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떠나오는 것과 떠나가는 것에 익숙하다. 도 제일의 산업이 여행객을 유치하는 관광업인 특성 탓에 드나드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관광업에 종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드나드는 일은 제주의 일상이다.

제주도는 고질적인 일자리 부족현상을 겪고 있다. 외부 요인에 큰 영향을 받는 관광업 외에는 농수축산업 정도만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이들 모두 젊은이들이 진출할 만한 유망직종과는 거리가 멀어 젊은이들은 대학교 진학과 함께 섬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2019년과 2020년 모두 20대 순유출수가 1000명을 넘어섰는데, 이는 2000년대 들어 최고치에 해당한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제주를 등지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뜻이다.

제주도는 그간 관광의 대상으로서만 조명돼 왔다. 한국의 대표적인 관광지니 어쩔 수 없는 것이겠으나 60만 명을 훌쩍 넘는 주민을 생각하면 아쉬운 대목도 없지 않다. 실제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영화나 드라마, 각종 매체에서 충실히 조명되지 못했다.
 
 <시인의 사랑> 포스터

<시인의 사랑> 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시인의 삶과 사랑

2017년 작 <시인의 사랑>은 보기 드문 제주인의 삶을 다룬 영화다. 거의 모든 제주도의 영화가 외지인을 주요한 등장인물로 삼았단 걸 고려하면 제주에서 나고 자라 제주에서 살고 있는 제주도민이 거의 모든 등장인물을 이뤘단 점이 특별한 인상을 남긴다.

<시월애> <자귀모> <쉬리> <연풍연가> <올레> 등이 잠시잠깐 지나가는 여행지로, <건축학개론>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정착했거나 정착할 땅으로 제주를 다뤘다면, <시인의 사랑>은 제주에서 태어난 이들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제주를 다뤘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고 하겠다. 영화 속 등장하는 장소가 휘황찬란한 제주의 관광지가 아닌 현지인들이 나다니는 장소란 점도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시인의 사랑>은 말 그대로 시인(양익준 분)의 사랑을 그린다. 몇 년 전 1000만 원의 상금을 탄 뒤로 이렇다 할 입상경력이 없는 중년의 무명 시인은 아내(전혜진 분)와 투닥 거리며 매일을 산다. 초등학교 방과후교사로 나가 월 30만 원을 버는 게 고작인 그는 기념품점을 운영하는 아내에게 사실상 얹혀사는 것이나 진배없다. 아내는 그에게 아이를 갖자고 조르지만 노력해도 좀처럼 애가 생길 기색이 없다. 시인의 정자감소증 탓이다.
 
 <시인의 사랑> 스틸컷

<시인의 사랑> 스틸컷 ⓒ CGV 아트하우스

 
두 가지 금기에 도전하다

부부의 일상은 시인 앞에 어느 젊은 사내(정가람 분)가 나타나며 깨어진다. 그는 마을에 생긴 도넛브랜드 매장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우연한 계기로 시인과 안면을 트게 된다. 어느 날인가 매장 밖을 지나가는 노인을 바라보며 "저 노인도 고아구나" 하고 읊조리던 청년의 말이 시 구절을 끄적거리던 시인의 마음에 들어온 탓이다. 이후 청년을 눈여겨보던 시인은 그가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는 불우한 환경에 놓여 있단 사실을 알게 되고 깊은 연민을 갖는다.

영화는 두 가지 금기에 도전한다. 하나는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동성애 내지 양성애의 금기다. 이는 이미 지닌 십 수 년 간 한국 사회의 여러 작품과 사건 가운데 무던히 반복돼 온 소재로 기실 그 파격적 성격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영화가 다루는 시인의 고통이나 이를 받아들이는 아내의 모습에서도 기존의 퀴어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갈등 이상의 것은 보이지 않는다.

영화가 진짜 조명하는 건 두 번째 금기다. 가정을 꾸리고 있는 무능한 중년의 남자가 제 감정에 따라 새로운 사랑을 좇는 것이 주는 충격이다.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곤 하지만 가정에 충실한 아내를 두고서 젊은 남자를 마음에 들인 시인의 태도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적잖은 불편함을 던진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넘어 그것도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성의 마음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광경이 불쾌함을 자아내는 것이다.
 
 <시인의 사랑> 스틸컷

<시인의 사랑> 스틸컷 ⓒ CGV 아트하우스

 
책임과 사랑 사이에서 요동치는 젊음

시인은 시가 다른 이의 아픔에 대신 울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자신은 가장 가까운 아내의 아픔에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다. 그런 그를 시인으로 만들어주는 건 다름 아닌 새로운 남성이다. 그가 시인의 가슴을 울리게 하고 새로운 시상을 떠오르게 하며 마침내 자기 아닌 남의 슬픔에 공명하도록 이끈다. 시인을 옭아맨 현실적 제약들이 그가 사랑을 좇아 훌훌 떠나지 못하도록 막아서도 그는 끝내 그 선을 넘어 자유로워지겠다는 욕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감정은 자주 책임과 엇나간다. 쓰러진 가족구성원의 요양부담을 오로지 가족에게만 지우는 현실이 한 청년을 어두운 삶 가운데 옭아매고 있다. 나이가 차면 어떻든 짝을 꾸려야 한다는 관습은 어느 시인을 맞지 않는 가정에 묶어두고 있다. 이 모두를 훌훌 벗어던지고픈 욕구가 어떻게 무책임하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를 벗어나보지 못한 시인의 이야기는 제주라는 섬을 넘어 모든 인간에게 분명한 파동을 일으킨다. 제주라는 섬은 그 고립과 소외의 정서를 증폭시켜 관객이 몰입하도록 이끈다. 그 과정이 제법 자연스러우나 관객들이 일찍이 제주로부터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란 점에서 이 영화의 특별함이 있다고 하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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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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