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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가 기록한 수기 ‘남영동’을 영화화한 <남영동 1985>에서 김근태의 진술을 토대로 재현된 전기고문 장면.
 김근태가 기록한 수기 ‘남영동’을 영화화한 <남영동 1985>에서 김근태의 진술을 토대로 재현된 전기고문 장면.
ⓒ 씨너스엔터테인먼트㈜, (주)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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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에서 끔찍한 고문을 받은 김근태 선생(아래 호칭 생략)과 검찰청에서 남편을 마주친 인재근 그리고 고문 사실을 미국에 알린 영문 성명서. 지난 기사("뒤꿈치가 부서져"... 김근태 고문사실은 어떻게 미국에 알려졌나, http://omn.kr/1wl9s )의 주 내용이다. 

이번 기사에선 이후 미국에서의 반응 그리고 고문 사실 폭로가 한국 민주화-한미관계에 끼친 영향을 살펴본다. 김근태 고문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국내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국제적인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준 의미를 곱씹어본다.

필자는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오마이뉴스>를 통해서 공개한 두 점의 사료와 그에 대한 해제를 한다. 사료의 내용은 ① 1986년 9월 26일 미국 하원의원 54명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② 1987년 11월 20일 미국에서 개최된 김근태-인재근에 대한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식에서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기조연설문이다. 

미국 의회, 전두환을 향해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내다
 
1986년 9월 26일 스티븐 솔라즈(Stephen Solarz), 거스 야트론(Gus Yatron) 등 미국 하원의원 54명이 대한민국 청와대 전두환을 수신자로 한 편지. 이들은 이 편지에서 김근태 선생의 인권유린 사례와 함께 한국 정부를 향한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1986년 9월 26일 스티븐 솔라즈(Stephen Solarz), 거스 야트론(Gus Yatron) 등 미국 하원의원 54명이 대한민국 청와대 전두환을 수신자로 한 편지. 이들은 이 편지에서 김근태 선생의 인권유린 사례와 함께 한국 정부를 향한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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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9월 26일 미국 의회의 하원 외교위 아·태소위원장인 스티븐 솔라즈(Stephen Solarz)와 하원 국제위 인권소위원장 거스 야트론(Gus Yatron) 등 하원의원 54명은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미국 하원의원들은 이 편지에서 김근태에 대한 고문과 각종 인권유린 행위를 비판하고 이에 대한 개선을 요구했다. 이 편지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

첫째, 미국 의회에서 특정 개인의 사례를 강조해 한국 정부에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경우는 김대중 이후 최초였다는 점이다. 김대중은 1970, 1980년대 목숨을 건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민주인권 지도자로서 미국에서 많이 알려졌다. 그래서 김대중 관련 현안은 미국 의회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졌었다. 그렇게 볼 때 미국 의회가 김근태 고문 사건을 매우 비중있게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편지의 내용이다. 여기서 주목해서 살펴봐야 할 점은 편지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강도다. 이것을 보면 미국 의회가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 편지는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고문을 받은 김근태 사건에 대한 우리의 깊은 우려를 표명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간결하면서도 단도직입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김근태에 대한 고문과 이후 이어진 김근태의 열악한 인권 상황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고문 방법에는 전기충격, 물고문, 후추와 소금으로 뒤섞인 물을 들이키도록 강제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고문 전에는 식사를 할 수 없었으며 고문 재개 여부 및 고문 시점 등을 불확실하게 해 공포심을 유발하는 등의 정신적인 고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1986년 8월에 김근태는 17명의 학생들과 함께 심하게 구타당했습니다. 수감된 다른 사람들은 김근태가 너무 작은 방에 갇혀있어서 몸을 제대로 뻗지도,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항의했다는 이유로 그 사람들은 구타당했으며 김근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아직 김근태는 반복적이며 계속해서 그 작은 방에 있습니다."


미국 하원의원들은 먼저 김근태 고문 사실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마치 전두환 에게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리고 편지 발송 직전에 있었던 김근태에 대한 인권 유린 상황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이는 자신들이 김근태의 인권 상황 등 한국의 현실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전두환과 한국 정부에 알리려는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다음의 내용은 더 강하다. 미국 하원의원들은 김근태 고문은 단지 김근태 개인에게 가해진 폭력이 아니며 전두환 정권의 기본적인 속성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근태 인권에 대한 즉각적인 회복도 촉구했다.

"이 편지에서 우리는 김근태 한 개인의 사례에 집중하고 있지만 우리가 여기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김근태의 사례는 한국 정부의 고의적이고 만연한 행태의 결과라고 판단되며, 이는 아주 큰 문제로 보입니다. 우리는 수감 중인 김근태의 건강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으며, 그가 남은 수감기간 동안 권력 남용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미국 의회는 인권침해 사실에 대한 문제제기를 넘어서 이런 상황을 초래한 구조적 원인에 대한 문제까지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간접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고 '한국 정부의 책임'이라는 점을 직접적으로 강조했다. 미국 의원들이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성명서 등에 이러한 표현을 써도 상당히 강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 편지는 전두환에게 직접 보낸 것이기 때문에 그 정도가 매우 세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미국 의원들은 "당신은(전두환을 지칭) 앞으로 고문과 학대가 발생할 경우에는 이에 대한 조사가 취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이 한국 정부에서 일어나는 인권 침해 행위들이 멈출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기를 촉구합니다. 이것은 더욱 중요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전두환 정권의 인권침해 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과 그렇지 않을 경우 미국 의회 차원에서 본격적인 압박이 이뤄질 것이라는 경고를 한 것이다.

미국 의회, 전두환 정권을 향해 민주주의·자유를 강조
 
1986년 3월 27일 당시 대통령 전두환과 배우자 이순자가 제42기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임관한 졸업생과 악수하며 격려하고 있다.
 1986년 3월 27일 당시 대통령 전두환과 배우자 이순자가 제42기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임관한 졸업생과 악수하며 격려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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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만 해도 강도가 세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미국 의회는 이 문제를 한미관계, 한미동맹의 기본 가치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서 미국 의원들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기본적인 가치로 힘주어 표현했다.

"미국인으로서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들과 지난 40년간 중요한 역사들(한국 전쟁에서 함께 싸우고, 한국 전쟁 이후의 강력한 동맹, 강하고 생산성있는 경제적 연대 등)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는 진심으로 한미동맹관계가 지속적으로 강화되기를 바라며, 또한 이것이 한미가 공유하고 있는 위대한 민주주의와 자유의 전통을 강화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부분은 큰 의미가 있다. 미소냉전시기 미국은 한국에 있어 반공·민주주의·자유 세 가지 정체성을 중시했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이 반공과 안보를 결부시켜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후순위로 하는 것을 용인했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의 반민주 인권 유린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어도 기본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엔 반공안보론을 내세우며 독재정권을 지지했다.

김대중은 1970년대부터 이런 미국의 대한정책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미국의 정치인·지식인 등을 만나고 설득하며 반공·안보를 위해서라도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회복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토대 속에서 사회적 불만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반공을 위한 최선의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김대중은 민주화와 자유를 염원하는 한국 국민의 열망을 총칼로 억압하게 되면 사회적 불만이 폭증하게 될 텐데, 이는 아시아대륙의 공산주의 세력과 최전선에서 대항하는 한국의 내정을 혼란케 해 결국 미국의 국익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김대중의 주장은 오랜 기간 그의 투쟁을 통해서 미국 내에서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특히 그의 2차 미국 망명(1983.12.23.~1985.2.6.)시기 활동과 그 이후 그가 1983년 설립한 인권문제연구소의 활동 등의 영향으로 미국 내에서 민주·인권·자유를 한미관계 중심적 가치로 내세우는 움직임이 형성됐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미국 내의 변화된 흐름이 하원의원들이 전두환에게 보낸 편지서 그대로 확인된다.

김근태 고문사건은 이에 대한 미국 내 여론조성 및 확산에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됐다. 54명의 미국 하원의원들이 공동서명해서 이 편지를 전두환에게 발송한 사실에서 확인 가능하다. 그리고 1987년 7월 2일에도 미국 하원의원 34명은 전두환에게 편지를 보내 수감 중인 김근태의 건강 상태를 우려하고 인권 회복 조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촉구했다.

김근태-인재근,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하다

앞서 설명한 미국 내 분위기는 김근태-인재근 부부가 1987년 11월 20일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하게 된 과정과 시상식에서 한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연설에서도 확인된다. 
 
에드워드 케네디 기조연설문
 에드워드 케네디 기조연설문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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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으로서 1971년 2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서 방미 중이던 김대중을 처음 만났다. 그때 김대중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 이후 그는 김대중과 한국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했다. 케네디 상원의원은 미국 민주당 내 거물 정치인으로서 미국 리버럴 진영 내에서 큰 영향력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 민주화를 위한 김대중의 주장이 미국 사회 내에서 확산되는 데에 큰 도움을 줬다.

김근태 고문 사건을 미국 내에서 공론화하는 데에도 김대중-에드워드 케네디 두 사람의 연대는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김근태-인재근 부부가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자가 되는 데에도 역할을 해 김근태의 고난과 투쟁이 국제적으로 더욱 부각되는 데에 기여했다.

김대중은 2차 미국 망명을 하던 1983년에 에드워드 케네디의 형이었던 로버트 케네디(1968년 암살당함) 법무부장관을 기리는 로버트 케네디 인권위원회 고문을 맡기도 했다. 그런 배경에서 1987년 6월 19일 가택연금 중에 있던 김대중은 로버트 케네디(케네디 대통령 동생) 인권상 수상자로 김근태-인재근 부부를 추천했고 두 사람은 수상자로 결정됐다.

1987년 11월 20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시상식(전두환 정권은 인재근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비자발급을 해주지 않았고 김근태는 수감 중이라서 참석하지 못함)에서 에드워드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로버트 케네디의 62번째 생일에, 그의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인 우리는 그의 끝나지 않은 삶의 끝나지 않은 일에 즉, 자유와 인권의 씨앗을 발전시키는 일에 한 발짝 나아가려고 함께 모였습니다. 나의 형제들을 통해서 소중하고 본보기가 되는 용기, 원칙과 연민을 체화한 두 사람을 명예롭게 하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우리는 지금 김근태와 인재근에게 1987년 로버트 F. 케네디 인권상을 수여합니다."

그 뒤에 한국에서 이뤄지는 각종 인권유린 사례를 거론한 뒤 에드워드 케네디는 "미국을 위하여, 대한민국은 단지 이런 의미만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 땅에서 죽은 미국 청년들의 무덤이 이 나라에 있습니다. 한국의 자유의 뿌리는 미국인들의 피로 자라났습니다. 그들은 한국 정부가 자유를 축소하고 부정하도록 한국의 자유를 수호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꼬집었다.

김근태의 수난과 투쟁이 한국 민주화에 준 영향은?
 
김근태는 고문을 이겨내고 이후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사진은 1992년 1월 미대통령 방한 반대 시위 당시 연행되는 모습.
 김근태는 고문을 이겨내고 이후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사진은 1992년 1월 미대통령 방한 반대 시위 당시 연행되는 모습.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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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보듯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역시 앞의 미국 하원의원들의 편지와 비슷한 인식을 보여줬다. 한미관계에 있어 자유·인권·민주의 가치를 강조했으며, 미국의 희생이 있었다는 점도 언급했다. 

1980년대 중후반에 접어들면서 미국 내 한국에 대한 인식이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존에 미국은 반공·안보를 결부시켜서 반공안보론을 통해 군사독재 정권을 지지하면서 자유·민주·인권의 가치를 후순위로 인식했었다. 이 인식 지형이 김대중과 한국 민주화 운동 세력의 노력으로 크게 변한 것이다.

특히 1985년 9월에 발생한 김근태 고문사건은 이와 같은 미국 사회 내의 인식 전환이 더욱 빨리 이뤄지도록 했다. 학살과 고문은 반인륜적·반문명적인 야만 행위다. 이를 반공·안보라는 이유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순 없다. 그래서 김근태 고문 사건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미국 내 여론 악화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

특히 김근태 고문 사건이 전두환 정권 후반기로 접어들 때 발생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당시 민주화는 개헌 문제와 맞물려 있었는데 이를 완강히 반대하는 전두환 정권은 매우 폭압적인 방식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 경우 1980년 광주학살 이상의 대참사 발생 가능성까지 있었던 것이다.

1987년 전두환 정권이 결국 유혈진압을 하지 않고 타협적인 태도로 나오게 된 원인은 물론 다양하다. 다양한 변수가 영향을 줬다. 그런데 여기엔 전두환 정권의 무력진압을 반대한 당시 미국 정부의 입장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건 분명하다. 

미국 정부가 당시 민주·인권·자유 가치 제고 입장을 정한 이유 역시 다양할 텐데, 여기엔 김근태 고문 사건으로 촉발된 미국 내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전두환 정권 초기부터 이어진 일련의 문제로 인해서 미국 내에서 반전두환 여론이 누적됐고, 김근태 고문 사건이 반전두환 여론을 끓어오르게 하는 계기가 된 것. 그래서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국내 정치적인 이유에서라도 전두환 정권을 무작정 지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김근태의 수난과 투쟁은 미국 사회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졌다. 김근태 고문 사건을 국내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민주화 이행 시기 한미관계라는 국제적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하게 이뤄지길 희망한다. 또한 김근태를 포함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자유, 인권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당한 분들의 숭고한 뜻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2011년 12월 30일,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했다. 그날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유가족들이 영정사진을 모시고 빈소로 향하는 모습.
 2011년 12월 30일,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했다. 그날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유가족들이 영정사진을 모시고 빈소로 향하는 모습.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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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태그:#김근태, #김대중, #에드워드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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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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