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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①] "역사적 장소가 유튜버 '야방'에 사용... 화 나는 일" )
 
 전태일 다리라고 불리는 버들다리 위 전태일 열사의 동상
  전태일 다리라고 불리는 버들다리 위 전태일 열사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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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선 얘기를 좀 해보자.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의 마지막 꼭지로 노동문제와 함께 이소선을 다뤘는데, 좀 의아했다. 사실 이소선 하면 노동 운동가라기보다 전태일의 어머니로 더 알려져 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이소선을 '어머니'라고 부르지, '운동가'로 부르지 않는다. 왜 굳이 이 책의 마지막 꼭지를 이소선으로 잡은 것인가?

"1970년대 노동운동은 봉제공장, 방직공장, 섬유 산업 공장들에서 시작됐다. 이때 80% 이상이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이 정말 치열하게 싸웠다. 그런데 막상 노동운동사는 남성 중심으로만 다뤄진다. 처음엔 '이게 사실인가? 이게 정말 맞나?'에서 시작했다. 의문을 가지고 들여다보니 그 중심에 이소선이라는 사람이 있더라. 전태일 선배 사망 이후에 어머니를 향한 온갖 회유와 협박이 있었다. 중앙정보부 같은 곳에서 돈을 보따리로 싸오기도 했다. 그때 이소선은 보따리를 찢어 돈을 공중에 뿌려버렸다. 그렇게 담대한 분이셨다. 이소선이 돈에 넘어가지 않은 덕분에,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을 비롯해 당시로는 획기적인 8개의 사항을 약속받을 수 있었던 거다.

나는 전태일이라고 하는 사람 뒤에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바쳤던 이소선의 노력이 없었으면 전태일이 지금처럼 기억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당시의 이소선은 노동 사안이 있는 곳마다 거침없이 연대했고,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했다. 그 모든 활동을 열사의 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할 수는 없었을 거다. 그런 점에서 이소선은 분명 위대한 활동가이자 운동가였다. 결국 마지막 꼭지를 이소선으로 잡은 이유는 첫번째는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사를 이야기할 때 전태일과 함께 이소선이라는 이름도 빼놓아선 안 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어머니'라는 이름 앞에 가려진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조명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 여성 노동자들의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했는데, 어떤 점이 그랬는지 좀 더 설명해준다면?

"당시만 해도 가부장적인 시절이라, 남자는 학교를 다니고, 여자는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보낸 이후에 돈을 벌게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평화시장에는 고작 열 세 살짜리 노동자도 있었다. 이소선은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동 교실을 만들어서 공부를 할 수 있게 했다.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낮에 그렇게 힘들게 일하고, 밤에는 이 노동 교실에서 공부했다. 그들은 교육을 통해서 삶을 다시 보게 되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열정적이었다.

그런데 이 노동 교실이 정말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고, 또 탄압을 이기지 못해 닫았다가도 다시 열고는 했다. 그렇게 버티면서 살려낸 것이 이소선이라는 운동가였다. 여성 노동자들과 이소선의 관계는 정말 끈끈하다. 그가 구속되었을 때 여성 노동자들이 성동구치소에 쫓아가서 그 앞에서 이름을 목 놓아 부르기도 하고... 그런 애절한 이야기들이 있다."

"분열의 시대... 선동하고 조장하는 정치인 때문" 
 
5월까지 열리는 이소선 10주기 추모 특별전시 '목소리'에는 노동운동가로서의 이소선의 업적이 사진과 함께 전시된다.
 5월까지 열리는 이소선 10주기 추모 특별전시 "목소리"에는 노동운동가로서의 이소선의 업적이 사진과 함께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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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새 대통령이 선출됐다. 윤석열 당선인은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고, 임금에 큰 차이가 없으면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무슨 구분이 있냐고 하고, 120시간 노동에 대해 '발언' 했다. 누구는 윤석열 당선인이 노동정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국민의 48.6%는 결국 그를 지지했다. 이런 것들을 보면 박래군이나 이소선이 평생을 바쳐 지키려 했던 가치가 점점 퇴행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

"사실 어머니(이소선)한테 그랬었다. '전태일 선배 돌아가시고, 이렇게 치열하게 살았는데 안 되지 않냐, 노동자들은 더 고통스럽고 비정규직은 더 양산되지 않냐, 어머니는 왜 계속 싸우시냐, 뭘 바라고 싸우시냐, 지치지 않냐, 절망하지 않냐' 물어본 적 있었다. 그러니까 그러시더라. '되어야 할 것은 언젠가 된다, 지금 당장은 거꾸로 가고 퇴행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언젠가 되더라...' 그 말이 나한테도 좀 남았는데, 그게 역사가 아닐까 싶다. 가끔 뒤로 가기도 하고,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을 수 있지만 무조건 뒤로 갈 수는 없다는 믿음이 있다. 같은 맥락으로, 윤석열 정권이 들어섰다고 해서 무작정 퇴행하진 않을 거다. 물론 고통스럽겠지만, 또 가야지."

- 지금 2022년 한국 사회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분열의 시대가 아닌가 싶다. 노동자와 자본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여성과 남성, MZ세대와 그 윗세대 등등으로 나뉘어 서로를 공격하고, 또 혐오한다. 아무래도 통합을 얘기하는 건 정치인들밖에 없는 것 같은데, 지금 이 사회를 어떻게 보시나?

"분열의 시대가 맞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우리가 이런 시대를 맞게 된 것은 누구보다 이런 분열을 조장하고, 혐오를 부추기고 선동하는 정치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이 고비도 넘어갈 거라고 본다. 이준석 같은 부류가 가장 비열한데, 지금도 계속 저항을 받고 있지 않나. '이대남'으로 갈라치기 하지만 나중엔 20대 여성이 결집했다. 최근에는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과 관련한 발언으로 인해 오히려 그들에 대한 연대가 강화됐다. 이준석은 결국 정치적으로 고립될 것이다.

그래서 단순한 현상으로 보면 분열과 혐오의 시대지만, 이걸 제어하는 힘도 점점 강화된다. 역설적으로 지금이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상황이 되지 않았나. 물론 한동안 혼돈의 시대가 오겠지만 오래 가지는 못할 거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유명한 말이 있다.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위기는 생겨난다. 이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지금이 딱 그런 시대가 아닌가 싶다. 지금 다양한 병적 징후가 사회 곳곳에 나타나는데, 결국 새로운 물결이 만들어질 거라고 본다. 다만 한동안은 힘들 텐데, 제일 걱정은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잘 견뎠으면 좋겠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3월 28일 오전 서울 중구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과 장애인 권리예산, 이동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지하철타기 출근선전전을 벌이고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3월 28일 오전 서울 중구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과 장애인 권리예산, 이동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지하철타기 출근선전전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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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으로 '인권'은 보편적 개념인 만큼 중간에서 적당히 좋은 얘기를 한다면 양쪽으로부터 지지와 존경을 받을 수도 있을 텐데, 박래군은 자꾸 한쪽 편을 든다.

"이건 진짜 오해다. 나를 비롯한 인권운동가들은 세계인권선언이나 국제인권규약에 의거해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엄청나게 진보적인 것도 아니고 그냥 인류 보편적인 기준이라는 거지. 그런데 이런 보편적인 인권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나보고 빨갱이라고 한다. 아마 이 인터뷰를 보고 또 그런 댓글을 달려는 분이 있다면 꼭 알아두면 좋겠다.(웃음)"

- 사람들은 이제 부동산이나 주식이나 아파트나 코인을 이야기한다. 그런 시대에 박래군은 여전히 노동과 연대와 여성과 인권을 말한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거나 혹 외로울 때는 없는지?

"일단 일도 너무 많고 바빠서 외로울 틈이 없다. 한가해야 좀 외롭기도 하고 그럴 텐데...(웃음) 사실 지금 사람들이 이렇게 부동산에 집착하는 원인을 곰곰이 따져보면 노동을 통해서는 답이 안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 불안하니까 부동산으로 가고, 제 노동만으로 먹고 살기 힘드니까 주식으로, 코인 투자로 가는 거다. 나는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면 상당 부분 완화될 거라고 본다. 엄청난 노동 개혁을 하자는 거 아니다. 그냥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면 된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노동자 관련 정책이나 인식이 너무 후지다. 노동자들이 뼈를 갈아내서 이만큼 만든 건데 이 체제를 대체 언제까지 계속 유지할 건가. 갈수록 임금 격차는 더 심해지고, 사회는 급격하게 신분제 사회로 바뀌어간다. 이걸 막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내가 하는 활동은 의미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핵심적인 거라고 생각한다."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마디한다면?

"우선 이 책은 인세 전액이 4.16재단과 인권재단 사람에 기부된다. 내가 가져가는 건 하나도 없다(웃음). 그걸 떠나서 열심히 만들었고,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를 담은 책이니까 많이 봐주시면 좋겠다. 처음 1권을 냈을 때만 해도 독자들과 함께 책에 나오는 장소를 다니고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아직도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 독자 여러분도 기회가 되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장소들을 한번 찾아가 봐 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주시면 좋겠다. 나중에라도 다들 어떻게 느끼셨는지 꼭 듣고 싶다."
 
1990년, 이소선과 박래군. 유가협 회원들과 강원도 여행에서.
 1990년, 이소선과 박래군. 유가협 회원들과 강원도 여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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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박래군, #이소선, #전태일, #상처는언젠가말을한다, #인권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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