재(유아인)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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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는 알면 알수록 드라마틱하고 재미난 인물이다. JTBC 드라마 <밀회>의 남자 주인공인 선재의 롤모델이 리흐테르라는 것은 <밀회>에서 그에 관한 책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극 중에서 선재는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가난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달걀판으로 방음장치를 하고 자신이 감명받은 피아노 연주를 보면서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로 홀로 연습했다. 그리고 그의 재능을 알고 발굴하고 이끌어 준 스승 혜원을 만나면서 전문적인 피아니스트로서 길을 걸어가게 된다.

리흐테르의 스승  
 
책 '리흐테르'
 책 "리흐테르"
ⓒ 정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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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흐테르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인 지토미르에서 1915년 독일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음악원 교수였지만 제멋대로 하길 좋아하고 고집 센 리흐테르에게 피아노 가르치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리흐테르는 약간의 피아노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어릴 때 학교를 뛰쳐 나간 후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한 인물이다. 오페라 극장이나 성악가들의 반주자로 활동하며 이곳저곳을 떠돌던 그의 인생은 22세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들어가 위대한 스승, 네이가우스를 만나면서 180도 바뀌게 된다.
 
나는 오데사에서 온 한 젊은 음악가의 연주를 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젊은이는 음악원에 입학하여 나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한다고 했다. 

"예비학교를 마친 젊은이인가?" "아닙니다. 어디에서도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대답에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중략)... 그는 피아노 앞에 앉더니, 길고 유연하면서도 힘차 보이는 손을 건반에 올려 놓고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주는 조심스럽고 담백하고 엄격했다...나는 옆에 앉아 있던 학생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내가 보기에 저 친구는 천재 음악가야." (80쪽)

리흐테르는 그의 스승을 가리켜 제2의 아버지라고 고백한다. 스승과 그의 아내는 시도때도 없이 자신들의 집을 찾는 제자들을 기꺼이 반겼고, 좁은 집에서 잘 곳이 없어 리흐테르는 스승의 피아노 아래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네이가우스는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피아노 연습할 시간이 부족해 가끔은 연주회를 엉망으로 하기도 했으나 자신의 연주회 2부에 제자들을 세워 청중에게 음악을 선보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네이가우스는 리흐테르가 똑바로 앉아 피아노를 치도록 자세를 교정하고 리흐테르 자신이 원하는 음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가르쳤다.

반 클라이번을 세상에 알린 사람

임윤찬의 우승으로 이제는 전국민이 다 알게 된 미국의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의 주인공,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 역시 리흐테르와 인연이 깊다. 구 소련이 자국의 예술적 우수성을 드높이기 위해 주최한 제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리흐테르가 심사를 맡게 되었는데 당시 심사위원들과 정부 당국에서는 소련 출신이 우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은근히 압박하고 있었다. 

본래 정치에 관심도 없고 권력이란 것을 몸서리치게 싫어하던 리흐테르는 미국 출신 반 클라이번의 연주가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해서 그를 제외한 다른 참가자들은 배제하기도 했다. 이 일로 그는 동료들에게 '개인주의'라고 비난받았다. 

리흐테르의 회고담을 읽으면 그와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들도 재밌지만 특히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 같은 당대의 유명 러시아 작곡가들과 '에밀 길레스', '다닐 샤프란', '로스트로포비치' 등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연주가들뿐만 아니라 동시대 함께 활동했던 수많은 예술가들의 뒷이야기가 담겨 있어 흥미진진하다. 

리히테르에 따르면 쇼스타코비치는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고 프로코피예프는 라흐마니노프를 싫어했다고 한다. 특히 프로코피예프는 학생들에게 난폭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천재적인 작곡가임은 분명했던 것 같다. 리히테르가 다른 작곡가들과 달리 프로코피예프에 관해서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리흐테르의 평은 전반적으로 박한 편이다. 속에 없는 말을 하거나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을 할 줄 모르는 그는 고지식하리만치 솔직하지만, 그의 솔직함은 사람에 대한 평가뿐 아니라 예술가로써 삶 전반에서 드러난다.

그가 살던 당시 소련에서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염세적'이라고 여기며 그의 곡을 연주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연주회에서 슈베르트를 소련에 처음으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를 보고 음악가들이 '미쳤다'고 평가했다. 1948년에는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 음악이 소련 당국에 의해 금지되고 탄압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당히 자신의 연주회에서 이들의 곡을 레퍼토리에 넣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따로 있다. 
 
나는 1944년 1월 5일에 레닌그라드에서 처음으로 연주를 했다... 이튿날, 필하모니 홀에 가 보니, 창유리들은 산산조각이 나 있고 홀의 창문들은 활짝 열려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러시아 미술관에 포탄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연주회는 열렸다. 청중은 외투를 입은 채로 연주를 들었다. 그들은 대단히 감동한 듯했다.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사람들이 추위를 잊어버린 멋진 콘서트였다. (117쪽)

전시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예술을 향한 러시아인들의 놀라운 열정 말이다. 그들의 피에는 진한 보드카뿐 아니라 예술가의 기질도 함께 흐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삶과 죽음의 귀로에서도 이토록 예술을 사랑했던 뜨거운 나라가 지금은 한때 형제였던 나라를 침범해 살인과 강간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이하고 씁쓸하다.

예술의 가치

이번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수여한 피아니스트들의 국적은 공교롭게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이다. 러시아 출신의 연주가들이 참가하는 것을 금지했던 다른 국제 콩쿠르와 달리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예술이 이념과 대립을 넘어서야 한다는 창립 취지에 맞게 러시아에도 문을 열어 준 것이다. 

수상을 축하하며 서로 안아주는 모습에서 예술이 갖는 힘이 무엇인지 목도한 듯하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인 모든 함의를 예술이 다 포용하고 갈 수는 없다. 예술가들에게 이런 임무를 맡겨서도 안된다고 본다. 

리흐테르는 음악에 있어 순수하고 진실된 인물이었다. 자신의 삶 또한 자신의 연주와 일치되게 살았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보다 러시아 작은 마을을 여행하며 소박한 사람들 앞에서 여는 연주회를 더 좋아했고, 청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작곡가와 자기 자신을 위해 연주했다는 리히테르의 고백은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하고 엄중한 자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임윤찬을 비롯한 진실되게 예술을 추구하는 연주자들 덕분에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작금에서도 예술의 가치가 여전히 증명되고 있어 다행이고 감사하다.

이 책의 저자인 브뤼노 몽생종은 그 자신이 유명한 연주자이면서 음악 영화 감독이기도 하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글렌 굴드, 예후디 메뉴인 등 유명한 연주가들의 영화를 제작한 바 있는 그는 리흐테르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리흐테르가 세상을 뜨기 전 약 2년간 그와 교류하였다. 우울증과 노쇠해진 기력 탓에 예민하고 괴팍한 리흐테르였지만 그의 겉모습 속에 숨겨진 음악가로서의 자화상을 담담하게 잘 정리하였다. 

회고담 뒤에는 1970년부터 1995년까지 리흐테르가 직접 감상평을 적은 음악노트가 수록되어 있다. 쇼팽 스페셜리스트로는 최고의 연주자로 회자되는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쇼팽에 대해 '영웅적이고 정확하고 기교가 뛰어나지만 어떤 매력도 느껴지지 않고 최신 유행을 따르고 있다. 금속으로 주조된 쇼팽, 자신만만하지만 싸늘한 연주'라고 혹평하는 대목에서 웃음이 난다. 감히 누가 폴리니를 이렇게 평하겠는가.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수첩

브뤼노 몽생종 (지은이), 이세욱 (옮긴이), 정원출판사(2005)


태그:#서평, #리흐테르, #피아니스트,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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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음악, 여행을 좋아하고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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