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제주대정삼의사비 뒷면에 새겨진 첫 문장.
 
제주대정삼의사비 대정읍 안성리에 선 제주대정삼의사비 사진.

▲ 제주대정삼의사비 대정읍 안성리에 선 제주대정삼의사비 사진. ⓒ 김성호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한 길가에 비석 하나가 서 있다. 정면에 '제주대정삼의사비'라 새겨진 이 비석은 세워진 날로부터 60갑자 한 바퀴를 돌았다. 비석을 세운 이는 1982년 사망한 이순옥씨, 평생을 억울하게 세상 떠난 오라비를 애달파하다 마침내 그 뜻을 새겨 기록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순옥의 한 평생은 얼마나 한 많은 것이었나. 사람 좋고 인물 좋던 오빠는 대역죄인이 되어 서울로 압송돼 장대에 목이 달렸다. 순옥의 나이 열다섯 때 일이었다. 대역죄인의 동생이란 고통보다 나라가 사라지는 것이 한 발 더 빨랐다. 제 나라 백성도 지키지 못한 조선은 일본에게 침탈당해 주권을 잃었다.

제 오빠가 누구인지를 글로 적은 순옥이 그 글을 가슴에 품고 서울로 올라간 건 조선이 무너지고 몇 년이 흐른 뒤였다. 총독부 문 앞에서 사흘을 노숙하며 출판을 청원한 소녀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글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걸인처럼 생활하며 나쓰메 소세키 등 유명한 문인들을 찾아 출판을 청했다. 조선이 거부한 대역죄인의 이야기는 일본에서 <야월 한라산>이란 전기로 태어났다. 갓 스물을 넘긴 순옥은 그제야 오빠가 남긴 말대로 기독교도가 됐다.

제 오빠를 죽인 종교에 귀의한 그녀는 죽은 제 오빠가 신을 팔아 신을 모독하는 자들을 없애려고 신이 보낸 사자라 믿었다. 사형을 앞두고 한양으로 압송되던 순옥의 오빠가 그녀에게 신앙을 권한 것을 두고는 해석이 분분하다. 개중 가장 설득력이 높은 이야기는 제가 처단한 천주교 일파들이 제 동생을 해할까 우려해 먼저 종교에 귀의하라 했다는 것이다.
 
이재수의 난 포스터

▲ 이재수의 난 포스터 ⓒ 시네마서비스

 
20세기 벽두, 제주를 뒤흔든 민중봉기

이상은 천주교도가 미친 해악에 저항해 봉기를 일으키고 300여명의 천주교도를 처단한 이재수와 그 여동생의 이야기다. 도민의 뜨거운 지지를 받아 제주성을 접수하고 천주교도들을 처단한 뒤 스스로 프랑스 함대와 조선 관군 앞에 저를 내보인 세 장두를 제주 대정읍에선 세 의사로 기억한다. 뜻을 이루고 스스로 죽음으로써 수만 도민을 구했다는 것이다. 외세와 종교의 폭압 앞에 저를 내던져 민중을 해방한 이들을 나라가 압송해 처단한 건 불과 한 세기 전 한반도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비극은 고종이 프랑스인 신부에게 '곧 나처럼 대하라'란 뜻의 여아대(如我待)를 건네며 시작된다. 역사는 왕과 같은 권세를 지니게 된 종교가 미친 해악이 제주도 전역을 들썩였다고 전한다. 종교의 이름을 팔아 재물을 빼앗고 아녀자를 겁탈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제주 목사 위에 천주교 신부가 있는 섬으로 전락해 교도들이 제 마음대로 저항하는 자를 사형으로 다스렸으니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참다못한 제주 유지들은 천주교의 폐해를 지적하며 상무사(商務社)를 조직하고 제주목사를 찾았다. 그러나 천주교도들이 상무사 지도자 오대현을 납치해가자 상무사 일원들은 관노이자 의기 높은 젊은이들 사이에 평판이 좋던 이재수를 앞세워 천주교를 공격했다. 신부들을 비롯한 천주교인들이 제주성으로 피난을 갔으나, 제주의 아녀자들이 성문을 열고 성 밖의 상무사를 불러들였다. 대정군수 채구석이 상무사에게 몰래 무기를 건넸고, 관리와 군졸들이 천주교도의 처단을 막으려 들지 않았으니 당시 민심이 어떠했는지 알 만하다.
 
이재수의 난 스틸컷

▲ 이재수의 난 스틸컷 ⓒ 시네마서비스

 
100년 간 잊혀진 제주의 비극

육지와 동떨어진 제주의 비극은 오랫동안 한국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못했다. 외세와 종교의 폭압과 무능한 정부, 민중의 봉기, 봉기 지도자들의 의연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비극적 한국사의 여러 면모가 뭉뚱그려진 사건임에도 역사가들은 이를 조명하지 않았다. 

한국 영화계는 1999년에 이르러 <이재수의 난>이라는 제목으로 제주항쟁이나 신축민란, 때로는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을 영화화한다. 소외된 계층과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던 박광수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당대 인기배우 이정재와 심은하를 주연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영화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다룬 데다 극적 긴장감도 부족하다는 혹평 속에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다. 역사적 사건을 극화하는 과정에서 봉기의 성격을 왜곡했다는 비판까지 쏟아졌으니 영화가 의도에 부응하지 못한 건 분명해 보인다.

다만 영화가 제작된 뒤부터 긍정적 변화도 있었다. 오랜 기간 사건을 백안시해왔던 천주교가 제주 선교 100주년을 맞아 교회의 잘못을 반성하는 목소리를 낸 것이다. 4년 뒤인 2003년엔 '1901년 제주항쟁 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120주년을 맞은 올해 민군의 주둔지이자 숨진 교도들이 묻힌 황사평에 '화해의 탑'이 세워졌다.
 
이재수의 난 스틸컷

▲ 이재수의 난 스틸컷 ⓒ 시네마서비스

 
바로세우지 못하면 반드시 무너진다

20세기 제주에서 두 차례의 민란이 있었다. 하나는 1901년 이재수 등이 주도한 난이었고, 민중을 괴롭혀온 천주교도들을 처단한 뒤 가담한 백성의 안전을 약속받고 의연하게 자수해 희생됐다. 그러나 그들에게 죄인이란 누명을 씌운 정부는 곧 외세에 무너져 내렸고, 그 여파가 1948년 4·3사건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민족과 민중의 정기를 바로세우지 못한 해가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다.

예술은 역사와 문화와 사람을 이야기한다. 영화 <이재수의 난>은 예술로서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으나 제주에 이재수와 그를 따른 수많은 민중이 있었음을 기억하게 했다. 한국의 정치와 예술과 언론은 오랫동안 이재수의 동생 이순옥과 같은 이를 외면해왔다. 역사를 오로지 희생자 스스로가 기억해야 하는 것으로 남겨두었다. 그 결과 한국에선 신축년 제주의 비극이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다.

올해 황사평에 건립된 화해의 탑은 잊히고 쓸려나가는 기억을 한 곳에 추스러 민족과 민중의 정기를 바로세우려는 뜻의 결실이다. 제주에 아직 예술이 해야 할 역할이 남았다면 그중 얼마쯤은 이와 같은 일을 기록하고 되새김으로써 남은 사람을 일깨우는 일일 것이다. <이재수의 난>보다는 조금은 더 나은 방식으로.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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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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