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19 11:49최종 업데이트 22.05.19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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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국방부 민·관·군 합동위원회가 활동을 마무리하며 73개 권고안을 발표했다. 합동위는 공군 고 이예람 중사 성추행 사망 사건, 부실 급식 등 군과 관련한 문제가 계속 터지는 가운데 병영 혁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민간 전문가들을 대거 위촉해 출범했다.

운영 과정이 순탄하진 않았다. 해군 여군 부사관 사망 사건, 평시 군사법원 폐지, 군 급식 조달 체계 등 첨예한 이슈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국방부가 민간 위원들을 들러리 세운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결국 해단 무렵에는 민간 위원 1/3이 사퇴해 용두사미라는 지적을 받았다.


그럼에도 장병 복지 분야에서 참신한 권고가 여럿 제기되었다. 각계 전문가들이 야전 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의 애로 사항을 청취하고 현장을 돌아보고 만들었기에 유의미한 권고도 많았다.

2022년도 제2차 추가 경정 예산안에서 국방 예산이 1조 5068억 원 삭감된 데 대해 논란이 분분하다. 장병 주거 시설, 피복류 관련 예산이 대거 삭감되었기 때문이다. 삭감 항목은 지난해 합동위가 권고한 사항을 이행하는 부분과도 맞닿은 것이 많다. 어렵게 만든 병영 혁신안이 엎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될 법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추가경정예산(추경)안에 대해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전투화 등 피복류 예산 감액으로 장병들의 피해가 예상된다는 야당 지적에 대해 실제 피해는 없을 거라는 국방부 장관의 해명은 일견 타당한 측면이 있다. 지난해 군은 피복류 조달에 있어 예산 편성은 과도하게 해놓고, 실제 집행은 적게 하거나 경쟁 입찰로 단가를 낮추는 방식으로 예산 잔액을 과도히 남겨 감사원 지적까지 받았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육군은 전투화를 20만 8천 개 조달할 계획으로 예산을 편성했으나 실제 집행된 수량은 13만 개에 불과하다. 이로 인한 집행 잔액은 47억 원이다. 운동화의 경우 단가를 2만 8700원으로 잡아 예산을 편성해놓고 실제 낙찰은 1만 6849원에 해 잔액을 38억 7천만 원 남겼다.

이런 식의 방만한 예산 편성은 국방 예산의 고질적 문제 중 하나로, 정권에 상관없이 관행처럼 이어져온 폐습이다. 국방 예산이 뻥튀기 예산이라 지적받으며 주된 삭감 대상이 된 데는 국방부의 책임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국방 예산이 무턱대고 잘라내도 되는 돈은 아니다. 삭감 예산에는 우려스러운 지점도 많다. 쓰임새와 필요성, 계획을 면밀히 들여다보았는지 의심스러운 대목도 있다.

추경안에 따르면 2022년도 병영생활관 51개 소 개선 사업은 기존 예산 1885억 원에서 29.2%를 삭감한 1334억으로 책정되었다. 노후 병영식당 등 부속시설 개선 사업은 8.3%가, 노후 관사 개선 및 부족한 초급 간부 숙소를 확보하기 위한 사업은 22.9%가 삭감되었다.

국방부는 코로나19로 시설 공사 계획이 지연되고 있어 사업 기간이 연장될 것으로 예상되는 사업의 예산을 감액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아직 1년의 절반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도 풀렸다. 하반기에는 밀린 사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할 터인데 한 해 사업비의 1/3을 삭감하는 것은 올해는 그냥 넘기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이미 밀리고 있는 사업을 한 해 더 미루는 셈이다.

21세기에 병사들이 이런 데서 지내다니

지난해 민·관·군 합동위원회는 병영생활관 개선, 특히 훈련소 생활관을 침상형에서 침대형으로 교체하는 사업은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최대한 빠르게 추진하라는 권고를 남겼다. 국방부 담당 부서와 한참을 옥신각신 한 끝에 만들어낸 권고안이다.

생활관이 복잡한 설계가 필요한 것도 아닌데 국방부가 너무 사업 기간을 오래 잡은 것 아니냐는 위원들의 지적이 많았다. 당시 위원들 사이에는 팬데믹 상황에서 다닥다닥 붙어 자는 침상형 생활관을 침대형으로 조속히 교체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실제 육군훈련소를 방문해보니 침대형으로 교체해놓았다며 보여준 생활관도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기존 침상형 생활관에서 침상을 뜯어내고 이층 침대를 다닥다닥 두다 보니 좁은 건 물론이고 층고가 낮아 이층에 자는 사람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국방부 민·관·군 합동위원회가 육군훈련소를 방문해보니 침대형으로 교체해놓았다며 보여준 생활관의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기존 침상형 생활관에서 침상을 뜯어내고 이층 침대를 다닥다닥 두다 보니 좁은 건 물론이고 층고가 낮아 이층에 자는 사람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김형남

 
현장을 본 위원들은 너나없이 충격을 받았다. 21세기에도 병사들이 이런 곳에서 지내며 훈련을 받는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 듯 보였다. 계획된 신·증축 사업을 조속히 추진하라는 권고는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일반 생활관 개선 사업도 마찬가지다. 감군과 부대 통폐합 계획이 혼선을 빚은 탓에 전방엔 사용할 수 없는 낡은 생활관을 새로 짓지 못하고 수년째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임시 막사'에 살고 있는 병사들이 있다.

초급 간부 숙소 사업도 시급하긴 마찬가지다. 직업군인 숙소는 개인 주거공간이다. 그런데 숙소가 모자라 1인실에 2인이 들어가 살고, 난방이 제대로 안 돼 너도나도 전열기를 갖다 쓰다 정전이 되는 곳이 부지기수다.

사업이 밀리면 결국 피해를 감내해야 하는 것은 장병들이다. 특히 복무기간이 정해져 있는 병사들은 '결과적으로 내 군 생활 중엔 안 바뀌는 거 아니냐?'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생활관 개선은 장병들에게 무슨 대단한 혜택을 주는 사업이 아니다. 열악한 주거 환경에 장병들을 방치해둔 기막힌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를 뒤늦게 이행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재차 의무 이행을 유예하려 한다. 허리띠도 필요와 현황을 살펴 졸라매야 할 터인데 종합적인 고려가 이루어졌는지 의문이다.

정부는 군대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이 없고, 국방부는 국민 세금을 함부로 타다 쓰며 불신을 키웠다. 그 탓으로 부실 급식으로 촉발된 국민의 분노 속에 애써 만든 소중한 변화들이 손쉽게 엎어질 위기다.

전문가들이 일선 부대를 찾아다니며 머리를 맞대고 만든 사업이 다 불필요한 예산으로 치부된다. 결국 추경에 등 터지는 건 장병들뿐이다. 얼마 전 인상 계획을 후퇴시킨 월급 문제도, 장병 복지도, 처우 개선도 다 '나중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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