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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발표하는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발표하는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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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79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도한 12.12 군사쿠데타 당시, 국방부 지하벙커 경계근무를 서다 반란군에게 살해당한 초병의 상세한 사망경위가 43년 만에 드러났다.

그동안 이 병사의 사인은 공식적으로 '계엄군과의 오인사격으로 인한 사망'으로 처리됐지만, 사건을 재조사한 국가기관은 '상관의 명령 없이는 총기를 내어줄 수 없다'고 저항하는 헌병근무자를 향해 반란군이 총기를 발사했고, 쓰러진 피해자를 권총으로 확인 사살했다는 새로운 기록도 확인했다. 또 신군부가 반란에 저항하다 숨진 병사의 사망원인을 왜곡하고 은폐·조작한 정황도 드러났다.

<오마이뉴스>가 25일 입수한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의 '진정 제1324호 사건' 결정문에 나온 조사결과다.

진상규명위 "임무 수행 중 반란군에 소총 뺏기지 않으려 대항하다 사망"

결정문에 따르면 국방부 제50헌병중대 소속 정선엽 병장은 1979년 12월 13일 새벽 국방부 지하 B-2 벙커 외곽 초소에서 초병근무를 서고 있었다.

오전 1시 35분경 용산 삼각지에 도착한 1공수여단 제1, 2대대는 육본 정문에서 근무 중인 헌병들을 무력으로 제압한 후 무장을 해제 시키고 안으로 진입해 육본 건물을 점령했다. 이 직후 박희도 여단장은 제5, 6대대에게 국방부 청사를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1공수여단 제5대대의 작전일지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79. 12. 13 01:15경 5대대장이 선두에서 중앙바리케이트를 밀어낸 후 청사 쪽으로 돌격을 명령하였고, 14지역대(특전사 편제 중 대대와 중대 사이의 제대 - 기자 주)와 15지역대, 16지역대가 청사에 접근하는데, 같은 날 02:10경 헌병 4명이 청사 내에서 사격하여, 이에 응사하며 목표에 접근하였다. 같은 시각 15지역대장이 벙커로 돌격을 지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벙커 출입구에 헌병 근무자 2명 중 1명은 체포하고, 1명은 반항사격과 함께 벙커로 도주하여 사살하였다.

반란군에게 살해된 헌병 근무자가 바로 정선엽 병장이다.

당시 제5대대 15지역대장 김아무개 대위는 위원회에 출석해 "대대장으로부터 'B-2벙커로 진입하라'는 명령을 받고 약 50명의 대원을 이끌고 청사로 진입 중, 벙커 입구를 지키던 헌병이 우리 대원의 무장해제 요구를 거절하여 결국 총을 발사하여 사망하였다는 사후보고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15지역대 박아무개 하사는 "당시 발포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국방부 헌병이 비켜주었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비켜주지 않아 '권총'을 맞고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15지역대 이아무개 하사는 "벙커에 있던 망인(정 병장)이 계단을 통해 밖으로 나오다 진입하던 공수대원과 마주쳤고, 그때 망인이 총격을 받고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당시 '권총'은 부중대장 이상 간부만 소지했다"고 진술했다.

진상규명위는 정 병장에게 직접적인 총격을 가한 공수대원의 인적사항을 특정하지는 못했지만, 정 병장 사망경위와 관련해 권총 소지자의 계급을 추정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진술을 확보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정 병장이 권총 총상을 입었다는 부분이다. 반란에 가담했던 15지역대 병력 중에서 권총을 소지할 수 있었던 간부는 5~6명 선으로 압축된다.

이와 관련, 정 병장의 후임병 이아무개씨의 증언은 주목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씨는 "13일 당직대 근무 중, 전일 B-2벙커 외곽 동초에 배치되었던 성명을 알 수 없는 방위병이 얼굴을 다친 채 찾아와 'B-2에서 근무 중이던 헌병이 총을 빼앗으려는 공수부대원과 격렬한 몸싸움 끝에 공수부대 대위가 헌병의 목에 대고 권총을 발사하여 사망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저는 공수부대원으로부터 폭행당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숨진 정 병장을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이송했던 김아무개씨는 "시신의 귀 위쪽 머리 부분이 계란 크기로 파였는데 총알 사출구로 보였으며 군의관으로부터 '이것은 목에 근접하여 권총을 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같은 부대 당직하사 권아무개씨는 "시신의 목에 소총 근접사격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관통상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는 과거의 기억을 소환했다.

수도통합병원 검시 과정을 참관했던 50헌병중대 수사관 김아무개 상사의 진술에 따르면 정 병장은 머리에 한 발, 가슴에 세 발 등 총 4발의 총상을 입고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위원회는 정 병장 사망 순간을 직접 본 목격자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또 정 병장 살해에 사용된 총기가 M-16 소총인지, 권총인지, 아니면 둘 다 사용된 것인지 명확히 밝힐 진술과 증거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12.12 쿠데타 당시 살해당한 고 정선엽 병장의 형 정훈채씨. 지난해 12월8일 <오마이뉴스>와 만난 그는 "동생의 묘비에는 '순직'으로 되어 있다"며 "국방부 장관의 청사 사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다 숨졌으니 '전사'로 바로잡아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12.12 쿠데타 당시 살해당한 고 정선엽 병장의 형 정훈채씨. 지난해 12월8일 <오마이뉴스>와 만난 그는 "동생의 묘비에는 "순직"으로 되어 있다"며 "국방부 장관의 청사 사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다 숨졌으니 "전사"로 바로잡아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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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위원회는 "정 병장이 '12.12 군사반란' 당시 국방부 B-2벙커 초병 임무 수행 중, 반란군에게 소지하고 있던 M-16 소총을 빼앗기지 않으려 대항하였고, 성명을 알 수 없는 15지역대원들이 망인의 목에 발사한 1발과 가슴 부위에 발사된 3발의 총격으로 사망한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정 병장은 공수대원들이 자신의 M-16 소총을 빼앗으려 하자 "우리 중대장님 지시 없이는 절대 총을 줄 수 없다"면서 몸싸움을 벌이다 총격을 받고 절명한 것으로 드러났다.

위원회는 당시 신군부가 작성한 매화장 보고서에 '계엄군 증가 인원과의 오인에 의한 총기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기재하는 등 정 병장의 사망을 왜곡하고 은폐·조작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위원회는 "망인은 반란군의 무장해제에 대항하다 살해되었고, 이는 군사반란을 방지하기 위한 행위로 인해 사망하였다고 인정할 수 있다"면서 정 병장의 사망 구분을 '순직'에서 '전사'로 변경해 줄 것을 국방부에 요청했다.

현행 군인사법은 '전사자'를 "'적과의 대항 또는 적의 행위로 사망한 사람', '무장폭동, 반란 또는 그 밖의 치안교란을 방지하기 위한 행위로 인하여 사망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정 병장의 경우도 당연히 이에 해당한다는 것이 위원회가 내린 결론이다(관련 기사 : "전두환 반란군과 싸우다 죽은 동생, '전사'로 바로잡아야").

태그:#12.12 군사쿠데타, #고 정선엽 병장, #국방부 지하 벙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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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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