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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귀촌 1번지 지리산권(구례, 남원, 하동, 함양, 산청)에 사는 청년들은 독특하다. 퀴어, 페미니즘, 동물권, 비혼·비출산, 탈성장 등 진보적 의제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작지만 놀라운 실험을 벌인다. 그들은 왜 지리산 시골을 무대로 택했을까. 이전 귀농·귀촌 세대와 무엇이 다를까. 남원시 산내면 등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편집자말]
지리산 자락에 있는 전북 남원시 산내면은 귀농·귀촌의 성지로 유명하다. 2020년 기준 산내면 인구는 2121명. 20~30대 인구는 231명이다. 여기엔 청년 이주민도 다수 포함돼 있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전북 남원시 산내면은 귀농·귀촌의 성지로 유명하다. 2020년 기준 산내면 인구는 2121명. 20~30대 인구는 231명이다. 여기엔 청년 이주민도 다수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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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에 있는 전북 남원시 산내면은 귀농·귀촌의 성지로 유명하다. 1998년 문을 연 실상사 귀농학교가 전국적으로 입소문나면서, 잘 보존된 자연, 몸과 마음의 치유, 경쟁에서 벗어난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산내로 모여들고 있다.

"외지인 비율은 어림잡아 40% 정도 된다고 보고 있어요. 선주민들은 이제 뭐 거의 절반이 다 귀농·귀촌인 같다고 할 정도예요."

산내면 행정복지센터 관계자가 전한 현주소다. 지금도 이주민이 계속 유입된다. 남원시는 2020년 타 시도에서 거주하다 남원 농촌 지역으로 온 주민 중 250가구가 이사비를 지원받았다고 밝혔다. 이중 10%인 25가구는 산내면에서 신청했다.

주민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산내에는 세 그룹의 이주민이 있다. 먼저 1998년 IMF 이후 귀농한 초창기 사람들이다. 대부분 실상사 귀농학교를 통해 들어와 결혼해 정착하고, 공동체를 만들어 유기농사 등에 종사했다. 다음으로는 2009년경부터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다. 마을에 정착해 공동육아나 대안교육 등에 관심을 두고 활동한 사례가 많다. 이들은 지금 대부분 40~50대 이상이 됐다. 마지막은 2014~2015년 이후 등장한 20~30대 청년들이다.

2020년 기준 산내면 인구는 2121명. 20~30대 인구는 231명이다. 여기엔 청년 이주민도 다수 포함돼 있다. 청년들은 왜 수도권 등 도시와 거리가 먼 지리산 산골까지 와서 살고 있을까? 오마이뉴스가 만나본 청년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공감
  
지리산에 청년들이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담 없이 살아볼 수 있는 플랫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에 청년들이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담 없이 살아볼 수 있는 플랫폼이 있었기 때문이다.
ⓒ 김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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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부담 없이 살아볼 수 있는 플랫폼이 있다는 점이다. 산내면에서 나눔꽃 대표로 활동하는 온빛(별칭, 26)은 1년 과정으로 운영하는 대안대학이자 공동체를 통해 귀촌했다. 그는 "월 10만 원 정도의 비용만 내면 숙식이 해결된다" "경제적 부담이 적은 데다 비교적 장기간 동안 농촌 생활을 해볼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전했다.

온빛은 "시골에선 집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빈집은 많은데 잘 내놓지 않는다. 보통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자식들이 별장처럼 쓴다"며 "집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여름에는 자기들이 며칠 와야 하니까 나가 있어달라'는 말도 들어봤다"고 했다.

그는 이어 "청년들이 시골에 정착하려면 셰어하우스나 커뮤니티 공간이 제일 필요할 것 같다. 안전하게 올 수 있고 비싸지 않은 곳이어야 한다"며 "갑자기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내려와 살 수 없다. 지역을 탐색하고 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으면 청년들도 내려와 천천히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대안대학이나 공동체 같은 걸 관에서 운영해도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산내의 한 대안대학 출신인 20대 이주민 역시 "청년들은 아무래도 기성세대나 귀농·귀촌하는 윗세대에 비해 자금이나 인적 네트워크, 연고가 없다.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크다"며 "공동체에 들어가면 최소한 먹고 자는 게 해결되고, 생활하다 보면 인적 네트워크가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고 말했다.

둘째, 농사를 생업으로 삼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이 있다. 산내에는 부모의 사업을 물려받거나 귀농하며 배운 기술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있지만, 모두가 농업에 종사하고 싶어 오는 건 아니다. 자연 가까이에서 살고 싶거나 생태적·대안적 삶을 바라며 시골에 온 뒤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기자가 직접 만난 청년들도 텃밭 교사, 자원순환가게 대표, 예술·공연사업 등 다양했다.

실제로 2019년 남원시청년사회경제실태조사(19~39세, 1년 미만~10년 이상 거주자 전부 포함)를 보면 남원 전체에 사무종사자가 21.4%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은 전문가 및 관련종사자 20.3%, 서비스 종사자 14.2% 순이다. 농림어업 숙련 종사자는 10.2%다.

지역 시민단체의 한 활동가는 "지역은 조금만 벌어도 살 수 있는 틈이 있다. 도시는 물가나 주거비가 비싸서 계속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지 않나"라며 "지역에선 텃밭 농사를 짓거나, 관계망을 구축해 소일거리를 구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적당히 일하면서 하고 싶은 일이나 원하는 가치를 지향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걸 찾아 시골에 오는 것 같다"라고 봤다.

남원 외 다른 지역도 비슷하다. <월간 옥이네>는 충북 옥천 청년들이 만든 지역 잡지인데 구성원 다수가 타 시·군 출신이다. 전남 곡성에선 청년들이 100일 살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셋째, 특정 의제나 관심사와 관련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기본적으로 지리산권의 경우 공기 좋고 깨끗한 자연환경을 원해서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은 지리산을 보존하는 데 관심이 높다.

귀촌 2년차인 상글(별칭, 20대)은 "많은 귀촌인들이 지리산 환경보호에 관심이 많다. 옛날에 지리산댐 반대운동도 활발했고 지금도 산악열차, 케이블카, 정령치·성삼재 도로 등 개발에 반대하는 모임이 있다"며 "환경의 소중함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어 지속가능한 지리산을 함께 고민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청년들이 지리산에 정착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연환경을 원해서다. 상글(가운데)도 이들 중 한명이다.
 청년들이 지리산에 정착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연환경을 원해서다. 상글(가운데)도 이들 중 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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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대상화


취재하며 만난 주민들은 귀농·귀촌인이 많은 산내가 전통적인 농촌보다 비교적 평등하다고 입을 모은다. 수평적인 소통구조, 민주적인 마을자치 시스템 등이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주민 간에도 세대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존재한다.

주로 청년 이주민들은 ▲'워라밸'을 중시하는 삶의 방식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 ▲청년에게 실무 책임을 요구하지만 권한은 주지 않는 권력구조가 불편하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그것을 '청년 대상화'라고 칭했다. 청년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이전 세대의 일을 계승하고 실행하는 존재로만 대한다는 것이다. 기업 등 조직이 MZ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 초반 출생한 세대)의 유입으로 겪는 고민과 비슷한 양상이다.

상글은 "청년의 발화 자체가 힘이 없고,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없다"며 "커뮤니티도 어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청년으로서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 같다"고 지적했다.

특히 20~30대 이주민들은 페미니즘이나 동물권 등 의제에 감수성이 높은 편이어서, 여성이나 성소수자, 비인간 동물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를 마주했을 때 반감이 컸다. 실제로 한 공동체에서는 기성세대와 청년세대가 여성의 옷차림, 성적 지향 문제로 충돌하기도 했다.

물론 선주민과 청년 이주민의 세대 갈등도 있다. 대체로 노크 없이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든가 생계, 결혼, 2세 계획 등 민감한 사생활을 캐묻는 일들이다. 농업이 주요산업인 지역이다 보니 농사를 짓지 않는 청년을 향한 냉대도 있다.

산내면 인근 아영면에 터를 잡은 행자(별칭, 31)는 "여기서 예술한다 하면 '시골에서 농사를 안 짓는다고? 그럼 놀러온 거네'라고 대꾸하는 어르신들을 자주 만난다"라고 털어놨다.

행자의 배우자인 세현(별칭, 32) 역시 "제가 봤을 때 농촌 주민들은 그저 청년을 원하는 게 아니다. 농사를 지을 청년을 원한다"며 "아무래도 농촌이 유지되려면 농사가 유지돼야 하니 농사를 기반으로 있을 사람을 더욱 기다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프라를 쌓고 잃지 않는 게 중요"
 
청년이주민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 청년을 향한 냉대에 가끔 무력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평등의 가치를 존중하는 어른들 덕분에 산내에 자리잡을 수 있다고 밝혔다.
 청년이주민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 청년을 향한 냉대에 가끔 무력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평등의 가치를 존중하는 어른들 덕분에 산내에 자리잡을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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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서도 지역을 떠나지 않고 계속 사는 청년들 또한 적지 않다. 청년들이 기성세대와 갈등으로 힘들어할 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지해주는 어른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역 시민단체의 한 활동가는 "산내는 워낙 귀농·귀촌 커뮤니티가 넓다 보니 기성세대 그룹도 여러 층이 있다"며 "한 그룹이 마을의 주도권을 쥐는 구조는 아니다"라고 했다.

산내면에는 페미니즘 관련 동아리, 페미니즘학교,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 등 여성과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한 연대체들이 있다. 20~30대 청년뿐 아니라 평등의 가치를 존중하는 40~50대도 속해있다.

꼭 어른들이 동참하지 않아도 청년들이 스스로 젠더 등의 고민을 축제로 풀어내거나 또래끼리 비거니즘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함께 채식모임을 열기도 한다. 언론에 보도돼 유명해진 '산내 성다양성 축제'도 그렇게 탄생했다.

어느덧 20대가 된 기존 귀농·귀촌인의 자녀들 또한 청년 이주민에게 힘을 보태준다. 귀촌 2년차인 보석(별칭, 20대)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아래서 대안학교를 다니고 생태주의를 실천한 자녀들이 같은 또래다. 우리는 그 친구들을 이른바 '녹수저'로 부른다"며 "2세대 친구들도 페미니즘이나 비거니즘 이슈에 공감하며 활동하기 때문에 하나의 판이 깔려 있는 느낌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같은 주제에 공감해주는 친구들을 보고 이주하는 청년들도 있다"며 "주거든 문화든 청년들이 계속 올 수 있는 인프라를 잃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귀촌한 지 20년이 넘은 신이나(별칭, 57)는 이같은 현상과 관련해 "청년이나 기성세대 어느 한 쪽이 잘못됐다고 말할 순 없다. 청년은 청년답게 새로운 목소리를 내는 일이 당연하고, 기성세대도 그들 입장에서 지켜야 할 것들이 있을 뿐"이라고 봤다.

다만 그는 "중요한 건 청년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어른의 입장에서 도와주는 것 아니겠냐"며 "우리 세대는 생태나 농업, 탈자본 등의 철학 아래에서 아등바등 살았다면, 요즘 세대는 중요한 가치를 지키되 너무 무리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런 방식 그대로 이쁘다. 어른으로서 그 아름다움을 잘 지켜주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태그:#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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