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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진(金嘉鎭)은 1846년에 태어나 1922년 타계했다. 그의 타계 100주년을 맞아 학술회의와 출판기념회가 잇달아 열리고 있다.

그는 일제가 5천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으로 쳐들어간 갑오왜란(1894)에 이어 청일전쟁을 일으킬 때 협력했다. 또 한일의정서(1904) 체결 이후 일제 앞잡이 내각에서 외무·이조협판, 주일공사, 상공부대신, 외부대신서리상공부대신, 법부대신, 중추원부의장, 황해도·충남관찰사 등 요직을 지냈으며 경술국치 직후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1919년 3·1독립만세의거 후 조선민족대동단 총재에 추대되었고, 그해 10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유하다 1922년 7월 4일 타계하였다.

한 행사 안내문 포스터에는 김가진과 갑오왜란으로 국왕과 왕비가 일제의 포로 신세가 되었으니 이를 구해야 한다는 흥선대원군의 명을 받고 2차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상경하려고 했던 전봉준 장군,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 선생, 의열단 단장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지낸 김원봉 장군의 사진 아래 '대한민국이 외면한 독립운동가-서훈의 당위와 방법'으로 인쇄돼 있어 행사 내용을 짐작케 한다.
 
6월 28일 서울 프란치스코 행사 안내 포스터
 6월 28일 서울 프란치스코 행사 안내 포스터
ⓒ 시민모임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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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철저히 협력한 외교관 김가진
 
"에노모토 다케아키 별장에서 시담을 주고받던 동농 김가진과 이토 히로부미는 20년 뒤 조선에서 대한협회 회장과 통감의 관계로 다시 만났다. 동농 김가진은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고종을 퇴위시킨 이토 히로부미에게 시 한 수를 보낸다.

赫赫勳名盖世英(혁혁훈명개세영)
前身應是富士精(전신응시부사정)
手除覇氣驅雲散(수제패기구운산)
力奮皇威卷海淸(역분황위권해청)

세상을 뒤엎을 만큼 공훈과 명성을 떨치셨구려.
전생에 아마도 후지산 정기라도 받았나 보오.
손으로 힘 좀 쓰는 놈들 다 없애고 구름처럼 흩어지게 했구려.
힘으로 황제의 위엄을 떨쳐 바다 넘어 청나라까지 쥐었구려.

大局籌深東亞勢(대국주심동아세)
隣邦義重赤關盟(인방의중적관맹)
賀公六十七年壽(하공육십칠년수)
老圃黃花月正盈(노포황화월정영)

통 크게 동아시아 세력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이웃나라 의리 중하여 청일조약 맺었구려.
선생이 67세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묵은 밭에 국화가 피니 달이 꽉 찼습니다.

김가진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묻고 있다. 20년 전 그 자리에서 그대는 평화를 맹세하더니 지금은 병탄을 획책하는가? 고종이 살아있는 한 그는 고종의 신하이고, 대한제국의 외교관이었다. 김가진은 시라는 풍자 수단을 이용해 이토 히로부미에게 대한제국 병탄 야욕을 그만 멈추라고 요구한 것이다."

- 장명국, <대동단총재 김가진>, 47~48쪽

김가진을 다룬 장명국의 책 <대동단총재 김가진>의 이 대목은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김가진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 때까지 일제에 철저히 협력한 조선·대한의 관료이자 이토 히로부미를 칭송한 외교관임에도, "시라는 풍자 수단을 이용해 이토 히로부미에게 대한제국 병탄 야욕을 그만 멈추라고 요구한 것"이라며 매우 자의적으로 해석한 점이다.

둘째, 한시를 잘못 번역한 점이다. 이토는 1841년생이다. 이토 67세(일본식) 생일인 1908년 5월에 준 시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웃나라 의리 중하여 청일조약 맺었구려"에서 나오는 이웃나라는 대한(大韓)이지만, 당시 청일조약은 없었다.

이 시에서 '조약'은 한국 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한국 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고용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정미7조약)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1907년 7월 24일에 정미7조약 체결을 주도한 이토의 공을 찬양하는 시로 보는 게 적절하다.

이 책에는 김가진이 남작의 작위를 받은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조선귀족령은 소위 '합방에 공이 있는 자'만이 아니라 조선의 왕족과 전현직 대신에게도 작위를 주도록 규정했다. '합방에 공이 있는 자'에게는 훈위(勳位)를 함께 주었는데, 김가진에게는 주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중추원은 물론 수천 명의 조선인이 받은 한국병합기념장이나 대정대례기념장 명단에서도 제외됐다."

- 장명국, <대동단총재 김가진>,  49쪽

1910년 10월 7일 조선귀족령에 따라 이재완, 박영효 등 6인이 후작, 이완용 등 3인이 백작, 박제순, 송병준 등 22인이 자작, 김가진, 이윤용 등 45인이 남작을 받았다. 훈위를 받은 자는 이지용, 이완용, 박제순 등 27인이었고, 훈위를 받지 않은 자는 박영효, 김가진 등 49인이었다. 

한국병합기념장이나 대정대례기념장은 하나의 '기념장'으로,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다고 해서 주어지는 수준이 아니다. 작위를 받았다고 해서 전부 훈장를 받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김가진은 1915년 11월 대례 참례를 위해 조선 귀족 대표단 일행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후작 이재각, 백작 이완용·이지용·민영린, 자작 이기용·민영소·박제순·조중응·이재곤·임선준·조민희·권중현, 남작 이윤용·조동윤·한창수·박기양·김가진·박제빈, 본직 장관 자작 민병석, 차관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 찬시 자작 윤덕영, 부무관 자작 이병무, 찬시 남작 김춘희, 사무관 이항구,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가 대례(大禮) 참례차 교토(京都)에 가고자 하직인사로 양궁(兩宮)에 알현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부록」 6권, 순종 8년(1915) 11월 3일
    
조선 귀족의 영전상실 - 남작 김가진은 지난 1922년 7월 4일 사망함으로 인하여 조선귀족령 제13조 제1호에 의거 작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4월 11일 관보) (「조선총독부관보」 제3202호. 1923.04.17)
 조선 귀족의 영전상실 - 남작 김가진은 지난 1922년 7월 4일 사망함으로 인하여 조선귀족령 제13조 제1호에 의거 작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4월 11일 관보) (「조선총독부관보」 제3202호. 1923.04.17)
ⓒ 조선총독부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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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가진 편을 보면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 수여한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았다가 그 뒤 즉시 반납하고"라고 기술했으나 이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김가진은 1922년 7월 4일 타계한 후 9개월이 지난 1923년 4월 17일 남작의 작위가 상실되었음이 「조선총독부관보」 제3202호에 실려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두 가지 의문점이 있다. 하나는 김가진이 왜 남작 작위를 유지하면서 1919년 10월 상하이로 망명했는지, 다른 하나는 일제가 김가진의 상하이행에 밀정을 붙여 귀국을 설득했다고 하면서 왜 작위를 박탈하지 않았는지다. 이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다.

황현은 『매천야록』 「김가진의 내력」에서 김가진 부모와 그의 행적을 이렇게 기술하였다.
 
김가진의 아버지가 안동부사로 있을 때 한 기생과 사귀어 김가진을 낳았다. 안동을 일명 영가(永嘉)라고 하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가진(嘉鎭)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것은 이범진(李範晉)의 이름 중, 진(晉)자와 좋은 예가 된다고 하겠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학관(學官)이 되어 순천부사 홍재현(洪在鉉)을 따라 그의 책실에서 거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처는 홍종헌(洪鍾軒)의 서종매(庶從妹)이므로 홍종헌이 영변에 부임하였을 때 김가진은 비장(裨將)이 되기를 원했으나 그 자리를 얻지 못하자 종일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갑신년(1884) 그는 민영준(閔泳駿)을 따라 일본을 갔다가 돌아와서 과거에 급제하여 청직(淸職)에 있으면서 온갖 교활한 짓을 다하여 일시 간사한 무리의 괴수(魁首)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글을 조금 할 줄 알아 호를 동농산인(東農散人)이라 하고, 명관(名官)으로 자처하였다.

- 국사편찬위원회,『국역 매천야록』제1권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각각 건국훈장 독립장과 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들이지만, 국가보훈처는 김가진의 친일행위와 한일합방 직후 조선귀족령에 따라 받은 남작의 작위, 은사금을 이유로 포상하지 않고 있다.

'선 친일 후 독립운동을 한 경우는 독립운동가로 인정해야 한다'라고 한다. 그러나 30여 년 일제에 협력하고, 일제가 준 작위를 지닌 채 3년 동안 상하이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한 것도 이를 적용해야 할 것인가? 이것도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이자 문학박사입니다.


대동단 총재 김가진 - 외교관 출신 대동단 총재 동농 김가진 친고종 개화파 외교관에서 독립운동가로

장명국 (지은이), 석탑(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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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말 의병을 30여 년 연구를 해 오고 있습니다. 대표 저서: 의병 찾아가는 길1.2, 한국근대사와 의병투쟁 1~4(중명출판사) 한국의병사(상.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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