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24 06:09최종 업데이트 22.07.27 17:55
  • 본문듣기
한국에서 이주자는 살아 숨 쉬는 자인가. 존 버거는 <제7의 인간>에서 이들을 가리켜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라 했다. 오직 노동하는 몸으로 기능하기를 요구받고, 표류함이 당연시 여겨지고, 존재할 권리를 국가의 허락에 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현주소이다. 체류권을 '허가'받은 이주민들조차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제대로 획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국가는 잔혹하고, 사회는 무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일. 한국사회에서 살아 숨 쉬는 이주민들의 삶을 르포르타주로 담고자 한다.[편집자말]
한국에서 거주하는 미얀마인들이 결성한 미얀마군부독재타도위원회(이하 타도위)는 지난 1월 1일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 강당에서 '민중혁명의 해 2022' 행사를 했다. 기온이 뚝 떨어진 날씨에도 행사장의 열기는 높았다.

행사장 입구에서 'People's revolution 2022(민중혁명의 해 2022)'라고 새겨진 기념 굿즈를 판매하는 두 그룹은 서로 경쟁하듯 즐거운 열정을 쏟아냈다. 그런데 내놓은 상품이 전과 다르다. 예전 같으면 구호나 상징이 그려진 면 티셔츠나 배지가 올랐을 매대에 이번에는 후드 티셔츠와 야구 점퍼가 놓여있다. 젊은 취향이다. 그만큼 군부 쿠데타에 맞선 민주화운동에 젊은이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행사장에도 20대 초중반 젊은이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데, 너나없이 간지 나는 야구 점퍼를 사 입었다. 젊은이들은 초로의 선배에게 야구 점퍼를 입혀놓고 "형님도 잘 어울린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나이 든 형님들은 "애들 덕분에 이런 옷을 다 입어본다"라며 끄덕이는 미소로 화답했다.
 

2022년 1월 1일 독재타도위원회가 주최한 민중혁명의 해 선포 행사. ⓒ Phay Sist Naing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

행사에서 띤테이아웅(30살)은 동료들과 팀을 이뤄 노래 원데이 챌린지(One Day Challenge, 하루의 도전)를 불렀다.


원데이 챌린지는 한국 거주 미얀마인들이 6~18개월간 매월 정기적으로 자신의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을 기부하는 타도위가 기획한 모금 프로젝트다. 모금 참여자 중에는 매달 30만 원~100만 원을 박봉에서 뚝 잘라 내는 이들도 있다. 1월 현재 1천6백여 명이 참여해서 매달 1억 5천만 원 이상을 모으고 있는데, 모두 NUG(National Unity Government, 민족통합정부)로 보낸다.

NUG는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미얀마인들이 보내는 기부금과 혁명 채권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여러 소수민족 무장단체, 400여 개 PDF(People's defence force, 시민방위군)와 함께 민중혁명을 도모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제사회를 향해 공식적으로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타도위를 구성하는 이들은 말한다. 몸이 미얀마에 있었다면 총을 들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한국에 있으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에 노력을 다하겠다고. 노력은 모금, 한국 사회에 정확한 소식을 전달하고 한국 시민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일, 외교적 노력을 통해 한국 정부가 NUG를 인정하고 지원하게 하는 일, 미얀마에서 활동하는 시민들을 지지해서 동력을 유지하는 일 등이다.

이번 행사에서 선보인 노래 원데이 챌린지는 한국과 미얀마를 오가며 만들었다. 노랫말과 곡은 한국에서, 연주와 녹음은 미얀마 본토 음악인들이 참여했다. 미얀마에서는 노래를 빼고 반주 음원만 만들었다. 검열과 단속, 무자비한 살상이 난무하는 미얀마에서 '우리 피로 새 역사를 쓰자, 독재를 끝장내자'라는 노랫말을 들켰다가는 음악인들이 어떤 고초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음원에 노래를 더하는 과정은 다시 한국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독재타도위원회가 주최한 2022 민중혁명의 해 포스터 공모 사업 당선작. ⓒ Kie Yeom

 

이처럼 미얀마 현지와 한국은 서로 주고받으며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포스터 역시 마찬가지다. 타도위는 나름 큰 상금을 걸고 혁명의 해 홍보 포스터를 공모했다. 공모에 접수된 포스터 37개는 모두 미얀마 본토 거주자들의 작품이다.   
  
타도위와 같은 해외 운동 그룹들은 모금을 하고, 모금액은 NUG로 넘어가 혁명세력의 결속과 투쟁을 돕는다. 자금으로 난민을 구호하고 시위와 전투 자원을 마련한다.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운 해외 그룹은 온라인을 활용한 각종 기획으로 본토 평범한 시민들이 혁명에 참여할 기회를 확장한다. 시민들은 냄비를 두드리고, SNS에 글과 사진을 올려 소식을 전한다. 더 적극적인 이들은 지역마다 가두시위를 조직하거나 CDM(Civil Disobedience Movement, 시민불복종운동)과 PDF에 참여한다. 미얀마 운동가들은 이처럼 맞물린 구조가 혁명 완수로 가는 기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쿠데타 소식에 뭐라도 해야겠다 결심"

1월 8일, 인천 부평에 있는 NUG 한국대표부 사무실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얀나잉툰 대표부 특사는 여러 나라에 설치된 대표부 특사들과 온라인 회의를 하고 있고, 묘헤인 노무·공보관은 미얀마 연방의회대표위원회와 한국 국회의원들이 함께할 온라인 간담회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소모뚜 사무처장은 미얀마어, 한국어를 오가며 SNS에 운동 소식을 올리고 있다. 자그만 사무실은 사뭇 역동적이다. 한국을 발판으로 십여 개 나라를 넘나들며 운동을 조직하고 견인한다.

막내격인 띤테이아웅 운영위원 또한 매우 분주하다. 그의 손가락은 휴대전화 화면을 빠르게 오가며 원데이 챌린지에 참여 신청한 친구들의 정보를 모금 사이트에 대신 입력하고 있다.

"친구들이 직접 입력하는 것을 어려워해서 도와주고 있어요. 저도 10만 원씩 하고 있고 친구들도 50명쯤 모금에 참여하게 했어요. 제가 2014년에 와서 3년 일했고 2019년에 다시 왔어요. 저처럼 다시 들어온 친구들이 꽤 많아요. 친구들에게 이거 안 할 거면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건 농담이고요, 다들 기쁜 마음으로 참여해요. 지금은 코로나 방역이 강화되어서 집회를 하지 못하니까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겁니다."

꼭 1년 전인 2021년 2월 1일, 미얀마에서 다시 발생한 군부 쿠데타는 띤테이아웅처럼 평범한 생활인들을 민주화운동에 나서게 했고, 심지어 전선에 서게 했다.

"쿠데타 소식을 듣고 가슴이 벌렁벌렁 했어요. 세종시에 있는 케이블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주말마다 서울 미얀마 대사관 앞에 가서 시위했어요. 금, 토, 일 주 3일을 참여했죠. 거기서 미얀마 형님, 누님들을 만났는데 저에게 같이 타도위를 만들자고 했어요. 저는 단체 같은 거 처음이에요. 미얀마에서도 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누님들이 다 같이 배우면서 하면 된다고 걱정 말라고 했어요. 타도위 멤버 25명 중에 6명이 E-9(고용허가제 비자) 노동자예요. 한국에서 오래 정치 난민으로 살아온 분들도 있고 유학생도 있죠."

띤테이아웅은 세종에서 서울까지 3시간씩 걸리는 거리를 매주 오갔다. 회사는 평일날로 일을 몰아주고 주말을 활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면서도, 코로나 감염을 우려하여 한 달에 2번만 가라고 했다.

하지만 온 신경이 다 시위 현장에 쏠려 있는 띤테이아웅 입장에서는 서운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실수를 하는 일도 생겨 회사에 폐를 끼칠까 걱정스러웠다. 결국 회사에 요청해서 '외국인 근로자 고용변동 신고서'(고용허가제 노동자는 고용주가 이 신고서에 사인을 해줘야만 회사를 그만둘 수 있다)에 사인을 받았다.

"회사가 정말 고마웠어요. 그동안 회사를 옮길 때 쉬운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전에 일했던 회사에서는 회사가 법을 안 지켜서 문제가 됐을 때도, 취급 물질 때문에 심한 알레르기를 앓을 때도 사인받기 어려웠어요. 이번에도 어렵겠지 생각했는데, 뜻밖에 선뜻 도와주는 거예요. 형님들이 모여 있는 인천으로 옮겨서 회사를 찾고 주말마다 활동에 참여하고 있어요. 지금 일하는 회사 사장님은 뉴스에서 저를 봤대요. 너 그런 일도 하냐고 묻더니 그 뒤로는 아무 말도 안 해요. 회사가 미얀마를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인천 부평은 미얀마인들에게 아주 특별한 곳이다. 2000년대 초중반 즈음부터 미얀마인들이 부평에 깃들기 시작하면서 미얀마인의 생활과 학습·종교·문화·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의 본산이 되었다. 이번 반 쿠데타 민주화 운동 역시 부평에서 주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미얀마인들이 조직화를 시작하던 90년대 중반, 부천 소재 인권단체와 불교 사찰의 지원으로 공간을 마련하며 탄력 받았는데, 이후 시간이 지나며 조직이 분화되고 각자 공간을 마련하게 되면서 비교적 임대료가 싼 부평으로 하나둘 옮겨갔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유아라는 페이스북 그룹을 알게 됐어요. 유아는 미얀마 말로 마을이라는 뜻이죠. 한국에 오래 살고 있는 형님이 운영하는데 한국에 일하러 와서 겪는 일, 대처 방법, 미얀마 사람들 소식, 미얀마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뉴스를 올려줘요. 알고 보니 미얀마에 있는 사람들도 한국 소식 궁금하면 이 그룹을 방문해서 정보를 얻고 있었어요. 저도 그 그룹에 올라온 글을 보다가 부평을 알게 됐죠. 부평에는 미얀마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미얀마 가게나 식당, 절도 많아요. 설이나 추석 때 가끔 부평에 오곤 했는데, 지금은 아예 여기서 살다시피 하고 있어요."

92년생인 띤테이아웅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자랐다. 학교에서 배운 적도 없었다. 미얀마는 2010년 아웅산 수치가 가택연금에서 풀려나고 2012년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들을 기회도 조금씩 늘어났다. 그즈음 대학을 마치고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띤테이아웅은 한국에 오려고 준비를 시작했다.

"누나가 언제까지 알바만 할 거냐고 한국에 가보라고 하는데, 정보가 전혀 없어서 엄두가 안 났어요. 누나는 우선 한국어를 배우래요. 하지만 저는 학교 졸업할 때까지 부모님께 받아쓰기만 하고 한 푼 드리지도 못했는데, 다시 돈 들여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제가 망설이니까 누나가 돈을 내줬어요. 간호사로 일해 번 돈 중에 급할 때 쓰려고 부모님 모르게 조금씩 따로 모아뒀대요. 제 고향 마궤에는 한국어 학원이 없어서 양곤에 방 얻어 살며 학원에 다녔어요. 다 마치고 보니, 학원비에 생활비, 불법체류 안 한다고 나라에 내야 하는 보증금까지 합쳐서 300만짯(약 300만 원) 정도 돈이 들었어요. 한국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덕분에 시험에 붙은 지 2달 만에 한국에 왔어요. 돈 벌어서 제일 먼저 누나 돈을 갚았죠."

"민주주의 다시 빼앗길 수 없어"

띤테이아웅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던 2015년,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정당 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국민민주연합)는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고 군부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아 민주주의의 싹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부와 권력을 나눈 불편하고 불안한 동거였다. 정치 제도는 불안정했고 군부는 통제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군부가 로힝야 민족을 잔혹하게 학살하여 민족을 멸절시키려 든 사건에 대해 아웅산 수치가 옹호하는 입장을 취한 일은 민주 투사라는 그의 정체성까지 흔들었다. 실망한 국제 사회가 비난과 지지 철회를 쏟아냈다.

반대로 내부적으로는 수치와 문민 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매우 높아졌다. 2020년 총선에서 NLD는 더욱 큰 지지를 받았고, 정치·경제적 기득권을 빼앗기게 될 것을 우려한 군부는 부정선거라 주장하며 선거 결과 수용을 거부하고 급기야 쿠데타를 일으켰다.

띤테이아웅의 활동이 고향까지 알려졌는지,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서 별 2개를 달고 있는 친구가 연락해서 충고한 적이 있다.

"너는 한국에 있어서 괜찮겠지만 부모님과 가족은 위험할 수 있으니 조심해."

하지만 목숨 걸고 CDM에 참여하거나 총 들고 PDF에 나서는 친구들도 있는데, 안전한 한국에 있으면서 이런 것도 못하면 너무 부끄럽다고 그는 말했다. 아주 가끔 걱정이 들지만 바로 밀어낸다고. 대신 꼭 승리해야한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고 있다.

소수민족 그룹들을 포함하여 한국에서 꾸려진 미얀마인 단체 40여 개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중 30여 개 단체는 NUG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활동을 함께하고 있고 10여 개는 독자적으로 활동한다. 어떤 형태,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든 모두 미얀마 민주화에 큰 도움이 된다.

버마족인 띤테이아웅은 고향에서 버마족만 모여 살았기 때문에 소수민족을 만나거나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한국에 와서 일하면서 소수민족을 만났는데, 오히려 버마족은 혼자뿐이고 다들 소수민족이어서 자기들끼리 자기들 말로 대화하면 소외감을 느끼곤 했다.

소수민족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된 것은 이번 쿠데타가 터지면서다. 타도위에서 활동하고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글을 읽으며 소수민족에 대해 알지 못했던 진실을 알게 되었다.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인권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배우고 있다. 배움은 더 나은 미래를 갈망하게 했다.

"우리나라에 수치 여사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는데 우리가 왜 못 따라가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미얀마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있어요. 군부에 맞서서 어린 동생들, 친구들이 시민방위군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고 총 들고 싸우고 있고요. 동생들은 2010년에서 2020년 사이 자란 사람들이잖아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배운 적은 없어도 몸으로 느끼는 거죠. 그래서 절대 민주주의를 다시 빼앗길 수 없다고 저렇게 열심히 싸우는 겁니다.

저 어릴 때는 군부에서 운영하는 방송밖에 몰랐어요. 우리나라에 천연자원이 많고 가스도 많이 나오니까 국민들이 충분히 잘 살 수 있는데, 군부가 그걸 다 팔아먹고 인권은 짓밟고 있는데, 그런 것을 잘 몰랐어요. 하지만 이제는 다 압니다. 한국에 와서 책 읽고,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보고, 여러 나라와 비교해 보면서 우리나라가 어떤 상황인지 정확하게 알게 됐어요.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어요. 우리는 소수민족을 포함하는 연방민주국가를 세워야 해요. 버마족만이 아니라 다 같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해요."

 

띤테이아웅이 부천다다름콘서트에서 시낭송과 공연을 하고 있다. ⓒ 이재성

 
띤테이아웅은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혁명 시를 낭송한다. 어려서부터 책을 즐겨 읽었지만 시에 관심을 둔 적은 없던 그였는데, 시낭송을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손을 번쩍 밀어 올린 것이다. 지난해 4월, 타도위가 NUG 출범을 환영하는 행사를 열었을 때 처음으로 혁명가 민꼬나잉 선생의 시를 낭송했다.
 
끝나지 않는 혁명을 위해
내 생명 바쳐도
인생의 헤어짐은 슬프지 않아
내게 주어진 뜨거운 임무
혁명의 깃발 휘날리고
당신 품으로 내가 갑니다
동지들 붉은 가슴 열어 나를 반기소서!

분노와 비탄을 헤치고 그러쥔 감정이 목소리로 터져 나올 때 그의 가슴은 뛰었다. 열정이 높아지고 소망이 깊어졌다. 그가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외쳤다는 이유로 누구도 맞지 않고, 갇히지 않고, 죽지 않는 세상이다. 서로 총을 겨누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이다. 누구나 두려움 없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상이다.

"한국에 처음 왔던 때, 한국인 직원과 친해지려고 식판 들고 옆에 가서 앉으니까 그 사람이 일어나 다른 자리로 가버렸어요. 내가 한국어를 잘 못하니까 부담스러웠나 봐요."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경험을 여러 차례 하면서 그의 마음도 단단해졌다. 더 이상 작은 일에 상처받지 않는다. 대신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고,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 한국어 시험 토픽에서 4급을 받았다. 일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서 한국에 가고자 준비하는 아우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자신이 받았던 상처를 어린 노동자들은 피해 갈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쿠데타가 생겨서 모든 계획, 우리 꿈이 다 엉망이 되어 버렸어요. 우리가 꼭 이겨서 다시 바로 잡아야 해요."

평범했던 청년 띤테이아웅의 눈에 결기가 서렸다. 쿠데타와 함께 이어진 가차 없는 폭격과 학살, 방화는 젊은이들을 바꿔놓았다. 더 이상 미래를 빼앗길 수 없다, 우리 미래는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한다. 결기와 다짐은 청년들이 총을 들고 전선에 서게 했고, 총알을 하나라도 더 사기 위해 돈을 모으게 했다. 삶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이 슬픈 전쟁에서 꼭 승리해야 한다. 이주자들 심장에는 고국과 이어진 굵은 혈관이 박혀있다.

아예더봉, 아웅야미! (혁명은 승리한다!)

미얀마인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이다.

------------------------
[추가정보]

2021년 2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 CRPH(Committee Representing Pyidangsu Hluttaw, 연방의회대표위원회)가 꾸려졌다. CRPH는 2020년 12월 총선에서 당선되었으나 군부에 의해 밀려난 국회의원들이 꾸린 조직이다. 4월에는 CRPH가 주축이 되어 군부에 맞서는 민간정부 NUG(National Unity Government, 민족통합정부)를 구성했다.

NUG는 미얀마의 모든 구성원을 아우른다는 목표를 세우고 소수민족들에 사과하고 함께하기를 제안했다. 이는 영국 식민 통치 시절을 비롯해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치며 갈등 관계에 놓였던 소수민족들과 손잡고자 하는 노력이며, 무엇보다 군부가 2017년 자행한 로힝야 민족 대학살 사건에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을 비롯한 버마족 민주진영이 옳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더욱 깊어진 상처를 봉합하고 화합을 이끌어내 함께 민중혁명을 완수하겠다는 절체절명의 제안이었다.

NUG는 대통령 대행(부통령), 총리와 국방부, 인도주의재난관리부 등 17개 부처를 두고 33명의 장관을 임명했다. 이어서 8월에는 체코와 호주에 이어 대한민국에 대표부(대사관과 같은 개념)를 설치하고 독재타도위원회 얀나잉툰 공동위원장을 특사로 임명했다.
덧붙이는 글 <이주민 르포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은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와 <오마이뉴스> 공동 기획으로 2021년부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는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소박한 일들에 힘을 보태기 위해 김판수·염무웅 선생님, 송경동 시인, 민변 조영선 회장, 김소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운영위원장 등의 발의와 참여로 만들어졌습니다. '길동무 청년문학학교', '길동무문학·예술창작기금', '한국사회기층문화보고'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gildongmu21.com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