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12 12:04최종 업데이트 22.02.12 12:04
  • 본문듣기

내가 간 사설 검사소의 경우 메시지 앱인 WhatsApp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파일로 검사 결과지를 전송해주고 해당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에겐 직접 종이에 적힌 결과지를 전달해준다. 검사 30분 정도 후에 결과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문서를 바탕으로 직장인들은 병가를 신청하게 된다. ⓒ 림수진


Positivo(양성), 검사결과지에 한 단어로 적힌 내용을 보고 나도 모르게 그만 픽 웃음이 나와 버렸다.

'올 것이 왔구나'라는 체념, '설마'하다 결국은 걸려버렸다는 허탈함, '그러면 그렇지'라는 확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막연함이 복잡하게 얽힌 감정의 표출이었다.


1차 유행, 2차 유행, 3차 유행을 무사히 넘기고 다시 지난 연말부터 시작된 4차 유행의 시기를 지나오면서 코로나바이러스는 언제나 딱 '습자지 한 장 차이로' 내 곁을 스쳐 지나다니는 듯했다.

특히 이번 4차 대유행은 주변의 이웃이나 동료들 중 걸린 사람들이 걸리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듯했으니, 내가 걸린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란 생각을 계속 나 스스로에게 주입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럼에도 물리적으로 가까운 지인들이 감염되었거나 죽음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은 날에는 나와 코로나바이러스 사이에 그 얇디얇은 습자지마저 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그런 긴장은 밀물과 썰물처럼 내 삶으로 바짝 다가섰다가 다시 내 삶으로부터 조금 멀어지는 주기로 반복되었다. 호흡 곤란이 오기 전에는 병원에 갈 수 없고 설령 호흡 곤란이 온 이후라도 될 수 있으면 산소통을 구해 집에서 머무는 것이 낫다라는 사회적 통념이 우세한 이곳에서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일절 무시'였다.

주변에서 제법 많은 동료와 이웃들이 감염되고 그들 중 일부가 죽어버린 상황을 마음에 품기엔 그 마음을 품어줄 수 있는 사회적 혹은 제도적 기반이 턱없이 부족한 곳이었다. 확진과 사망 숫자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감염자들이 늘 주변에 있을 수밖에 없고,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이 결코 처치 혹은 치료와 동일시될 수 없는 곳에서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애써 현실의 상황들을 무시하거나 축약하여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올 것이 왔다
 

무료 검사를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검사소 문 앞에서 노숙하며 밤을 새우고 있다. 멕시코 시티를 비롯, 주변 도시들은 요즘 밤 기온이 섭씨 영상 5-6도까지 떨어져 추운 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음 날 검사가 가능한 번호표를 받기 위해 노숙을 한다. 4차 대유행을 맞고 있는 멕시코의 경우 양성율이 60%를 넘어서고 있다. ⓒ Imagen 뉴스

 
'양성'으로 나온 검사지를 받고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검사소 직원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양성이란 결과지를 들고 그들에게 다가서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기왕에 쓰고 있던 마스크 위로 다시 하나를 덧대어 쓰고 검사소를 나와 차가 주차된 곳으로 갔다. 차 안에서 검사소 직원과 통화를 했다. 혹시 내가 어디에 신고를 해야 하는지, 양성 판정 이후 내가 수행해야 할 어떤 절차가 별도로 있는지 물었다. 검사소 직원의 답은 '일단 집에 가서 각자 판단에 따라 알아서 하라'였다.

사실,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왔음에도 그 때까지 내게는 별다른 증상이 없었다. 하루 전 날부터 약간 코맹맹이 소리가 나는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코가 막히거나 목이 아픈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검사를 받기로 결심한 것은, 옆집 할머니가 닷새 전에 확진을 받은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할머니가 확진을 받았지만, 검사를 받지 않은 할아버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을 하셨다. 물론 마스크를 쓰지 않으신 채. 할머니댁에 음식을 해다 나르거나 장을 보아다 드렸지만 대문을 열고 들어가 바깥마당에 음식을 두고 나와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가끔 우리 집을 불쑥 들어오셨다. 내가 미처 마스크를 쓸 사이도 없었다. 한 집에 같이 사는 할머니가 감염되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도 당연히 조심하셔야 했지만, 이곳에서 그런 사회적 혹은 제도적 장치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에게 감기 기운이 있다는 소식을 들려왔다. '아, 나도 검사를 받아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웃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많은 이들이 확진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광풍이 불고 있었다.

일단, 우리 마을엔 검사소가 없으니 주변 도시로 나가야 했다. 옵션은 두 가지. 정부에서 운영하는 무료 검사소와 돈을 내고 하는 사설 검사소. 나는 증상이 없어 무료 검사 대상이 아니었다. 사설 검사소로 알아보니, 일요일엔 쉰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다음 날인 월요일까지 기다렸다.

PCR 검사가 아닌 신속 항원 검사를 신청했다. 내가 간 곳은 사설 검사소 중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검사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PCR 검사는 50달러를 넘어섰다. 신속항원 검사 비용은 15달러 수준이었다. 여느 검사소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서인지, 엄청난 사람이 몰려 있었다. 미리 예약을 하고 갔기에 많이 기다리지 않을 줄 알았으나, 사실 예약이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대기실(실내)에서 수십 명이 쿨럭쿨럭 기침을 하고 있었다. 내겐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이후 처음 받아보는 검사였다.

집에 와서 그간 접촉했던 가까운 지인들에게 나의 결과를 알렸다. 미안한 마음이 우선하였는데, 전화를 받은 지인들은 나를 위로했다. 단 한 명도 나의 결과를 원망하는 이가 없었다. 당장 내게 필요한 것들을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이후로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같은 전화가 걸려왔다.

호흡 곤란이 온다면?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의 한 산소 충전소에서 27일(현지시간) 인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에 공급할 산소통을 재충전하고 있다. 2020.12.28 ⓒ 연합뉴스

 
전화를 마친 후,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해봤다. 일단 직장에 알려야 했다. 수업은 비대면에서 대면으로 넘어가려던 시점이었다. 나는 월요일 확진을 받았고 이틀 후인 수요일에 이번 학기 첫 대면 수업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학생들을 만나기 전에 확진을 받은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학교에서는 의료보험 기관을 통해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병가'를 신청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공식 병가가 인정된다고 했다.

보름 전부터 실시되었으나 여전히 오류들을 가지고 있고 또한 접속하여 완료까지 이르기가 힘들다는, 그 유명한 시스템에 나도 접속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절차는 장황했다. 게다가 파일 첨부 형식으로 등록해야 하는 서류들이 여섯 가지나 되었다. 그 중엔 증명 사진과 은행 계좌 증명 사본도 포함되었다. 모든 서류들은 PDF 버전이어야 했다. 그 부분에서 나도 하마터면 포기해버릴 뻔했다.

무엇보다 계좌 증명 사본을 왜 등록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규모 사업장의 경우 피고용자의 결근으로 인한 손실을 고용주 대신 보전해주는 방책이라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다행히 계좌 증명 사본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서류가 있어 스캔을 하고 PDF 파일로 전환하여 등록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병가 승인이 나고 말고는 내가 알 바 아니란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승인이 났는지 다음 날 등록된 나의 이메일로 7일간의 병가가 승인되었다는 연락이 와 있었다.

그날 밤 한국에 있는 친구가 설이라고 연락을 해와 안부를 묻기에 나의 사정을 알렸다. 한국도 이미 1일 확진자가 2만 명대로 접어들고 있던 시점이었는데, 친구는 많이 놀라는 눈치였다. 무엇보다 당장 병원에 가라고 난리였다. 지금 바로 당장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를 절대로 우습게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친구의 성화가 고맙긴 했지만, 계속하여 듣고 있자니, 마치 놀이동산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사람에게 '반드시' 놀이동산에 가야 한다고 종용하거나, 혹은 사과가 없는 세계의 사람에게 '반드시' 사과를 먹어야 한다고 종용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당장 달나라에 가야 한다는 말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창궐한 지 2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지만, 세계의 각 곳마다 그 바이러스 앞에서 사고하고 대처하고 대응하는 방식이 참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2월 4일 하룻 동안 멕시코에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사망한 숫자는 688명이었다. 이로써 보건 당국에 의해 집계된 누적 사망자 308,829 명에 통계청에서 보정하여 더한 숫자 161403명이 더해져 총 470232명의 생명이 지난 2년 간 사라졌다. 지금까지 멕시코에서는 515만 명이 확진되었다. 치명율은 여전히 9%를 넘어선다. 코로나바이러스 발생 초기, 보건 당국이 제시한 '한 명의 생명이 소중하다'라는 문구가 무색해진다. ⓒ Imagen 뉴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있는 곳은 '코로나바이러스의 감염'이 결코 병원을 통한 처치 혹은 치료로 자동 연결되지 않는 곳이다. 한국 사람인 나도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않았다. 보건 당국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는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다. 사비를 들여 확진을 받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타이레놀 한 통을 옆에 두고 물을 충분히 마시면서 집 밖에 나가지 말고(물론 일부 동료들과 이웃들은 내게 나가도 된다고 하였지만)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혹시 내게 호흡 곤란이 오게 된다면 병원에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고, 동시에 호흡 곤란이 와도 어지간하면 집에서 산소를 구해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이곳 멕시코에서 코로나바이러스에 직면하게 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기도 했다. 다만, 내가 한국 사람이었기에 나는 이곳의 생각과 한국으로부터 습득한 생각 사이에서 조금 더 혼돈스러웠다.

코로나로 사망한 동료에게
 

코로나 감염 확진을 받은 이후, 하루도 거름없이 이웃들은 우리집 대문 앞에 과일, 채소, 고기, 빵 등과 같은 식량들을 놓아두고 갔다. 지난 토요일 아침엔 우리집 대문에 코카콜라 네 병이 비닐봉지에 담겨 걸려 있었다. "어서 낫길 바랍니다. 당신이 그립습니다"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는데 누군지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다. 그 날 오후에는 금방 밭에서 딴 듯한 호박 한 덩어리가 우리집 바깥 마당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덕분에 먹고 삽니다"라는 말이 참으로 고맙게 와 닿는 즈음이다. ⓒ 림수진


다행히, 지난 닷새 간 큰 어려움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몸 이곳저곳에 불편함이 있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문 앞에는 매일매일 음식들이 쌓여 있었다. 부탁하지 않았음에도 마을 이웃들이 과일, 고기, 채소, 빵 등 매일 사야 하는 것들을 사다가 대문에 걸어 두었다. 기운을 차리고 며칠 미뤄둔 일들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지난 12월에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으로 세상을 뜬 동료의 조사(弔辭)를 썼다(관련기사 : 동료의 죽음... 멕시코 거리에서 펼쳐진 지옥도, http://omn.kr/1wzkd).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고 또한 역병으로 인한 죽음이었기에 제대로 된 작별의 예를 갖추지 못하고 보내 드린 것이 많은 이들의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지난 1월 중순, 멕시코 지리학회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평생, 그리고 마지막까지 지리학자로 살았던 그를 학교와 학회 차원에서 애도하고 기리는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함께 일했던 내게 조사를 부탁했다. 일정은 2월 중순이었다. 왕복 스무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지만 감사하고 아픈 마음으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곳에 내가 가기 어려워졌다. 나 역시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주최 측에 양해를 구해 동영상으로 조사를 녹화했다. 몇 년간 같이 일을 해오면서 호흡이 척척 맞았던 동료였다. 나보다 열대여섯 살 나이가 많았고 교수로서 그리고 학자로서 이를 수 있는 최고점에 있으면서도 그간 단 한 번도 나를 하대하지 않고 최대한 배려하고 존중해줬다.

컴퓨터로 하는 문서작업과 통신을 꺼려하는 특유의 고집이 있어 사실 같이 일하기에 상당히 괴팍한 동료이기도 했다. 하지만 작업 결과들은 인쇄된 활자보다 더 정갈하게 연필로 꾹꾹 눌러써 늘 약속된 날짜에 DHL로 내게 보내왔었다. 그가 있는 곳이 외국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치의 오차가 없었다. 정말 작은 일도 그는 한 순간의 긴장을 놓지 않고 소중히 여겼다.

영어 사용자들이 땡큐(Thank You)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듯, 이곳 사람들도 그라씨아쓰(Gracias)라는 말을 흔히 한다. 나 역시 그간 그와 일 해오면서 수시로, 혹은 습관적으로 그 말을 해왔다. 하지만 막상 그가 죽고 난 이후 그에게 미안했고 그래서 슬펐던 것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나의 고마움을 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이 역병이 내게 알려준 것은 언제라도 순간순간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늦었지만, 그를 애도하고 기리는 조사에서라도 나는 나의 동료에게 내 마음의 감사를 전하고 싶다.

"독또르 알바로 산체스(Dr. Álvaro Sánchez), 그간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부디, 안녕히 가세요."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