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25 11:48최종 업데이트 22.07.16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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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유정의 외침에 청담동의 한 미용실은 순간 얼어붙었다. 화장을 마치고 셔츠를 갈아입으려던 헌용의 손도 멈칫했다. "아니 검은 색을 가져오면 어떡해" 이어지는 유정의 목소리에 헌용은 등줄기가 서늘했다. 오늘 아침 분명히 하얀 셔츠를 넣었는데 옷이 뒤바뀌었단 말인가? 낭패였다.

오후 2시 예식까지는 3시간 정도 남아있으니 집으로 가 옷을 챙기고 결혼식장인 정동의 프란체스코 교육회관까지 갈 시간은 된다. 헌용은 유정을 식장으로 먼저 보내고 나비콜을 불러 길동으로 향했다. 다섯 살에 시력을 잃어 30여 년 동안 앞을 못 보고 살았지만 이 순간처럼 못 본다는 게 원망스러운 적도 없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만난 유정은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동갑내기 친구였다. 단 둘이 만난 건 서울교대 앞에 있는 남도 한정식집. 먼저 졸업한 유정이 논문작업을 도와줘 헌용이 밥을 사는 자리였다.

제육볶음에 갖은 나물, 생선구이에 찌개까지. 상을 가득 채운 반찬에 헌용의 젓가락이 갈피를 못 잡았다. 바로 앞이 고등어야, 찌개는 가운데, 왼쪽으로는 상추가 있어. 밥 한술을 뜨고 찬을 집을 때마다 유정이 챙겨주었다. 헌용은 여행은 좋아하는지, 맥주보다 소주를 더 좋아하는지, 유정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는데 반찬 때문에 이야기가 끊기는 게 안타까웠다.

"손님, 아파트 몇 동이세요, 앞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헌용은 유정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다가 택시 기사의 말에 지팡이를 챙겼다. 

일반 교사가 된 시각장애인
 

신명중학교 복도에서 김헌용 신명중학교는 그의 세 번째 부임지다. ⓒ 민병래

 
김헌용은 서울맹학교를 다니며 특수교사를 꿈꾸며 공주사범대학교 특수교육과에 진학했다. 장애인을 위한 환경이 갖춰 있어 기숙사에서 강의실과 식당을 오가는 대학생활은 온실이었다.

공주사대부속중학교로 교생 실습을 나가는 날부터 세상은 달랐다. 사범대학교와 중학교까지 거리는 담 하나여서 오갈만 했지만 문제는 수업이었다. 교재를 미리 받아야 점자 타이핑을 맡겨 준비를 하건만 당일에서야 받았다.

어려울 때마다 서울맹학교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현장에서 결정하고 바로바로 행동해야 하니 답답할 뿐이었다. 다른 교생은 열 번 정도 수업을 배정받았는데 헌용은 한 달 동안 고작 세 번, 학교에서도 본인도 '어쩔 수 없지' 하며 받아들였다. 교생실습의 흥분이 사라지고 우울감에 빠질 때쯤 '스승의 날'을 맞아 한 학생이 편지를 건넸다.

"선생님이 걸어 다니시는 것만 봐도 제게 용기를 줍니다. 고맙습니다"

풀 죽어 있던 헌용은 벌떡 일어섰다. 그날 김헌용은 "내가 일반학교의 교사로 서 있기만 해도 학생들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헌용은 영어를 가르치는 일반 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마침 2008년부터 시행된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라 제도 변화도 생겼다. 장애인이 임용고시를 볼 때 수능시험에 응시하는 장애인처럼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고, 수험시간을 연장하는 게 가능해졌다. 정당한 편의제공이 시작된 것이다. 또 장애인 의무고용율에 따라 구분모집제도가 시행돼 교사를 희망하는 장애인의 임용이 별도 전형으로 진행되었다.

헌용은 임용고시에 붙었고 2010년 서초구의 경원중학교 교단에 섰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처음 '일반' 학교 '일반' 교사로 우뚝 선 것이다.

결혼 준비도 만만치 않고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 두 사람은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만났다. ⓒ 김헌용제공

 
헌용은 집으로 들어서면서 유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 카메라를 켜고 옷방으로 들어갔다. "오른쪽을 비춰봐, 거기 조금 아래, 아니 왼쪽으로" 유정의 안내에 따라 옷걸이를 하나씩 몇 번이나 비춰도 예복 셔츠는 나타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유정이의 목소리가 잠시 잦아들었다. 시간은 훌쩍 지나가고 마음이 급했다. 입이 바짝 말라 갔다.

헌용이 그냥 검은 셔츠를 입자고 말을 꺼내려는데 "잠깐, 거기 바닥 구석에 흰옷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라고 유정이가 말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옷걸이에 걸려 있어야 할 셔츠가 방 한쪽 모퉁이에 모셔져 있었다.
  
헌용은 다시 나비콜 택시에 올랐다. T-map은 한 시간 10분 정도 예상된다며 천호대로를 지나 강북강변도로를 얹어 뚝섬로를 타란다. 헌용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비의 안내대로라면 예식 시간에 간당간당하게 도착하는 셈이다.

택시기사는 자신을 믿으라며 시내로 방향을 잡았다. 차는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교차로마다 빨간불에 걸렸다. "기사님, 제가 오늘 신랑인데..."라는 말이 몇 번이나 목구멍으로 올라왔지만 헌용은 눌렀다.

마음은 계속 쪼여갔다. 예약한 웨딩카는 마을버스 크기로 서서 내릴 수 있는 리무진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회관 앞에서 으쓱 하며 내릴 시간이다. 멋진 입장이야 포기해도 되지만 미용실에서 식장으로 가며 인사말도 재차 확인하고 부모님이 우시면 어찌할지 이런저런 일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기로 했는데... 그 매듭을 짓지 못하니 안타까웠다.

사실, 결혼식장을 구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서울맹학교 친구들이 많이 올 터인데 음식이 문제였다. 시각장애인은 잔치 음식이 한 상 차림으로 나와야 편안하게 먹는데 둘러본 예식장은 모두 뷔페식이었다. 접시에서 하나씩 음식을 담아 자기 자리로 돌아와 먹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비용을 더 내겠다고 해도 식장에서는 시각장애인 하객을 위해 별도서비스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상담하는 곳마다 귀찮아하는 말투가 묻어났다. 유정이 자리를 박차고 헌용을 끌고 나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행히 정동의 프란체스코 교육회관에서는 어떻게든 돕겠다고 성의를 보였다. 카톨릭 신자인 유정은 혼배미사를 바랐던 터라 그 자리에서 계약을 했다. 문제는 회관 로비에서 성당으로 내려가는 아홉 개의 계단! 하객 중에는 휠체어를 탄 중증 장애인이 있는데 이들이 식장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게 아쉬웠다. 게다가 청각장애인을 위해 문자통역을 해야 하는데 성당 방침상 스크린을 설치할 수 없다고 했다.

지하철 선로에서 떨어진 기억
 

신명중학교 복도에서 김헌용 신명중학교는 그의 세 번째 부임지다. ⓒ 민병래

 
"지금 어디야?"

택시가 여전히 신호등과 씨름하고 있을 때 유정에게서 확인 전화가 왔다. 헌용은 순간 내려서 지하철을 탈까 생각했다. 헌용은 셔츠도 바뀌었는데 괜히 지하철을 타려다가 예전처럼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들썩이는 엉덩이를 눌렀다.

2013년인가, 헌용은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 사고가 일어난 것은 당시 안전문이 설치되지 않았던 태평역이었다. 경원중학교에 처음 부임해서 교과서를 시각장애인복지관에 맡겨 점자책으로 만들고 학생의 이름은 앉는 자리를 이미지로 기억하며 외웠다.

나름 노력했지만 시각장애인에게 배우면 성적이 떨어지지 않냐는 학부모의 볼멘 소리도 들어야 했고 이유없이 동료다면평가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그러길 3년, 실력을 한 단계 끌어올려 단단하게 교단에 서고 싶었다. 과감하게 학교를 휴직하고 들어간 곳이 통번역대학원.

외국어를 배우는 문화는 새로운 것, 나와 다른 것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게 한다. 통번역대학원의 친구들이 그랬다. 공주대학교 특수교육과가 장애물 없는 환경이 좋았다면 통번역대학원은 분위기가 좋았다. 학우들은 어떤 차별도 없이 헌용을 대했다.

헌용도 마음을 열고 세미나와 술자리에 한껏 어울렸다. 선로에 떨어진 날도 늦게까지 뒤풀이를 했는데 피곤했는지 집으로 가는 전철에서 잠깐 졸았다. 안내 방송을 들어보니 세 개 역을 지나친 상태였다. 헌용은 서둘러 내렸다.

그는 새로운 길을 갈 때 신중하게 답사를 한다. 길이 울퉁불퉁한지, 계단은 몇 개나 되는지 공기의 흐름이나 주변의 냄새는 어떤지... 이때는 막차 시간을 놓칠까 봐 마음이 급했다. 반대편 승강장으로 흰 지팡이를 휘적이며 서둘러 걸었다. 갑자기 발 밑이 푹 꺼졌다. 헌용의 몸이 선로 쇳덩이에 부딪혔고 지팡이는 튕겨 나갔다.

"으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승강장에서 "어떻게 해, 빨리 신고해" 하는 소리가 어지러웠다. 헌용은 몸을 일으켰다. 팔을 휘저어 승강장을 짚었다. 가슴 높이의 턱을 오르기가 어려웠다. 아주머니 몇 분이 달려들어 헌용의 양팔을 잡아주었다. 헌용이 올라와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열차가 들어오니 노란 선 밖으로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서울맹학교 시절, 친구나 선배가 심심치 않게 선로에 떨어졌다. 2014년에 후배 하나는 열차에 치이기까지 해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그때 헌용은 시각장애인들과 역으로 몰려가 안전문설치를 서두르라고 시위를 했다. 안전문이 설치되기 전까지 지하철 승강장은 시각장애인에게 목숨을 걸고 서 있어야 하는 자리였다.

헌용은 "이제 곧 도착하죠?"라고 기사에게 재차 물었다. 예식시간 30분 전 헌용은 겨우 정동 프란시스코 회관 앞에 도착했다. 가족과 친구들의 함성과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고생했다"며 모두 헌용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

유정은 박수에 취해 있는 헌용의 손을 잡아끌었다. "웨딩카 예약시간이 5분 남았으니 빨리 타자"며,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개선장군마냥 웨딩카에서 내리는 장면이 만들어졌다. 유정은 헌용과 하객을 보며 웃었고 헌용은 유정만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희미한 빛이 눈덩이처럼 커지던 날
 

우여곡절 끝에 개선장군마냥 웨딩카에서 내리는 장면이 만들어졌다. ⓒ 김헌용 제공

 
식이 끝나고 신랑과 신부는 하객을 향해 돌아섰다. 사회자의 '행진' 소리에 맞춰 두 사람은 첫걸음을 뗐다. 헌용은 순간 눈을 뜨고 싶었다. 오랫동안 억눌렀던 욕망이 솟구쳤다.

손으로만 어루만지며 느꼈던, 목소리로만 느꼈던 유정을 오늘은 정녕 보고 싶었다. 환한 웃음, 살짝 패인 보조개, 당찬 눈빛을 빨아들이고 싶었다. 순백의 드레스에 감싸인 유정의 아름다움에 한없이 취하고 싶었다.

다섯 살이었나? 엄마, 아빠의 모습을 흐릿하게나마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가. 독일의 쾰른으로 눈 수술을 받으러 인천공항을 떠날 때 검은 선 사이로 엄마의 눈물이 보였다. 지금도 울고 계실까?

부채꼴 모양으로 된 본당의 첫 계단을 올랐다. 플래시가 터지고 "헌용, 유정 축하해..." 따뜻한 인사, 큰 외침이 성당에 가득했다. 통번역대학원의 친구, 세 번째 부임지인 신명중학교 동료교사, 장애인교원노동조합의 동지들, 하나하나 목소리가 들린다.

첫사랑이었던 맹학교의 영어 선생님 눈길도 느껴진다. 구룡중학교 제자들도 왔나보다. 대견하게도 녀석들은 강남구청에 민원을 넣어 학교에서부터 지하철까지 헌용의 출퇴근 길에 점자유도블럭이 놓이도록 했다.

아쉽게도 전장연의 박경석 위원장님이 9개의 계단 때문에 식장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진주교대가 장애인에게 응시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 드러났을 때 함께 싸우면서 인연을 맺었는데...

한 계단씩 올라 열여덟 개의 계단 끝에 이르니 본당의 문이 활짝 열렸다. 시력을 잃었을 때 검은 안개 속으로 툭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손으로 휘적휘적 저어도 축축한 물기뿐, 두 발은 뻘밭으로 조금씩 빨려들어갔다. 어디선가 아슴한 빛이 보여 두 팔을 휘저으며 가는데 몸을 감싼 안개가 발을 붙잡은 진흙덩이가 놓아주지를 않았다.

열린 문 사이로 그날 보았던 희미한 빛이 눈덩이처럼 커지며 들어왔다. 유정과 함께 마다카스카르 섬에서 보았던 빛, 유정과 숙대 앞 맥줏집에서 두 번째로 데이트한 날, 벚꽃잎 사이로 들어오던 빛이다. 헌용은 유정의 손을 잡고 그 빛을 향해 걸어나갔다. 이날은 2022년 5월 22일이었다. 
 

2017년 1월 마다가스카르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 남쪽 툴레아(Toliara)까지 이어지는 7번국도(RN7:Route Nationale) 930km 로드트립을 했다. 길의 거의 끝(툴레아 도착 8km 전)에서 찍은 기념사진이고 함께 먼 길을 왔다는 의미로 청첩장에도 실었던 사진이다. ⓒ 김헌용 제공

 
<못다한 이야기>

김헌용은 경원중학교에 일반교사로 임용 후, 2010년 말부터 몇몇 시각장애인 교사 선배들과 모임을 가졌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한국시각장애교사회가 만들어졌다. 김헌용은 2016년~2017년에 한국시각장애교사회의 회장을 맡았다. 회장을 하면서 장애인교원노동조합 설립에 대한 논의를 처음으로 시작했고, 2017년 말 서울교육청 조희연 교육감과 면담을 했다.

이후 관심 있는 교사들과 꾸준히 논의하며 2018년 말부터 노조 설립을 본격 추진하게 되었고, 2019년 7월에 노조를 설립했다. 김헌용은 사무총장이 되었고 시각장애인 교사만이 아닌 모든 장애인교원을 포괄하는 단체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장애인 교사들을 만났다. 2020년부터 교육부와의 단체교섭을 시작했고 2021년부터는 노조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더 많은 이야기는 http://cafe.daum.net/lufat 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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