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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말도 없을 거다. 실제 현실의 직업은 늘 귀천이 분명하다. 직업의 귀천은 '꿈'과 '현실'의 구분으로도 표현된다. 이런 이야기의 가장 전형적인 구도가 있다면 역시 '가난한 예술가'다. 문학, 음악, 그림을 창작하면서 살아가고 싶지만 불행이 겹쳐 창작을 포기하고 저임금노동에 뛰어드는 가난한 예술가 이야기는 종종 주인공이 다시 창작에 뛰어들고, 기회를 얻어 예술가로 성공하는 것으로 끝난다.

볼 땐 감동적이지만, 나와서 생각해보면 뒷맛이 찝찝하다. 예술을 하는 삶과 저임금 노동을 하는 삶 사이에 위계가 매겨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위에 서는 것은 어째서인지 예술이고, 저임금노동은 '실패자'의 삶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가. 저임금노동에 천착하는 삶은 실패한 삶인가. 오직 현실 속에서 먹고살기 위해서만 수행되는 삶인가.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답하는 작품들이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조용한 희망>과 네이버 웹툰 <도무지 그애는>은 '가난한 예술가' 서사를 따르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저임금노동을 묘사한다. 두 작품에서 저임금노동은 다시 창작을 시작하고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 된다.

더러워진 집 치우고, 자립 막는 것들도 치우고
 
넷플릭스 드라마 <조용한 희망> 가정폭력으로 싱글맘이 된 알렉스는 청소노동으로 자립을 꿈꾼다
 넷플릭스 드라마 <조용한 희망> 가정폭력으로 싱글맘이 된 알렉스는 청소노동으로 자립을 꿈꾼다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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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희망>은 알코올 중독 남편을 피해 딸과 여성 쉼터로 들어온 싱글맘 알렉스의 이야기다. 알렉스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재능도 있었지만 아이를 갖게 되며 꿈을 포기했다. 남편의 주취폭력이 날로 심해져 딸까지 위협하자 알렉스는 도망쳐,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의 쉼터에 입주한다. 자립을 위해 일자리를 찾았고, 그렇게 찾은 일이 청소 노동이었다. 알렉스의 자립은 멀고 멀다. 안정을 찾는다 싶을 때마다 거처를 옮겨야 한다든지 남편과 소송이 걸린다든지 하는 불행이 찾아오긴 하지만, 그래도 일 경험이 늘어날수록 단골도 생기고 요령도 생겼다. 알렉스는 노동을 통해 조금씩 자존감을 찾아간다. 청소 노동은 누군가의 집을 치우는 일이지만, 동시에 알렉스 본인의 자립을 가로막는 것들을 치우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부잣집을 청소하면서 만난 여성 변호사는 우울증을 앓는 한편 아이를 입양했는데, 과중한 업무와 우울증으로 육아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때 알렉스가 이 여성의 육아를 돕는다. 그리고 이 여성은 알렉스의 소송을 돕는다. 어느 날은 빈곤층에 우울증과 함께 저장강박증이 있어 난장판이 된 여성의 집을 청소하러 가는데, 그의 집에서 자신의 옛 모습을 본 알렉스는 여성을 돕기 위해 받은 돈 이상으로 청소 노동을 제공한다. 알렉스가 돌봄의 주체로 우뚝 서는 순간들이다. 이 작품은 노동이 한 인간의 '조용한 희망'이 되는 모습을 차분하게 따라간다.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에서 알렉스는 한 대학으로부터 장학금을 줄 테니 입학하라는 연락을 받는다. 알렉스는 그의 노동 경험을 바탕으로 에세이를 써왔는데, 이 에세이를 읽은 친구(앞서 여성 변호사)가 대학에 추천서와 함께 원고를 보낸 것이다. 이야기는 알렉스가 딸과 함께 대학으로 향해가면서 끝난다. '가난한 예술가' 서사의 클리셰적 결말인 걸까? 드라마는 알렉스가 저임금노동이라는 '고난'을 이겨내고 창작의 길로 향한 것이 아니라, 저임금노동이라는 '희망'을 통해 창작의 길로 향해 갔음을 사려 깊게 표현한다.

복작거리는 마트에서 관계와 용기를 되찾다
 
네이버 웹툰 <도무지 그애는> 작곡가를 꿈꾸던 무지는 마트 판촉직으로 일을 시작한다.
 네이버 웹툰 <도무지 그애는> 작곡가를 꿈꾸던 무지는 마트 판촉직으로 일을 시작한다.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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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그애는>의 주인공 도무지는 작곡가로 살아가기 위해 작곡 공부를 했다. 그러나 꿈을 이어갈 수 없었다. 무지의 재능은 뛰어나지 않았다. 엄마에겐 큰 병이 생겼다. 당장 작곡으로 돈을 벌 수도, 공부에만 매진할 수도 없는 상황에 무지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 그런데 면접을 보는 족족 떨어지고 자존감도 같이 뚝뚝 떨어진다. 무지와 엄마가 둘이 사는 작은 방은 버리지 않은 쓰레기로 어느새 가득 찬다. 마침내 무지를 받아준 곳이 마트 시식 아르바이트였다. 마트에서 시식을 제공하고 영업하는 판촉직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중년 여성들의 전유물. 하지만 물불 가릴 때가 아니다. 그렇게 무지는 마트의 판촉직원으로 일을 시작한다. 일은 낯설고, 동료 '여사님들'은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무뚝뚝하다. 무지는 더듬더듬 일을 배워나가기 시작한다.

무지는 기본적으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손님들을 마주할 때 가끔 공황 상태가 되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위기상황을 넘긴다. 여사님들과도 나름대로 친근한 사이가 된다. 무지는 시식 일을 시작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쓰레기더미로 꽉 찬 집에서 세상과 벽을 쌓고 살다가 잃어버린 인간관계를 마트의 여사님들을 통해 새로 쌓아 올린다. 무지에게 일터는 단지 생활비를 버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불운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아직 연재 중이라서 무지가 다시 작곡을 하러 갈지는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설령 그런 클리셰로 이야기가 끝날지라도 이 이야기는 충분히 소중할 것 같다. 삶을 살아갈 희망을 얻는 과정에 노동이 매개가 되었다는 것을 이 작품이 성실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임금노동, 누군가에겐 치유이자 회복이자 희망

두 작품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청소노동과 판촉노동은 '일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밑바닥을 받치고 있는 저임금노동이지만, 누군가에겐 구원이고 희망이자 치유의 기회다. 이 작품들은 흥미롭게도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다 좌절한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수용자들이 저임금노동을 더욱 '하찮게' 바라보도록 유도하지만, 이후의 전개에서 주인공의 회복과 치유에 노동과 일터가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그려냄으로써 수용자의 편견을 깨뜨린다. 예술과 노동 사이, 혹은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 사이의 위계가 그렇게 허물어지고, 주인공들은 노동으로부터 다시 창작을 시작할 힘을 얻는다. 이런 이야기들이 세상에 더 많아질수록 우리의 모든 노동은 더욱 더 고귀해질 것임을 믿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강남규님은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입니다.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지 일터 6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여성_노동자, #저임금_노동자, #드라마, #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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