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따뜻한 가슴을 안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길은 넉넉하다. 야간 고속도로를 쾌속으로 질주하다 가로등 환한 국도로 접어들 때 느끼는 여유로움이랄까?! 혹은 늦은 저녁에 불쑥 찾아온 반가운 벗의 방문이라고 할까?! 그도 아니면 오래전에 망각한 사진첩을 우연히 찾아내 넘겨보는 설렘이라고나 할까?!
 
속도감과 과장, 긴장과 이완의 되풀이, 충격과 공포의 연속적인 변주가 없는 따사로운 영화 <메이드 인 이태리>. 완만한 곡선으로 층층이 겹치고 겹쳐진 대지에 허리띠처럼 풀어진 길과 선이 가는 피라미드 닮은 가로수. 왁자지껄 떠들썩한 이탈리아 시골식당. 푸르른 하늘과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낙비.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영화.
 
숨 막히는 갈등과 촘촘한 인과관계, 응축되었다 한순간 폭발하여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영화 장르의 놀라운 속성이 여기에는 아예 없다. 그래서 낯설지만, 또 그런 까닭에 매혹적인 영화가 <메이드 인 이태리>다. 복잡하지도 지나치게 단출하지도 않은 관계와 인연과 사건이 실타래에서 풀려난 여러 가지 색실처럼 헐겁게 전개되는 영화.
 
토스카나, 그 매력적인
 
 영화 <메이드 인 이태리>의 한 장면.

영화 <메이드 인 이태리>의 한 장면. ⓒ 오드 AUD

 
이탈리아반도 중부에 자리한 토스카나를 대표하는 곳은 피렌체, 피사, 시에나 같은 유서 깊은 도시들이다. 특히 피렌체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다빈치 같은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들과 유럽의 고전 <신곡>의 알리기에리 단테를 배출한 도시로 유명하다. 그런데 <메이드 인 이태리>에 나오는 공간은 작고 외진 농촌 마을 '아지아노'다.
 
어디를 가나 하늘을 향해 삐죽하게 솟아오른 사이프러스가 가로수로 자라는 고장 토스카나. 긴 세월 붓을 놓아버린 화가 로버트가 편안한 자세로 말한다.
 
"사이프러스 두 그루가 프레임을 이루고 공허한 공간을 지나 완벽하게 중앙에 자리 잡은 중심점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이끌지. 모든 것은 이곳 토스카나의 물결치는 듯한 언덕으로 하나가 된단다."
 
물결치는 야트막한 언덕에는 밀과 포도가 자라고, 들판에서는 들꽃 무리와 야생 양귀비가 춤추듯 바람에 나부낀다. 토스카나의 일몰과 일출, 한낮의 태양과 야트막한 구름장들이 한가로이 떠다니는 하늘, 베란다에 내놓은 형형색색의 화분들. 몸과 마음이 지치고 아픈 사람들은 누구라도 토스카나에서 위로받고 치료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로버트와 잭
 
돌이키고 싶지 않은 비극적인 사건을 공유하는 아버지 로버트와 아들 잭. 그들을 이어주는 매개고리는 로버트의 아내이자 잭의 엄마 라파엘라다. 치명적인 교통사고로 어느 날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라파엘라. 그 후로 오랫동안 로버트와 잭은 남남처럼 살아왔다. 그러다가 문득 잭이 아버지를 소환한다. 토스카나에 있는 문제의 집을 팔자면서!
 
영화는 런던에서 시작하여 도버-칼레해협을 지나 이탈리아 토스카나로 우리를 인도한다. 영화는 부분적으로 로드무비 형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길에서 길로 길이 이어지지만, 인물들의 흔들리는 내면 풍경과 변화양상은 보이지 않는다. 길은 길과 맞닿아있지만 그들의 대화와 관계는 단절과 분절로 점철되어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다.
 
로버트는 아직도 라파엘로를 온전히 잊지 못한 상태고, 잭은 엄마를 충분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은 따라서 라파엘라에 관한 기억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을 갈라놓은 급작스럽고 끔찍한 죽음의 기억만이 흉중에 남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라파엘라를 매개로 그들이 속내를 터놓는 장면은 <메이드 인 이태리>에서 가장 강렬하다.
 
20년 전 사건으로 서먹서먹해진 아버지와 아들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도록 인도하는 토스카나의 자연풍광. 하루 이틀 시간과 더불어 그들은 각자의 방식에서 서서히 물러선다. 아버지의 생각을 넘겨짚는 잭과 자신의 일방적인 판단으로 아들의 유년기를 차단해버린 로버트. 거기서 발원한 20년 세월의 거리를 찬찬히 메워나가는 자연의 아들들.
 
 영화 <메이드 인 이태리>의 한 장면.

영화 <메이드 인 이태리>의 한 장면. ⓒ 오드 AUD

 
나탈리아와 잭
 
5년 동안이나 식당을 손보고 고쳐서 지금의 깔끔한 모습으로 가꿔낸 당찬 여성 나탈리아. 여덟 살짜리 딸 안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전남편에게 빼앗긴 여인. 그녀의 식당 앞을 지나가다 인연을 맺게 되는 잭. 나탈리아는 기막힌 리조또로 잭을 매료시키고, 잭과 유사한 상황을 이미 경험함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상태다.
 
나탈리아는 잭과 로버트의 갈라지고 비틀어진 부자 관계를 이어주는 가교(架橋)이기도 하다. 그들이 서로에게 대놓고 하지 못하는 가슴속 깊은 말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나탈리아. 20년이나 방치돼 있던 로버트와 잭의 고풍스러운 집을 수리하는 데 일조하는 나탈리아. 로버트와 잭을 모두 행복하게 인도하는 사랑스러운 여인 나탈리아.
 
어느 날 잭이 길에서 작은 꽃 한 송이를 꺾어 나탈리아를 찾는다. 쓸쓸한 표정으로 이내 돌아서는 잭. 전남편과 함께 유쾌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그녀. 그들의 관계가 토스카나에서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다. 홀로서기에 성공하여 제 길을 가고 있는 나탈리아와 이제야 그 길에 홀로 들어서려는 잭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영화의 힘과 미덕
 
아버지 로버트처럼 화가의 재능은 타고나지 못했지만, 미술관의 관리 책임자이자 미술품을 보는 안목은 남달리 탁월한 잭. 그는 런던이 아니라, 아지아노에 있는 미술관을 가지고자 한다. 잭은 그곳에서 로버트의 대표작들을 가지고 첫 번째 전시회를 열 모양이다. 아무런 갈등과 상처도 없던 잭과 나탈리아의 관계도 다시 시작될 것 같기도 하다.
 
라파엘라의 상실을 견디다 못한 로버트의 격정 토로의 결과물인 거실의 그림을 흉하다고 비난했던 중개인 케이트. 로버트와 케이트의 관계도 객석을 따사롭게 한다. 깊고 너른 상실로 괴로웠던 두 사람을 이어주는 미래의 유대와 공감. 로버트는 다시 그림을 그릴 요량이다. 화면 가득 유화물감을 뒤섞는 로버트의 붓질이 힘차고 상큼하다.
 
영화가 끝난 다음 가슴에 밀려드는 따사롭고 훈훈한 기운에 절로 미소가 생겨난다. 그래, 저렇게 만들어도 한 편의 좋은 영화가 되는군! 굳이 장르의 속성에 투철한 영화'다운' 영화가 아닌 <메이드 인 이태리>. 우리의 냉담하게 굳어지고, 꼬이고 비틀린 영혼을 매만져주고 위로하는 <메이드 인 이태리>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작품이다.
 
그래서 다시 생각한다. 코로나19가 가져다준 다채롭고 풍성한 영화 세계가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를! 세계적으로 유행한 코로나 덕에 고요하고 평온하게 누릴 수 있는 자연의 위로와 인간들의 화해는 얼마나 넉넉한가! 기막힌 상상력과 폭력, 자의적이고 맹목적이며 부자연스러운 작위와 산뜻하게 작별한 <메이드 인 이태리>를 찬미한다.
제임스 다시 메이드 인 이태리 토스카나 피렌체 리조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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