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07 07:04최종 업데이트 22.06.07 07:04
  • 본문듣기
소위 '괴작'이라 불리는 영화들이 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하고 낯설고 괴상한 작품들을 지칭하는 말인데, 사실 정확한 분류는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기에 괴상하면 '괴작'의 바구니에 이런 저런 작품들을 넣는다. 하지만 거기에는 작정하고 이상하게 만든 영화도 있고 특이한 개성을 가졌을 뿐 작가가 진지하게 만든 작품들도 있다.

이중 전자의 사례로는 대놓고 못 만든 컬트계의 고전 <토마토 대소동> 같은 작품들이 있을 것이다. 김곡·김선 감독의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과 같은 영화는 아마도 후자에 해당하지 않을까.(사실 두 감독의 의중을 몰라서 확신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굉장히 급진적이고 전위적인 풍자물인데 영화의 예고편만 봐도 왜 사람들이 괴작 목록에 넣었는지 이해는 간다. 포돌이 마네킹과 인형 쥐가 주인공인 영화라니.
 

영화 <자가당착>의 한 장면. ⓒ 곡사필름

 
분야를 바꿔서 음악으로 가보자. 실은 굉장히 진지한 태도로 만들었지만 사람들에게는 '괴상한 물건'으로 분류되었던 작품으로 무엇이 있을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무키무키만만수의 앨범 < 2012 >이다.(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확신할 순 없다) 이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은 때로는 은유적으로 혹은 직설적으로 계급 문제를 비롯한 사회 문제들을 다루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수록곡 중 '식물원'과 '2008년 석관동'은 인간관계에 대한 매우 서정적인 곡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사람들은 장구를 개조해서 만든 특이한 악기 '구장구장'과 후렴구에서 벌레를 수십 번 외치는 모습에 더 주목했고 그래서 일정 시간 무키무키만만수는 '괴작을 만드는 밴드', '기상천외한 노래를 하는 가수'로 인식되기도 했다.

'결기로 가득 찬 예술가'들이 떠오른 이유 

뜬금없이 하나의 영화와 하나의 앨범이 떠오른 것은 며칠 전 문화평론가 손희정과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생중계 방송을 끝내고 함께 퇴근을 하던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문득 '이 사람 문화평론가잖아'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 이후 줄곧 들었던 고민, 앞으로의 문화계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화두에 올렸다. 보수 정권이 집권한 시기에는 사실상 '관제 영화'나 다름없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던가. 보수적 국가주의를 찬양하거나 반공 이데올로기가 작품 전반에 깔려있거나 등등. 사실 이것도 잘 만들면 아주 이상하진 않은데 너무 노골적이고 직설적이라 미감이 정말로 구렸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의 출현에는 당시 정권이 대형 제작사들을 압박했던 배경도 있었다.


내 말을 곰곰이 듣던 손희정은 "그런데"라고 운을 띄우더니 이런 말을 했다.

"생각해보면 그때 구린 영화도 정말 많이 나왔지만 굉장히 급진적이고 전위적인 작품들도 많았어요."

그 말을 듣고 '그랬나?'하며 돌아볼 새도 없이 내 머릿속에는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가 떠올랐다. 그 시기에는 이 작품처럼 당대의 환란과 모순을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표현한 작품들이 꽤 등장했다. 그 다음으로 떠올린 무키무키만만수의 < 2012 > 역시 이명박 정부 말미에 나온 작품이다. 사실 이들이 앨범 발매 전부터 각종 집회시위 현장에서 수록곡을 불러온 걸 생각하면 창작시기는 그보다 더 이를 것이다.
 

무키무키만만수의 < 2012 > 앨범 ⓒ 무키무키만만수

 
'급진적인 것'이 등장하는 시대

문화예술뿐일까. 돌이켜보면 급진적이고 전위적인 사회운동이나 의제·정치세력은 대규모 위기상황이나 혹은 사회가 급격히 보수화 되었을 때 등장하곤 했다. 가령 월가 점령 시위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이어진 개인의 파산과 금융계의 도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금융 회사들이 보너스 잔치를 벌이는 상황에서 등장했다. 트럼프의 당선이 불러온 사회의 극우화와 이로 인한 위기감은 인종·사회 분야·정체성을 넘어 광범위한 여성의 연대를 이끌어 냈고 그 결과는 세계 여성의 날에 성사된 대규모 여성행진으로 나타났다. 한국 역시도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대규모 집회가 이어진 역사가 있고 그 속에서 각성한 개인과 집단들은 정치적 실험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아마 여기까지 글을 읽었다면 아마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감이 올 것이다. 2022년 한국은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며 정권이 교체되었고 이어진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소속 후보들이 대부분의 지자체장과 광역·기초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민주당이 진보인지 모르겠지만 국민의힘이 보수 혹은 극우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들이 지난 대선 기간 내내 여성가족부 폐지를 약속하는 것을 비롯해 시민운동에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고 소수자 관련 정책질의에 답도 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렇다. 이런 정부 아래에서는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릴 가능성이 높은데, 나 같은 성소수자를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들이야말로 이 과정에 제일 취약한 집단이다. 솔직히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다는 기분이 드는 이유다.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 공동행동이 국회에 설치된 차벽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규탄했다. ⓒ 여성가족부폐지저지공동행동

 
끝은 없다

하지만 보수정권 아래에서 등장한 결기로 가득 찬 예술가들. 그리고 위기 속에서 탄생한 급진적 사회 운동과 그 속에서 단단한 정치적 입장을 만들어간 개인들을 생각해보자. 그때 그들과 같은 새로운 인물이 지금 어딘가에서 가능성을 움트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잘됐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당장 나조차도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막막하다. 다만 그럼에도 모든 것이 망가져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나마 희망을 걸어볼만한 정치세력이 패배했고 그들에게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 말은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손희정의 말처럼 앞서 언급한 '결기로 가득 찬 예술가들'은 반짝이며 등장했지만 이어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로 고생을 겪기도 했다. 보수 정권 아래에서 시민운동과 진보정치를 향한 탄압은 또 얼마나 거셌는가.

앞으로 우리는 많은 싸움을 겪을 것이고 거기에는 가능성을 짓밟으려는 것에 맞서 이를 지키는 싸움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더욱 영민하게 주변을 살피고 가능성의 씨앗을 품은 개인과 집단을 지켜야 한다. 이전보다 더욱 민첩하고 더 넓게 서로와 연결되어야 한다. 굉장히 바쁜 시기가 다가올 것이다. 주저앉을 시간이 없다. 그러니 더욱 열심히 살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은 반만 맞다. 끝은 없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